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거룩함의 통합적인 연관성은 하나님과 그분의 인간 피조물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뒤따라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비록 죄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그러졌을지라도 창조자와 피조물의 강력한 결합은 영원히 남아 있으며, 인간에게 미친 충격적 영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심은 보장되어 있다. 이 진리는 매우 근본적인 것이어서 사도 바울이 아덴의 이방인들에게 했던 연설에 이것을 포함시키고 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5-28). (879.1)
 창조라는 사실은 창조자를 의존하고 그분 앞에 책임을 지닌 위치에 인간을 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애로운 분이시므로 그분의 계획은 언제나 당신의 피조물의 장기적인 복지를 선호한다. 이러한 신앙 진술들은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형성하며, 왜 인간의 삶과 자기 이해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879.2)
 A. 도덕적 요인
 만일 인류가 자신의 기원과 매일의 삶의 유지를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면, 사안은 자동적으로 종교적인 것이 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개념에서 거룩하시고(삼상 2:2; 시 99:9; 사 6:3; 계 15:4),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그들의 인격과 삶에서 자신들의 창조자의 거룩함을 반영하도록 고안되었다(계 9:2; 11:44; 20:7; 21:8).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본래의 창조물은 하나님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선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함은 모든 존재의 요소들, 즉 영적,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특질 및 존재의 기타 모든 특질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매우 좋았”다(창 1:31). 그러한 조화는 성경 전반에서 발견되는 인간에 대한 전인적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879.3)
 “거룩한”(형용사)과 “거룩함”(명사)에 해당하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구별함’이라는 공통적인 개념을 지니는 몇 가지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동의어에서 파생했다. 거룩함은 신성한 것 혹은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따로 떼어 놓은 것(히브리어 카도쉬, 코데쉬), 불결한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혹은 종교적 용례로 헌신을 의미한다(출 19:6; 30:31, 32). 신약에서 헬라어 단어 하기오스는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기록했다 이 주제는 신약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벧전 1:15, 16; 롬 12:1; 골 3:17; 엡 1:4; 5:27; 골 1:22; 3:12). (880.1)
 십계명은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류 없는 지침을 인류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것을 존중한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십계명은 기본적인 도덕법을 구성한다(참조 율법). (880.2)
 1. 레위기 법
 이 부분에서는, 일상의 많은 요소를 통제하기 위해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것, 주로 모세의 법령(Mosaic code)이라고 불리는 추가적 법령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려 한다 신명기(22-26장)에도 유사한 본문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 명칭은 레위기(19-27장)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난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율법들이 예배와 제의적 요소들을 주관하는 법들과 연관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대부분 정신적 및 신체적 건강에 영향을 주는 그런 법들의 가치를 간과한다. 비록 고대 이스라엘의 상황에 맞춰 있기는 하지만, 이 율법들은 죄로 인해 발생한 한계 안에서 원래의 연합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것들은 식단에서부터 인간 상호 관계, 위생, 성적인 행습, 예배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 경험의 광범위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었다. (880.3)
 사람들이 이 율법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순종의 유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호소는 차선이다. 그 대신에 그 이유는 도덕적인 것으로서,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야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였다(레 19:2). 다시 말하면, 레위기 법은 하나님과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으로 세워졌다. 이 율법들이 건강을 위해 주어졌는지, 의식(儀式)을 위해 주어졌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의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율법들에 많은 유익이 들어 있었다. 그 율법에 나타난 성(性)과 결혼에 대한 조항을 잘 준수한다면 성병의 확산을 현저하게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공중 보건은 정결한 음식, 물, 공기, 의복, 거주지, 하수 처리, 시신 매장 전염병자들의 격리 관리 등으로써 증진될 것이었다. 이 법은 규례를 집행할 수 있는 일단의 조직된 제사장들을 필요로 한다 언약의 약속은 애굽에 창궐했던 “모든 질병 중 하나도” 이스라엘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라 했으며(출 15:26), 그 약속은 규례들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약속이다. 하지만 약속된 면역성은 조건적이었다(신 28:56-61). 현대 과학의 지식에 비추어 볼 때, 레위 법의 적용은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나라들보다 이스라엘에게 훨씬 더 많은 유익을 안겨 주었으며, 그 유익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수준이었다. 이 율법 속에 내포된 거룩함의 사상은 신체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의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사람의 몸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880.4)
 2. 몸 성전
 하나님의 거소(居所)로서의 몸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사도는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라는 구약의 가르침을 차용한다 그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 구절의 제사 용어는 바울이 몸과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약속,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이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자주 반복되는 주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 중에 거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출 25:8; 민 35:34; 왕상 6:13; 욜 3:17; 슥 2:10, 11). (881.1)
 전(全) 존재를 살아 있는 제물로 구별하여 오직 하나님께 헌신해야 했다. 바울에게 신자란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 20)고 기록한다. 앞선 구절에서 그는 아마도 집단적 의미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 17)고 기록했을 것이다. 바울의 강조된 용어는 그가 이것을 중요한 진리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881.2)
 이 세 본문에서 몸은 네 번 명시적으로 언급된다. 그는 부분적으로 성적인 순결을 호소하지만, 두 가지 핵심 주제가 뚜렷이 나타난다.

   (1) 창조와 구속을 통해 몸은 하나님께 속하며 중요하다.

   (2) 성령이 거하실 곳으로 몸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은 도덕성과 강한 연계성을 지니며,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간과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881.3)
 인류가 창조와 구속을 통해 하나님께 속하며 그들에게 청지기로서 자신들을 잘 관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관한 체계적인 헌장이 제시 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 가장 근접한 것들은 레위기 법의 건강에 관한 부분으로, 사회적인 배경 속에서 쓰인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선택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목표는 주셨지만,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은 더 넓은 본래의 배경에서 몸과 정신이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최적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창조자와 그분의 피조물 사이의 협력적인 사역이다(참조 IV. A.). (881.4)
 이 일반적 고찰에서 특별히 예외적으로 음식 문제를 다루었다. 이 사실은 성경의 상당 부분에서 건강의 주요 요인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음식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타당함을 보여 준다. (881.5)
 B. 성경의 음식
 사람들의 음식에 관한 하나님의 관심은 창세기 첫째 장에서부터 시작되며,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원래의 음식에 대해 규정하셨다. 이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놀랄 만큼 자주 재언급되고 있으며,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시켜 적용되고 있다. 원래의 음식은 채식이었음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모든채소와씨가진 열매 맺는모든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에덴에는 생명나무를 포함한 많은 나무가 있었으며, 첫 부부는 그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그루의 나무 실과만 예외였음이 분명하게 언급되었다(창 2:9). 그것에 대하여 그분께서는 “너희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부분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이 첫 번째 죄를 낳았다 우리는 음식이 도덕적 문제와 관련성이 있다는 데 주목하게 된다. (881.6)
 죄가 들어온 뒤로 원래의 식단에는 과일과 견과뿐 아니라 채소(밭에서 경작하는)까지 포함되었지만, 여전히 채식이었다. 현대의 과학적 연구는 균형진 채식 식이 요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적절하고 특별한 건강의 유익에 대하여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다. 홍수 이후에 땅의 음식 생산능력이 감소되므로 육식이 음식으로 주어졌으며, 피와 함께 살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고(행 9:3, 4), 후에 지방도 금하였다(레 3:17). 홍수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셨다(창 7:2; 8:20). 족장들의 이야기에도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인류는 그들의 식단에 육식의 사용을 채택했으며, 특별히 그런 괸습은 건조한 기후에 있는 유목민의 삶에 적합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기록된 다니엘서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2세(BC 605-562년)의 왕궁에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도착했을 때에 있었던 음식과 관련된 사건이 언급 되어 있다. 왕의 자극적인 음식들과 대조되는 단순한 채식을 그들이 선택한 것이 지성의 명석함을 증가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 문제는 이방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향한 다니엘의 헌신을 시험하는 역할을 하였다(단 1:8-16). 고대 시대에 일반 백성들이 제한된 식재료들만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에덴의 채식 식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시 성경상의 이슈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인 식단으로 남아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갈수록 더 지지받고 있다. (882.1)
 주석자들은 음식에 관한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누가에 대해 주목해 왔다. 거의 모든 장에 음식이 등장한다. 음식은 결혼식과 잔치 같은 즐거운 행사와 관련되어 있고(눅 5:33-35; 6:21-25; 15:3-32), 다가 올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상에서 있을 잔치에 대한 그의 예시에도 등장한다(눅 13:29, 30; 22:28-30). 음식과 소유를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의무가 된다(눅 3:11; 14:7-24).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은 음식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도덕성과 연관시킨다 신자들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려는 집착을 피해야 하며, 이런 것이 노아와 롯의 시대에 심판을 받게 된 죄들이었다(눅 17:20-37). (882.2)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해 주는 구체적인 특징이 홍수 이야기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창 7-9장), 레위기 11장신명기 14장에는 자세하게 기록된다. 정결한 짐승은 되새김질하며 쪽발이 갈라진 짐승이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지시한다 다른 것들은 부정했다. 정결한 해양 동물은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레 11:2-23). 일반적으로, 사냥을 하거나 죽은 동물을 먹는 새들은 부정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구분은 건강을 위한 방안으로 주어졌는가 아니면 제사의 목적으로 주어졌는가? 특별히 신명기의 목록들은 제사와 관련되기보다는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신 14:3-21). 이 구분은 임시적인것이며 신약에서는 폐지되었는가? 동물의 구분은 노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온 인류의 조상이다. 그 구분은 시내산에서 명백하게 정의되었고 성경 전체에서 계속된다 호세아, 이사야 에스겔은 정결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구분을 유지했다(사 66:17; 호 9:3; 겔 22:26; 44:23). 실천하는 유대인으로서 예수와 사도들도 분명하게 그것을 존중했으며, 그들의 대적자들도 그것에 대한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신약에서 그것이 무효화되었는가? 예수께서는 전통적인 의식적 구분들을 무시하신 반면(막 7:15-23), 어떤 신약 본문도 근본적인 구분을 없애지 않았고 십자가에서도 폐지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총회에서(AD 49년경)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체적인 음식법으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개인적인 습관도 부정한 음식을 피하는 것이었다(행 10:14).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한 논의(고전 8장; 롬 14장)는 정결하고 부정한 것을 구분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비록 다른 도덕적 문제들을 권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새 예루살렘에 “부정한 어떤 것도 들어가지 못할”것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익숙한 구약의 구분을 차용하고 있다(계 21:27; 사 35:8). (8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