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4 장. 안식일:소속의 기쁜 소식 II. 하나님이 안식일을 계약(언약)의 상징으로 택하신 이유들
 그 다음으로 안식일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가 매 순간의 처음이고 마지막 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포기의 침례 고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매 주일마다 마련해 주고 있다.28 두 가지의 의미에 있어서 안식일의 준수가 구약의 할례나 신약의 침례보다 언약의 고백의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다. 첫째는 할례나 침례가 일반적으로 아직 이러한 의식의 깊은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영아기나 십대의 시기에 받게 되는 계약의 표징들이라는 점이다. 두번째는 이 두 의식이 옛날의 언약을 나타내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안식일 준수는 우리가 젊었을 때 하나님께 한 언약을 이전에가 아니라 평생토록, 한 주일에 한번씩 새롭게 해 준다.29 (106.4)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사람이 습관적으로 안식일을 소홀히 취급하여 자신의 “오락”을 구하게 되는 것(사 58:13)은 순식간에 갑작스럽게 신앙이 허약해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침례 당시에 하나님께 행한 언약의 뿌리 깊은, 그리고 고의적인 거역의 결과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들은 안식일의 파괴 행위를 “패역” 또는 “반역” 행위와 같이 보았다(겔 20:13, 21; 느 13:18; 렘 17:23). 이같은 파괴행위는 일시적인 과도한 욕망이 아니라 항구적인 불순종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침례를 통하여 인(印)쳐지며 안식일을 통하여 가꾸어지는 “연애”를 주님과 더불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침례 때에 하나님께 맹세한 엄숙한 서약이 안식일을 통하여 더욱 굳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06.5)
 재생. 물의 침례가 죽음과 새로운 생명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안식일의 또한 포기와 재생의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침례를 칭하여 새로운 그리스도인 생활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은 매 주일마다 그 첫 언약을 재생시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주 일회(一回)의 이 재생은 안식일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자세히 살피고 확인해 보도록 제공해주는 시간을 통해서만 이 가능하다. 안식일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또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랑데부)을 갖도록 마련해 주는 기회는 육체적, 사회적, 영적 재생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107.1)
 안식일의 쉼이 제공하는 육체적 재생(휴양)은 평일에 경험하는 휴식과는 다르다. 평일에는 기껏해야 노동으로 부터의 쉼이 고작이고 일에 대한 생각으로 부터는 쉴 수가 없다. 사업하는 사람은 일 거리들을 서류 가방이나 혹은 머리 속에 담고 집으로 가져간다. 학생들은 집에 가서도 숙제를 하거나 시험을 준비 해야 한다. 가정주부들은 내일의 찬거리와 빨래 걱정을 해야 한다. 미처 마치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은 육체가 쉬고 있을 순간에도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취침 전에 보다도 오히려 자고 난 아침에 피로를 더 느끼곤 하는 것이다. (107.2)
 그러나 안식일에 그리스도인은 단지 일만을 쉬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까지 쉬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날에는 출근부도, 마감 기한도, 시험도, 상품 생산이나 경쟁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육체는 안식일에 정신이 쉼을 얻음으로 비로소 안식을 취할 수 있으며 정신은 하나님 안에 쉬기 때문에 쉼을 얻을 수가 있다. (107.3)
 안식일은 또한 기왕에 침례를 통하여 수립된 제(諸) 관계들을 강화시킴으로써 사회적인 재생에도 기여하고 있다. 평일의 노동은 가까운 가족들과 교우들을 사방으로 흩어 놓아 부부간의, 부모 자식간의, 그리고 형제간의 관계를 돈독히 할 시간적 여유를 없게 한다. 바쁘게 일을 해야 하는 평일에는 “우리가 다 그 속에서 침례를 받은”(고전 12:13)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구성원들을 자칫 잊어 버리게 된다. (107.4)
 심지어는 자신의 친 가족들까지 잊어버릴 때가 적지 않다. 안식일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새롭게 확인하는 경험을 하면서 그동안 소홀히 해왔던 관계들을 튼튼히 다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고 친구이든 원수이든 모든 사람과 함께 자신의 우정과 친교와 관심을 나누려는 결의를 다짐하게 된다. 안식일에, 그리고 안식일을 통하여 제공되는 이같은 봉사는 기왕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수립된 계약 관계를 새롭게 해 주고 강화시켜 준다. (107.5)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안식일이 영적인 재생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 날은 믿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들을 기억하고 고맙게 여기기 위하여 시간을 냄으로써 자신의 침례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날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매 안식일 마다 앞에서 기술한 자기 포기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침례를 새롭게 받으며 또 매 안식일마다 그 날이 제공하는 영적인 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침례를 새롭게 받는다.30 특히 영적 재생을 통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침례는 안식일의 개인적인 예배와 공중 예배의 경험을 통하여 일어나며 안식일의 예배 경험은 평일의 예배 경험과 본질상 다르다. (108.1)
 안식일 예배는 분주한 평일의 일정 속에 억지로 끼어 있는 한 순간의 묵상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소리를 더욱 명확히 듣기 위하여 세상의 걱정들을 제쳐놓고 마음을 산란케 하는 여러가지 소리들을 조용하게 하는 하루 전체이다. 하나님과의 이같은 만남을 통하여 신자는 생생한 용서를 체험하며 자신의 조각난 매일의 생활에 질서를 이룩하며 자신의 도덕적 의식을 재건하고 자신의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목표들에 대하여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새로운 영감과 은혜를 받는다. 침례와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생명에게 안식일이 제공하는 영적인 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계약 관계는 더욱 튼튼해지고 더욱 풍요하게 된다. (108.2)
 5. 영(靈)적인 본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의 계약 관계를 상징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택한 다섯번째 이유는 제칠일이 이같은 관계의 영적인 본질을 잘 일깨워주고 있다는 사실 속에 시사되어 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말씀 하셨을 때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가깝게 정의했을 것이다. (108.3)
 문맥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거룩하고 특별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오해를 시정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영”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정당한 예배 장소야말로 예배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항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여인은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가장 심오한 통찰을 보여 주심으로서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설명하시기를 사람은 거룩한 장소들이나 물체들 혹은 사물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다시 말해서 영적이며 진실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께 올리는 참된 예배는 특별한 신전에 찾아가거나 또는 정교한 의식을 봉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막 12:30)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108.4)
 안식일과 하나님의 본성. 안식일은 하나님을 구상화(具像化)시키는 경향을 방지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에 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수가 있는가? 안식일의 본질을 조사해 본다면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안식일은 시간적인 상징으로서 시간의 본성 만큼이나 신비적인 하나님의 본성을 적절히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한정될 수도, 지배될 수도 없다. 인간은 시간과 관련을 맺을 수 있을 뿐 시간을 지배할 수는 없듯이 역시 하나님과 관련을 가질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지배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시간은 둘 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이 둘은 모두 조종될 수도 없고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어질 수도 없다. (109.1)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시간을 인간의 경험이 미치지 못하는 하나의 신비인 타자성(他者性 otherness: 他者 또 他性)과 그리고 친교를 경험하는 경우인 일체성(togetherness)으로 규정하고 있다.31 타자성일체성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질의 기본 특성이 아닐까? 안식일은 물체의 한 단위가 아니라 시간의 한 단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물체화 될 수도 없고 제한을 받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인간의 유추(“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사 40:18)와 제어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효과적으로 상기시킬 수가 있다. 동시에 일체성의 순간인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초월”하시는 분 일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안에서 쉽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대단히 “가까이” 계신 분이란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히 4:10). (109.2)
 우상숭배에 대한 해독제. 안식일은 믿는 사람에게 단지 하나님의 본성을 상기시킴으로써만이 아니라 신자를 우상숭배로부터 보호해 줌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의 유지에 이바지하고 있다. 프리츠 거이(Fritz Guy)는 말하기를 “성일(聖日)에 의한 예배와 우상 숭배는 도저히 서로 가까와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한 날의 형상을 조각하거나 제조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32라고 하였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예수님의 시대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이 안식일 준수에 세부적인 규칙들을 부과시킴으로 안식일을 구상화(具像化) 하는 데에 성공한 사례를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려 할 것이다. (109.3)
 하나님과 만나는 날인 안식일이 대단한 정밀성을 가지고 준수되어야 하는 한갖 “물체”로 전락됐다는 것은 예배의 수단으로 이용되던 이 날이 예배의 대상으로 바꾸어 졌다는 말이 된다.33 그러나 안식일이 이같이 변조되었다고 해서 안식일의 고유한 특질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안식일이라는 가장 “내화성”(耐火性)이 강한 상징까지도 계율적이며 심지어는 우상숭배적인 예배의 대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109.4)
 모든 상징들 중에서도 안식일이라는 시간이 아직까지도 가장 훌륭하게 하나님의 구상화(具像化 혹은 물체화)를 저항해 오고 있다. 안식일은 “그를” 예배하지 않고 “그것”을 예배하는 경향을 방지시키는 가장 확실한 보호 수단이 되고 있다. 창조의 기간에서나 또는 십계명에서나 인간은 “거룩한 대상”(또는 사물)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할 하나의 “거룩한 날”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세개의 부정적 명령과 한개의 적극적 명령을 설명하고 있다. (109.5)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되 마치 여러 신(神)들을 섬기면서 그 중 한 분이신 하나님도 섬긴다는 식의 부분적인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물질적인 표상을 이용하여 예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네째 계명이 나오는데 이 계명은 “하지말라”가 아니라 “하라”는 명령이다. 네째 계명은 인류들에게 어떤 거룩한 물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날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109.6)
 앞의 세 계명들은 하나님과의 참된 영적 관계의 유지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 이를테면 거짓 신들이나 그들의 우상에 대한 숭배, 그리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러움 따위를 제거하자는 데에 의도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렇듯 하나님 앞에 이르는 길을 정돈한 이후에 네째 계명은 신자들에게 마술적인 주문의 암송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나누어 갖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경험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관계의 가장 적절한 상징으로서 시간을 택하신 것이다. (109.7)
 하나님의 이같은 선택의 중요성은 그동안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영적 관계를 신전, 성상(聖像), 무덤, 신조, 유물(성자들의 유골, 십자가의 나무 파편들, 옷 조각들)등 생명이 없는 물체들의 숭배로 바꾸려는 인간의 거듭된 시도로 말미암아 손상되었다. 로마에 있는 성 로렌스(St. Laurence)의 조그마한 교회당을 상크타 상크토룸(Sancta Sanctorum) 즉 “지극히 거룩한” 교회라고 부른다. 그 교회의 제단 위에는 라틴어로 논 에스트 인 토토 상크티오르 오르베 로쿠스(Non est in toto sanctior orbe locus) 즉 “이세계에서 이 보다 더 거룩한 곳이 없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무슨 근거에서 그같이 엄청난 주장을 할 수 있었는가? 주요 근거는 그 교회당이 보유하고 있는 유물들의 숫자이다. 가장 높이 숭배되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사자에 의하여 제조되었다고 주장되는 구세주의 조상(彫像)이다. (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