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3. 엘 깁보르—강력하신 하나님 (우리의 전사(戰士))
 메시야의 역할을 예언할 때 성경의 영감은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용사답게 영원한 언약을 “확정하고, 또는 굳게 정하고”(gaḇar) 언약의 모든 조항을 받들어 이행할 것을 말했다(단 9:27). 이 일을 그는 유다 나라를 위해 주어진 최후의 은혜 기간인 “그 주의 중간에” 갈바리에서 그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일 모든 사람을 위해 이행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패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예수의 성육신,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그의 중보이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가바르(gaḇar)란 말을 쓴 것은 구세주를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모든 난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시는 하늘의 용사로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196.1)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와 크게 대조되는 교활하고 속임수에 능한 자들을 날마다 상대하며 다윗은 그들에 관해 하나님과 상의했다. 그는 이런 말로 그들의 이기적이고 교활한 언행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gaḇar),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이 스스로 자신 만만한 자들은 빈번히 그들의 재빠른 말솜씨로 실속을 차리고 살았으므로 그들의 조작하는 말을 멈출 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무슨 다툼이나 비난에 부딪혀도 그들의 혀는 그들을 방어하는 용사였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무적의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196.2)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경우를 통해 우리는 겝베르(gebber)란 명사는 싸우지 않는 남녀나 어린아이들과는 대조되는 용사나 지도적 인물들에 해당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용사란 무방비한 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예컨대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남자들”(gebberim, 전사들)은 떠나도록 허락하면서 그 밖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불허했던 것으로 보아 그런 구분에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출 10:11). (196.3)
 그 밖에도 깁베르(gibber)는 니므롯을 힘센 사냥꾼”이라 할 때 사용되었고(창 10:9), 그리스도께서 기드온을 “너 힘있는 용사여”라고 부르실 때 사용한 말이다(삿 6:12; 참고 11:1). (197.1)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욥은 “그의 능력의(gibborah) 천둥소리”라는 어휘를 썼다(욥 26:14). 다윗은 말하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gibborah) 나를 판단하소서”라고 하였다(시 54:1; 참고 21:13). 그는 주께서 심판 날에 자기의 옹호자와 대표로 서실 것을 예상했으므로 실망하지 않았다. (197.2)
 엘 깁보르 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강력한 바위 집
 이 말이 사용된 또 다른 흥미 있는 본문을 살펴보자. 우선 유다 나라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붕괴될 당시의 환경을 예레미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의 심경을 짓누른 사태를 파악한다면, 왜 그가 야훼 깁보르란 이름을 불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의 비방과 사면에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고발하라, 우리도 고발하리라’ 하나이다. 나의 모든 친한 이들도 나의 넘어짐을 기다리며 말하기를 ‘혹시 그가 미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겨 그에게 복수하자’ 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강하고 무서운 분[Yahweh gibbor]으로 나와 함께 계심으로, 나의 박해자들이 넘어져서 그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며 그들이 크게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크게 번성하지 못할 것임이니이다. 그들의 영원한 치욕이 결코 잊혀지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나 의인을 시험하사 그 내장과 심장을 보시는, 오 만군의 주(Yahweh ṣeḇa'oṯ, 야훼 츠바오트)여, 그들에 대한 주의 복수를 나로 보게 하소서. (야훼 란 이름은 하나님을 심판자로 나타낸다.) 이는 내가 주께 나의 사정을 고했음이니이다”(렘 20: 10-12). (197.3)
 젊은 선지자는 엘 깁보르 의 임재와 그의 힘을 느끼는 순간 경쾌한 기분으로 이렇게 말한다: “주께 노래하라.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이는 그분이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셨음이라.” 그러나 그가 돌이켜 다시 현실을 보는 순간 그의 기분은 다시 침울해진다: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고 내 어미가 나를 낳은 날이 복을 받지 못하게 하라. ‘남자아이가 네게 태어났다’고 내 아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그를 심히 기쁘게 한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지라. 그 사람으로 주께서 뒤엎으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셨던 성읍들같이 되게 하며, 그로 아침에는 우는소리를 낮에는 고함치는 소리를 듣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내 어미로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여 그 태가 나와 함께 항상 크게 하였음이라.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 수고와 슬픔을 보며 나의 날들이 수치와 함께 소멸됨을 보는가?”(렘 20:13-18). (197.4)
 주님은 당신의 백성이 최후의 재난을 당하고 있을 때 선지자 예레미야를 택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기별자로 보내셨다. 아마 그는 B.C. 625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B.C. 580년경 애굽에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약 45년간 봉사하면서 국민 도덕의 무정한 퇴폐와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가 궁극적으로 망하는 것을 목도했을 것이다. 그는 세 차례의 포위를 모두 당했고, 세 차례의 포로 행렬을 모두 보았으며, 왕들이 하나하나 폐위 또는 살해되는 것과 백성의 고집스런 반역이 악화 일로(惡化一路)를 치닫는 것을 보았다. (198.1)
 그는 심한 폭행과 굶김과 악취 나는 지하 감옥에 던져 넣음을 당했고 마지막엔 질퍽거리는 진흙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래도 그는 쉬지 않고 백성에게 하나님의 기별을 들으라고 호소했다. 그들은 그를 비방자라 비난하며, 나쁜 소식 외엔 그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또 그를 부정적 인물로 비방하고 반역자로 몰았다. 위에서 읽은 구절들에서 우리는 백성이 그의 기별을 배척한 것 때문에 그가 상심하여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진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용사, 야훼 깁보르 에 대한 그의 신뢰심은 결코 시들거나 꺼진 일이 없었다. (198.2)
 선지자들은 사단의 가장 주요한 공격 목표
 성경의 선지자들은 누구나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가 당한 것과 유사한 대접을 받았다. 예수님은 당신의 지상 봉사가 마쳐 갈 때 당신의 택하신 백성의 그런 성향을 개탄하셨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 37). (199.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신자들은 선지자가 있고, 그녀가 남긴 글은 권면과 경고, 역사와 계시, 증언과 예언을 망라한 여러 책으로 출판되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널리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예레미야가 당한 것처럼 그녀를 지지했야 할 사람들로부터 너무나 심한 미움을 샀다. 그녀가 죽은 후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글에 대해 악평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증오심을 일으키는 말을 하고 있다. 재림 교인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선지자성에 대해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옛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배척했듯이, 그녀의 증언 중에서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우상을 지적하는 부분들을 배척한다. 사실 그들은 예레미야 당시에 선지자를 공격하던 사람들의 후예인 것이다. 그녀도 예레미야가 가졌던 똑같은 하늘의 용사, 엘 깁보르 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는 그녀의 사역을 옹호하고 그녀의 글을 세상 끝날 까지 보존하실 것이다. (199.2)
 예레미야는 후에 승리의 비젼을 받고 낭랑하게 말했다: “오 너희 민족들아, 주의 말을 듣고 먼 섬들에서 그것을 선포하여 말하라. 이스라엘을 흩으셨던 이가 그를 모으시고 지키시리니, 마치 목자가 양 떼에게 하는 것같이 하시리라”(렘 31:10). 이런 확신은 많은 기도와 지난 날 당신의 백성을 다루신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깊은 고찰에서 울어 난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간구했다: “아, 주 하나님이여! 보소서. 주께서는 주의 큰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으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못하실 일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수천 명에게 자애를 베푸시며 조상들의 죄악을 후에 그들의 자손들의 품에 갚으시오니, 그의 이름은 위대하신 분이며, 능하신 자(ha-gibbor), 만군의 주시니라. 계책에 위대하시며 일에 능하시니, ...”(렘 32:17-19). (199.3)
 예레미야는 우리의 무적의 용사, 우리의 영웅, 엘 깁보르 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파악했다. 그분께 너무 어려운 일이란 없다. 어떤 일도 그의 손재주에 과도하거나 그의 의지의 힘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 그의 용맹 앞에는 어떤 원수도 견딜 수 없다. 그는 적을 용사답게 맞아 매번 패배시키신다. 하나님의 백성을 수호하는 용사, 엘 깁보르 의 비전은 메시야, 전능하신 하나님, 엘 깁보르 에 의해 완전히 실현되었다. (200.1)
 예수에 의해 증명된 엘 깁보르 의 용맹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노라고 주장하셨다. 신약에는 힘을 말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권위”를 뜻하는 엑수시아(exousia)이고, 다른 하나는 “폭발적 힘”을 말하는 뒤나미스(dunamis)이다. 전자는 일정한 책임과 권위를 부여하며, 사명을 수행할 위임장을 수여한다. 후자는 강력한, 항거 불능의 힘을 말하며, 여기서 “다이너마이트” (dynamite)란 말이 나왔다. 노벨상의 창시자인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이 물질을 발명하고 이 헬라어를 따서 그 이름을 지었다. 헬라어 뒤나미스(dunamis)는 의지력을 포함하며, 계획 이행에 필요한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힘을 모두 가지고 계신다. 그는 “모든 권세(힘)”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는 지정되고 승인된 용사 엘 깁보르 이며, 책임을 끝까지 수행할 힘을 가지신 분이다. 그는 전투 계획을 세우고, 당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싸움을 영도해 승리를 쟁취하신다. (200.2)
 메시야에 대한 비젼을 본 복음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개역한글판」). 이 찬사는 그리스도의 승인과 개인적 도움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승인],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약속]”(사 42:6, 「개역한글판」). (200.3)
 이 말을 서언으로 선지자는 구세주의 항거할 수 없는 사명을 기술한다: 야훼 용사(Yahweh gibbor)같이 나가시어 전사와 같이 투기를 일으키시고 부르짖으며, 정녕 포효(咆哮)하여 그의 원수를 쳐서 승리하시리라”(사 42:13). 그 나머지 말씀은 야훼 께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위해 분투하시는지 서술한다. 그는 그들의 문제를 아시며, 그들의 취약성을 분명히 보신다. 그는 그들의 원수들을 알아보시고 당신의 백성이 그들의 손에 어떻게 말려드는지 파악하신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계속 그들의 용사가 되어 주신다. 모든 권위와 힘으로 그는 그들의 구원을 완수하기까지 하늘의 계획을 이행할 능력을 구비하고 계신다. (201.1)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를 위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