이스라엘과 언약은 11장의 예언에서도 언급되어 있다(22, 28, 30-35절). 다니엘 9장 24-27절에서처럼 11장의 묵시적 성질은 2, 7, 8장보다 훨씬 덜 분명하다는 점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11장을 묵시에 포함시키더라도 두 가지 관찰이 유효하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북방 왕”“남방 왕” 사이의 갈등이 주요 관심사이며, 조건성의 암시는 없다. 사실 예언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본질은 조건성이 그것을 해석하는 요소라는 데 강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906.2)
 b.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도 다니엘과 비슷하다. 요한은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될 지도 모르는’이 아니라] 일을” 기록하라는 말씀을 듣는다(계 1:19).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투쟁, 마지막 심판 장면(계 20), 그리고 모든 일의 마지막에 남은 무리-“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계 14:12)-를 본다.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멈추고, 악의 동맹의 최종적 결과가 나타나고 하나님이 개입하여 형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 안에 안전하게 서 있다. 그 혼란을 넘어서, 재림 전의 악몽 같은 사건 후에,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마침내 나타난다(벧후 3:13). (906.3)
 그렇게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오랜 다툼인 대쟁투는 끝난다. 하나님이 끝내셨기 때문에 그것은 끝난다. 그 끝은 시간과 공간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처럼 확실하다.(참조 대쟁투 1-V). (906.4)
 c. 결론
 그러므로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주로 관련된 성구들을 제외하고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예측들은 조건성에 좌우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리는 바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지력이 주요한 개념들이다. (906.5)
 C. 역사주의
 그 자체의 증거에 따르면 다니엘의 예언적 메시지들은 바벨론 유수 기간 중에 주어진 예측들이다. 이예언적 예고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ad 1세기에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항이다. 신약 묵시록의 종점은 그리스도의 재림, 그에 이어지는 천년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성립이다. (906.6)
 그 두 개의 묵시문서는 분명히 서로 연관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다니엘의 특정한 모티프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그리스도교적인 맥락에서 그것들을 증폭시켜서(참조 단 3장; 계 13장; 단 7:13, 14; 계 4-5장; 참조 13:1, 2), 다니엘이 묘사하는 역사의 많은 부분과 나란히 보여 준다. 다니엘의 종말에 대한 묘사를 계시자가 확장시키지만, 두 책 모두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으로 끝난다. (906.7)
 예언자들이 그 지역의 당대에 해당되는 기별을 전한 것과 달리,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이상들은 보편적인 역사의 전체에 대한 윤곽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묵시적인 이상의 해석은 저자 자신의 때부터 시작하여 독자를 종말까지 데려가는 우주적인 범위를 고려해야 한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한 유대인 박해 시대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요한의 초점은 단지 1 세기 로마 황제에게 당하는 그리스도교회의 괴로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이 책들에서 오로지 마지막 때에 대해서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906.8)
 이러한 장들의 성취를 전적으로 과거에 두거나(참조 역사—비평적 관점), 전적으로 또는 주로 미래에 두거나(참조 미래주의), 또는 이들의 성취를 선과 악의 세력간의 영원한 대결이나(참조 관념주의) 그리스도교 시대의 제시(참조 무천년주의)에 국한시키는 해석의 방식들은 이러한 구성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906.9)
 묵시적 이상에 나타나는 역사적 연속은 수치(數値)를 표시하는 형용사와 같이 시간적인 지표나, “후,”“다음,” “다른”과 같은 단어들에 의하여 제시된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말하기를, “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넷째 나라는 · ·”(단 2:39, 40)이라고 한다. 7장의 꿈을 이야기할 때, 선지자는 사자와 같은 첫 번째 동물을 보고 나서, “다른 짐승, 곰과 같은 둘째 짐승”(4, 5절)을 보았다. “그 후에” 다니엘은 표범과 같은 짐승과 “넷째 짐승”을 보았다(6, 7절; 참조 단 8:17, 19, 23, 26; 9:24-27; 11:2, 6, 35, 40; 12:1, 4). (907.1)
 순차적인 전개는 요한계시록 12-14장에 묘사된 투쟁에서도 두드러진다. 12장에서 여인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이는 올려간다. 여자는 광야로 피신하고, 1,260일 동안 광야에서 보호를 받는다. 용은 그 여자의 남은 자손과 전쟁을 벌인다. (907.2)
 13장에서서 용, 바다 짐승, 땅 짐승과 같은 괴수들의 행렬을 본다. 뒤에 나타난 둘의 존재는 용에게서비롯되었다. 거룩한 아이를 죽이지 못한 용은 여자의 “자손”을 추격한다(계 12:13, 17).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해 그는“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바다 짐승에게 준다(계 13:2). 바다 짐승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지만 낫는다(3절). 바다 짐승의 패권은 “마흔두 달”동안 지속된다(5절). (907.3)
 14장13장과 대응을 이룬다. 여기 요한계시록 14:6-12의 세 천사는 땅에서 나온 짐승의 기만 가운데서 기별을 선포한다. 그들의 사역은 재림에 의해 완성된다(14절). (907.4)
 따라서 이상의 형식 그 자체가 일종의 역사주의적 성취를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요한계시록 12-14 장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강림 사이의 기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907.5)
 수치 형용사는 인(印)과 나팔에서 다시 등장한다. 요한계시록 17:10은 짐승의 일곱 머리가 일곱 왕”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하며, 그 중에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라고 한다. (907.6)
 다른 방식의 해석들과는 달리, 역사주의(때로는 제 각각이고, 선정적이고, 사변적이며, 모순된 접근 방식에 의해 손상되었지만)는 성경의 묵시에 대한 가장 타당성 있는 해석학적 접근법으로 보인다. 시간을 나타내는 표지는 저자 자신의 시대에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끝나는 여정에 세워진 표지판들처럼 독자를 인도한다. 역사주의가 취하는 길은 몇 개의 짧은 발자국 후에 사라지지 않으며(역사-비평적인 해석의 주장),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불쑥 나타나지도 않는다(미래주의의 주장). 오히려, 그것은 연속적인 선으로서, 때로는 구불구불하고 겉보기에는 뒷걸음질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항상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907.7)
 D. 1일—1년 원칙
 상징적인 이상들에는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된 시간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니엘 7:25에 따르면, 작은 뿔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압제할 것이라고 한다 다음 장의 이상에서는 한 천사가 다른 천사에게 “이천삼백 주야”후에 성소가 복원될 것이라고 말한다(단 8:4). (9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