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와 로마 군대 제3장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와 로마 군대 (A.D. 173-312) B. 병사순교자 열전(兵士殉敎者列傳)에 나타난 초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관
 이런 의미에서 앞서 소개한 이야기의 핵심적 사항을 정리해 보면 첫째, 이들은 하나님과 황제에 대한 이중 충성의 입장과 두 충성의 차별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들은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되는 황제의 명령에 대해서는 불복종이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152.2)
 둘째, 이들은 비폭력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이들은 황제의 처형 명령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들고 반역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이 점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군대에서 처형되거나 축출되어야 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무장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감수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4세기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관으로 지적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더 앞선 시대 이래의 일관된 태도의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52.3)
 셋째, 이들은 황제에 반역하는 폭력 행위와 신자들 및 동포에 대한 폭력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폭력의 신념을 내세우면서도 이른 바 정당한 전투행위시에는 같은 방식으로 비폭력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 무용을 찬양하고 있다.17 이 점은 과거의 비폭력적 전통의 지대한 후퇴로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다. (152.4)
 c. 징집병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The Recruit)18
 징집병 막시밀리아누스의 순교는 295년 3월 1일에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Mauretania Caesariensis)주 테바스테(Thevaste)에서 발생했다. 그는 누미디아의 청년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때 나이는 21세였다. 그는 군대 징집에 따른 신체 검사를 받기 위해 아프리카 총독 디오 카시우스(Dio Casius)의 법정에 출정했다. 군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부친 파비우스 빅토르(Favius Victor)가 아들을 데리고 출정한 것이었다. (153.1)
 그러나 막시밀리아누스는 법정의 신체검사에 불응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므로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총독은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죽게된다”고 경고했으나 그는 “나는 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병사”(non milito . . . non milito saeculo, sed milito deo meo)라고 대답했다. 총독이 그에게 젊은 나이를 생각하라고 충고하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막시미아누스, 콘스탄티우스, 막시무스의 근위병 부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복무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153.2)
 막시밀리아누스는 이 사실들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그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있으며 나로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므로 악을 행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총독은 또 묻기를 “군복무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잘못을 행하고 있다는 말이냐?”라고 하자 막시밀리아누스는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는 당신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총독은 청년의 아버지에게 설득을 부탁했으나 아버지 빅토르는 “그에게 지각이 있으니 최선의 일을 그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 뜻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 디오는 “불충성스럽게 군인의 서약을 거부하였다”는 죄목으로 막시밀리아누스를 참수형에 처했다. 향년 “21년 3개월 18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카르타코로 옮겨 키프리아누스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순교를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153.3)
 이것이 순교 행전의 줄거리이다. 우리는 위의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징병관(Temonarius)19이면서 역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부득불 아들에게 새 군복을 마련해 주고 징병 검사에 응하게는 하였으나 아들의 꿋꿋한 신앙자세를 기뻐하고 있다. 둘째, 막시밀리아누스는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신앙 태도를 비난하였다. 셋째, 막시밀리아누스는 군복무 중에 우상숭배를 거부해서 처형된 것이 아니라 군복무 자체를 거부하고 군인의 선서를 거부하여 처형되었다. 다섯째, 총독 디오는 막시밀리아누스에게 군복무만을 설득하고 있을 뿐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막시밀리아누스의 순교 사화가 신속히 저술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그가 교회에 의해 성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을 미루어 볼 때 그의 태도가 그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에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와 동정을 받았는지를 짐작케 한다.20 (154.1)
 d. 백인대장 마르켈루스(Marcellus, the Conteirion)21
 백인대장 마르켈루스의 순교는 기원 298년 10월 30일 서부 마우레타니아(Western Mauretania) 지방인 틴지타나(Tingitana)에 발생했다. 제7 제미나(Gemina) 군단 소속의 백인대장이었던 마르켈루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신으로 추대된 기념일인22 298년 7월 21일의 축하연 석상에서 더 이상 군복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이교축제 행사들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 세워져 있던 군단의 기치들 앞에 군인의 허리띠와 검과 지휘봉(포도나무나 회초리)을 내던지면서 큰 목소리로 ‘나는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이다. 지금부터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의 황제를 섬기지 않겠다. 나는 나무와 돌로 만든 당신들의 신을 섬기는 일을 경멸한다. 그 신들은 귀머거리이며 벙어리들인 우상이기 때문이’라고 소리쳤다.” (155.1)
 그는 곧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7일 후 히스파니아(Hispania) 관구의 서부지방 행정구역인 갈레키아(Gallecia)주의 지사 포르투나투스(Fortunatus)의 법정에 섰다.23 포르투나투스는 어찌하여 군장의 일부인 요대와 그것에 달린 검과 포도나무 회초리를 내팽겨쳐서 군대의 기율을 어겼는지를 추궁했다. 그는 여전히 “큰 소리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어떠한 선서로서도 싸울 수 없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싸울 뿐이라”고 대답했다. (155.2)
 포르투나투스는 자신의 상급자이며 히스파니아 관구의 수부(首府)인 틴지타나(Tingitana)의 책임자24인 아우렐리우스 아그리콜라누스(Aurelius Agricolanus)의 고등법정으로 마르겔루스를 이송했다. 그는 고등법정에서 자신이 “무기를 내던졌음”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유는 “주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걱정거리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합당치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백인대장의 서약을 공공연히 거부하고 모욕했으며 그가 몇몇 정신나간 언사를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아 선고 직후 처형되었다. (156.1)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주목되는 사실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마르켈루스의 순교는 공식적인 박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의 적극적인 군복무 포기의 결의로 발생했다. 둘째, 이 이야기에서는 로마 군대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세상일을 위해 싸울 수 없어서 “무기를 포기한다”고 군복무 포기의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다. 셋째, 군인의 서약과 그리스도인의 서약(Sacramentum)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넷째, 마르켈루스는 결국 처형되었으나 그 앞서 그에게 고등재판에서 재심의 되는 기회까지 허용되었다.25 (156.2)
 2. 대박해 기간의 그리스도인 병사 순교자
 그리스도인들과 마니교도(Manicheans)들을 대상으로 하여 제국 전역에 시행된 대박해가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대한 박해로 시작되었다는 암시는 301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간점(Liver reading) 사건”에 대한 락탄티우스의 설명26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이교의 종교 행사에 참석해서 이마에 십자가 성호를 긋기 때문에 이교 신령들이 그 자리를 두려워 피함으로서 점복관이 간점을 칠 수 없다는 불평이 늘어갔다. 이로 말미암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교 의식에 참가한 모든 병사들에게 빠짐없이 분향하도록 명하고,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태형에 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즉각 모든 군단 사령관들에게도 서한을 발송하여 분향하지 않는 병사들을 모두 군에서 추방하라고 명했다. 불명예 제대 군인은 연금과 영내 은행의 적립금과 군복무를 마친 자로서의 사회적 지위 등을 모두 상실해야만 했다.27 (157.1)
 유세비우스는 박해의 발단이 황제가 아니라 어떤 “근위대 사령관”(스트라토페다르케스, στρατοπεδαρχης)이라 했는데28 이러한 표현은 그가 군대의 세부 사정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로마 황제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부담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29 (157.2)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대박해로 확대되었다. 303년 2월 23일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제 3칙령과 함께 대박해는 시작되었다. 교회는 허물어지고 성경은 소각되었다. 아래에서는 병사순교열전 중에서 그리스도교인을 색출하지 말라고 했던 2세기 전 트라야누스 황제의 충고까지도 완전히 묵살된 이 대박해 기간의 것으로 확실히 추정되는 병사 순교자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157.3)
 a. 다시우스(Dasius)30
 303년 11월 하순 현대의 불가리아 지역에 해당하는 하부 모에시아(Moesia Inferior)의 두로스토룸(Durostorum)에 주둔해 있던 장병들이 사투르날리아 축제(Saturnalia Festival)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제 11 글라우디아 군단(Legio XI Claudia) 소속의 장병들로서 총독(Legatus) 바쑤스(Bassus)의 휘하에 있었다.31 (158.1)
 다시우스의 순교 행전에 의하면 해마다 이 때가 되면 병사들이 30일에 걸쳐 방탕하기로 소문난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즐겼다. 이 축제의 핵심은 사투르날리아의 왕(King of Saturanlia)으로 뽑힌 동료에게 왕의 복장을 입혀 30일간 술과 여자와 노래 등 온갖 환락을 누리게 한 다음 30일이 끝나는 날에는 농업의 신인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에게 바치는 제물로 죽게 하는 것이었다. (1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