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역사와 신학 제 4 장. 안식일:소속의 기쁜 소식 II. 하나님이 안식일을 계약(언약)의 상징으로 택하신 이유들
 3. 불명성과 보편성
 불멸성.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공동 언약의 상징으로 택하신 세번째 이유는 시간의 불멸성과 보편성에서 찾을 수 있다. 안식일은 시간이기 때문에 언제나 참신한 의미를 지니며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때라도 이용될 수 있는 상징인 것이다. 안식일은 또 신전 같은 어떤 물질적인 표징이 아니기 때문에 불후(不朽)의 것이다. 공간이나 물체가 아니라 시간이기 때문에 비물질적이다. 물질적인 객체에 첨부되어 있는 이념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개체 자체와 함께 그 질이 저하되고 분해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102.2)
 나의 고향 도시인 로마는 고대의 영광스러운 기념비들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이 기념비들을 위대한 과거의 상징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바라 본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일백명의 로마인들에게 누가 언제 저 로마의 영원성의 상징인 콜로세움을 건축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면 아마 90명 이상이 “나에게 묻지 말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102.3)
 기념비들은 존중히 여김을 받고 있으나 그 의미와 생명력은 점차적으로 상실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안식일은 자체의 의미를 잃게 되는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물체가 아닌 시간으로서 인간의 조종과 파괴의 능력을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안식일은 독자들과 필자의 안식일처럼 꼭 같은 24시간의 하루이다. 이 날의 의미는 언제나 참신하고 경우에 합당하다. 사실상 안식일은 제정되던 당시 보다도 지금에 와서 훨씬 그 적실성이 높아졌다. 왜 그러냐하면 안식일의 의미와 기능이 구속 역사의 전개와 함께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102.4)
 어떤 면에서는 모든 날이 안식일과 같았던 에덴에서(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임재 하신 낙원에서)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과 경험을 제고(提高) 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주일의 평일들을 고달프고 병적인 열기로 차 있는 이 세상에서 보내어야 되는 오늘날에 와서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평화를 다시 누리기 위하여 안전하게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평온의 섬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102.5)
 

기념물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있지만 점차 그 의미와 생명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누가 백명의 로마인들에게 누가, 언제 콜로세움을 건축했느냐고 묻는다면 90명은 “내게 묻지 마시오!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 의미를 잃고있는 고대의 한 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물질이 아니라 시간이며 따라서 파괴시키고 조작하는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 있다. 안식일의 의미는 언제나 새롭고 적실성이 있다.
(103.1)
 보편성. 안식일은 시간이기 때문에 불후(不朽)의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시간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하여 어느 한사람도 밀어제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접근할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로마나 예루살렘이나 메카로 순례의 길을 떠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화려한 궁전에 살든 아니면 누추한 감방에 살든 상관없이 안식일은 한 주일에 하루씩 누구에 게나 다가오기 때문이다. (104.1)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물체가 필요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데 유월절(遺越節)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어린양과 무교병(無酵餠)과 쓴 나물들이 필요했다. 또 주님의 성만찬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방과 포도주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떠한 장소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기념할 경우에는 그 같은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104.2)
 돈을 바치는 일에는 평등이 없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바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을 바치는 일은 그렇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量)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표명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돈이라면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바칠 수도 있는 문제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이 부여받은 시간 만큼은 적게 바칠 까닭이 없다. 사람이 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 체계가 들어난다. (104.3)
 사람은 자신이 무관하게 여기는 대상을 위해 시간을 바치려 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시간을 내는 것이다. 제칠일에 영혼의 고요함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세상 사물로부터 손을 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그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안과 밖으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104.4)
 4. 침례 서약(언약)의 재생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상호 소속관계의 상징으로 삼으신 네번째 이유는 이 날이 일주일에 하루씩 침례 서약(계약)을 새롭게 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침례가 신자를 새로운 계약 공동체인 교회로 입교시키는 중요한 의식인데도 계약적인 언어로 묘사되어 있지가 않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교인 상호간의 그리고 신자들과 그리스도 간의 관계를 기술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에서 구약의 계약 모형들을 제한하여 사용한 하나의 이유는 로마 당국이 비밀 결사(結社)를 금지한 까닭이다.22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계약은 곧 불법 단체를 의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중을 기하는 뜻에서 정치적 반역의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 용어들을 가급적 피했을 것으로 생각한다.23 (104.5)
 비록 신약성경에 있는 침례 관계 기사에는 구약의 계약적 언어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계약의 기본 개념만은 들어나 있다. 이점은 둘 다 계약적인 경험임이 분명한 출애굽의 사건(고전 10:1~2)과 할례의 사건(골 2:11~13)에 침례를 연관시키고 있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실상 루이스 타밍가(Louis Tamminga)가 잘 밝혔듯이 대부분의 “성경 이야기는 계약의 역사이다.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계약적 관계에 의하여 성경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대체로 간과하고 있다.”24 (105.1)
 그러면 안식일은 어떻게 침례의 계약적인 경험과 관련되고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침례의 의미와 기능 속에서 관련되고 있다.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계약속으로 들어온 신자가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이 도덕적인 생명으로 일어남으로써(롬 6:3~4) 자신의 생명 속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지내심과 부활을 재현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식일도 침례가 가지고 있는 죽음과 부활의 경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안식일도 침례처럼 포기와 소생의 형식이랄수 가 있는가? (105.2)
 필립 멘랑흐튼(Philip Melanchton)은 “신학요론”(Loci Communes 〈1555〉)에서 안식일의 이같은 두가지 의미를 인정하여 말하기를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과의 두번째의 평화가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 부활하기까지 무덤에서 쉬실 것이라는 은혜로운 약속이 주어졌을 때 안식일은 재건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우리 속에 당신의 평화와 기쁨의 처소를 정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분의 지혜와 의(義)를 나누어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다시 영원히 찬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안식일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경험으로 느껴져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안식일의 이같은 의미를 더욱 더 깊이 생각하도록 하자”25고 하였다. 멜랑흐톤의 권고를 받아들여 우리들도 안식일의 이같은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하도록 하자. (105.3)
 포기. 침례와 마찬가지로 안식일도 포기를 상징하고 있다. 더 큰 특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일부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는 어떠한 두 사람도 하나로 합할 수가 없다.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더 큰 선물들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신다. 제일 먼저 그들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때에도 평일의 노동이 주는 안정성을 포기해야 한다.(출 20:10) 성경은 말하기를 “밭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니라”(출 34:21)고 하였다. (105.4)
 A. 마틴(Martin)이 옳게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의 생활을 미루어 생각해 볼 때 밭갈 때나 추수 시기에 일을 쉬는 것은 “식량의 감소”를 뜻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진정한 형태의 포기가 아닐 수 없다.26 그러나 오늘 날도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준수는 진정한 희생과 포기를 뜻한다. 제칠일을 하나님의 거룩한 날로 지키기 위하여 노동을 쉴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어 있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이 점이 더욱 절실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언약을 저버리기 보다는 차라리 좋은 직장, 진급과 좋은 보수, 때로는 생계와 자유까지라도 포기하기로 선택했으며 지금도 선택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여러 신도들의 영웅적인 증거를 다 기술한다면 여러 권에 달하는 사도행전이 될 것이다. (105.5)
 침례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비록 침례식장의 물밑에 상징적으로 장사지낸 바 되기는 했지만 계속적으로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따라서 계속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기심과 탐욕의 포기를 뜻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타의에 의하여 노예가 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의(自意)에 의하여 탐욕의 노예가 되고 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7일 내내 자신도 일하고 남들에게도 일을 시키고 있지만 얻는 것은 가중된 불만족감 뿐이다. (106.1)
 안식일은 휴식을 명함으로써, 즉 탐욕스러운 마음을 중지시키고 감사하는 마음을 진작시킴으로서 이같이 물릴줄 모르는 탐욕을 치유시키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안식일은 물질적인 재화를 얻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이미 얻은 선물들을 고맙게 느끼기 위하여 시간을 내라고 명한다. 감사를 나타내는 마음은 뜻있는, 상호의 소속관계를 유지하고 내적인 쉼과 평화를 경험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침례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자부심의 포기를 뜻하고 있다. 안식일을 통하여 신자는 침례를 받을 때 고백했었던 그리스도에 대한 굴복의 고백을 매 주일마다 새롭게 한다. (106.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일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안전과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잠언의 기자는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걱정되나이다”(잠 30:9)라고 하였다. 안식일은 일을 쉬도록 명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성취로부터 눈을 돌이켜 하나님의 성취와 또 자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주목하도록 권고한다. 주일의 평일들에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이행하는 모든 일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에 자신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안식일이 이르러와서 하던 일을 멈추게 될 때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업적 때문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임을 절실히 인식하게 된다. 칼 바르트가 힘주어 강조 했듯이 안식일은 인간에게 “자신의 계획과 소원, 그리고 자신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칭의(稱義)와 구원, 자기 자신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믿음을 갖지 말도록 명하고 있다. 안식일이 참으로 명하는 것은 인간에게 일을 하지말고 자신의 일에 신뢰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27 (10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