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의 결혼 언약 제 3 장 결혼과 성(性) 1. 성에 대한 과거의 태도들
 고대 이스라엘 히브리 백성은 인간의 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선물로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들은 후기 헬라 사상인 영과, 육 곧 성교는 악한 “육적” 활동으로 생각하는, 이원론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생각은 결혼 생활에서 성을 아름답고 즐거운 것으로 보는 히브리인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결혼은 부분적으로 부부의 성생활의 시작을 나타내는 큰 기념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83.1)
 결혼 피로연이 끝나면서 혼인한 한 쌍이 식장을 떠나 깨끗한 흰 천이 준비된 곳에서 성교를 나눈다. 천을 물들인 피는 혼인의 완성의 표로 신부의 처녀성을 나타낸다(신 22:13~19). 갓 결혼한 신랑은 그의 신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것조차도 제외되었다!(신 20:7) (83.2)
 이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성에 대해 건전한 태도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성을 종족의 번식 수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쾌락을 위하여 주신 거룩한 선물로 알았다. 인간의 성을 존귀하게 여긴 전통적인 모본이 아가서에서 발견된다. 이 책은 종종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똑같이 당황시킨다.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라든가, 여러 학자들은 아가서를 성서의 경전에 포함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을 음란하게 묘사한 책으로 간주한다. 캘빈(Calvin)을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아가서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상징된 비유로 간주하며 해석하고 경전으로 포함시킬 것을 지지했다. 이 책은 우화가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성에 대한 낭만적 찬양이다. 어떤 전통에 따르면, 그 책의 부분들은 결혼식과 축제 동안에 낭송되었다고 한다. (83.3)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을 때, 가나안 거민들이 다산 생식을 위하여 바알 신전에 거하는, 그들 스스로가 신성하다고 여기는 매춘부 사제와 성교를 나누는 죄악이 폭로되었다. 이 악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여러 규정들이 주어졌다. 엄격한 금지들이 발해졌는데, 예를 들면, 개인의 신체의 어느 부분을 공중에 드러냄을 금함(창 9:21; 삼하 6:20), 근친상간(레 18:6-18, 20:11-12, 14, 20: 신 27:20, 22), 동물과 접교(레 18:23; 20:15-16), 동성연애자(레 18:22, 20:13), 그리고 여러 종류의 “비정상적인” 성적 행위들(출 22:16; 레 19:20, 29, 15:24, 18:19, 20:18; 신 25:11)이다. 전체로 볼 때, 비록 유대인들이 기본적으로 성에 대하여 생식의 기능이란 점에서 이해했지만, 비교적 건전한 견해를 가졌다. (84.1)
 신약 시대
 신약 시대에서 우리는 성에 대한 두 극단적인 자세의 발단을 볼 수 있는데 즉, 방탕과 독신의 문제이다. 혹자는 혼외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복음적 자유인 양 해석하기도 한다. 유다는 저들은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유 1:4)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벧후 2:14)는 거짓 교사의 유혹을 경고 한다. 성적 염세주의와 방탕의 문제는 고린도 교회에 현저하게 나타났는데 바울은 근친상간과 간음을 행하는 자들을 공공연하게 견책 하였다(고전 5:1, 6:16-18). (84.2)
 어떤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관련된 모든 생활은 악하다고 하는 헬라철학 사상에 물들었다. 성행위는 “육적인” 쾌락인 고로 본질적인 악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생각이 그리스-로마 세계엔 보편화 되어 있었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상당한 감화를 받아 실천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 교회의 어떤 교인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고, 결혼한 자들일지라도 성행위를 억제해야 하였다(고전 7:1-5, 8-11, 25-28). (84.3)
 바울은 결혼한 자의 성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확언하면서, 그와 같은 “금욕적”인 신자들에게 권면한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 서로 분방 하지 말라. ∙∙∙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3, 5), 바울은 독신자와 과부들에게 권면한다(고전 7:8, 25-26). 그러나 그의 권고는 신학적이 아닌 실천적인 입장에서 기초되었는데 즉, 바울은 임박한 환난을 믿었으며 그때에 가족으로 인하여 짐이 가중되는 것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전 7:26~31). 바울의 권면이 성에 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님은 그의 충고가 단지 실천적 면에 기초하여 권면하 였기 때문이다.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고전 7:9, 28). (85.1)
 그리스도인의 교회
 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이미 사도 시대 동안 소수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잠재해 있었고, 초대교회 동안 발전하여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리스도인의 성에 대한 태도를 정죄하도록 만들었다. 이 견해는 헬라 철학을 답습한 것인데 특별히 플라톤의 사상인 이원론 곧, 사람은 두 구조를 가졌는데 영혼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생각이다. 그와 같은 이원론적인 사고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것은 영지주의로 알려졌다. 이 이설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은 악하다고 가르쳤다. 오직 사람 속의 거룩한 불 꽃 같은 생기(영혼)는 선하고 특별한 지식(gnosis)을 통하여 그 불 꽃 같은 생기는 인간의 몸에 잠시 머무르다가 다시 신성한 영역으로 돌아간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풀려나는 구원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85.2)
 이원론적 가르침은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영혼의 불멸에 대한 헬라의 사상이 육체의 부활에 대한 성서의 견해를 대신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서적 개념을 점차로 버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견해를 비성서적으로 거절하는 학자의 수효가 늘어나고 있으나, 그 근본적인 과오는 물질은 악하니 멸절되어야 한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그와 같은 견해는, 성서가 인간의 몸을 포함하여 물질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산물로 가르치고 있는 것(창 1:4, 10, 12, 18, 21, 25, 31)과 대조해 볼 때 심히 잘못되었다. 시인은 말한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성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 (86.1)
 인간의 육체를 본질적인 악으로 보는 비성서적 헬라 개념을 도입한 것은 여러 세기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성에 대해 왜곡된 태도를 갖도록 했다. 그 후유증은 오늘날도 여전한데 많은 사람들은 성에 대한 죄의식이 있어 심지어 결혼 생활의 성교 까지도 불안해한다. (86.2)
 어거스틴의 역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한 교부는 바로 어거스틴(354-430 AD)이다.2 그는 인간이 죄 때문에 성적 정욕과 흥분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성교는 성욕의 흥분이 없이도 행해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여자의 월경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같이 정자도 자연스럽게 아내의 음부로 인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86.3)
 죄의 결과로, 성교를 할 때 몰아넣어야 하는 정욕을 동반하게 되었는데 어거스틴은 이것을 욕정 혹은 정욕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교를 통한 정욕의 만족을 자녀를 출산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생각했다. (87.1)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은 아담의 범죄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성교를 죄가 옮겨지는 통로로 여겨서, 곧 원죄와 성교의 정욕을 동일시하였다. 원죄가 전달될 수단으로 성교를 생각함으로, 어거스틴은 성을 죄된 쾌락행위라고 결론 지었다. 심지어 이 사상은 갓난아이의 영혼의 원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출생 후 즉시 세례(영세)를 베푸는 것을 필요로 하게 하였다. (87.2)
 이 견해의 주된 과오는, 성교로 감염되는 질병처럼 전달될 수 있는 생리학적 요소로 원죄를 변형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죄는, 생리학적이 아닌, 범법이다. 죄는 거룩한 도덕률을 범하는 불법이며(요일 3:4), 성적 접촉으로 전가되는 생리학적 감염이 아니다. 전달되는 것은 어거스틴이 믿었던 죄책감이 아닌 그 심판이다. 죄의 식은 제3자에게 결코 전가될 수 없는 거룩한 원칙을 범한 개인적 범죄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처벌은 질병이나 악한 유전적 성향으로 전달될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 사대까지”(출 34:7) 벌하실 것을 말한다. 아담의 죄의 경우, 인류에게 전가된 것은 악에 치우치는 성향과 사망을 포함한 처벌의 결과 들이다. 이 결과들은 유아세례(영세)를 통하여 기계적으로 제거될 수는 없는 것이다. (87.3)
 원죄
 원죄의 개념은 바울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한 로마서 5:12에서 근본적으로 유래되었다. 이 성경절에서 사도는 인류는 아담의 죄와 사망을 분여받는다는 사실을 단순히 말한다. 바울은 그 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성교가 인류로 하여금 아담의 죄와 죽음에 동참자가 되도록 하는 통로라는 암시를 주지도 않는다. 문맥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바울의 관심은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를 죄인 되게 했으나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를 의롭게 하였다는 기초 진리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88.1)
 바울이 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 사이를 연결하려는 의도는 성교로 자녀를 출산함으로 자녀에게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 결속을 말하려는 데 있다. 아담의 죄가 그의 가솔에게 이어지게 된 것은 가족 식구들이 그와 함께 공동결속을 나누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이 아담의 죄가 인류의 죄가 된 것은 그와 함께 공동결속을 나누는 일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논리는 어거스틴의 원죄를 성적 흥분과 성교와 동일시하려는 주장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