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글들은 기적적인 치유뿐 아니라(고전 12:8, 28) 자연적인 치유도 인정한다(딤전 5:23). 하지만 그는 육신적인 의미의 건강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건강” 혹은 “건강한”(휘기에스)이라는 의미는 전반적으로 균형진 기능을 의미한다. 그는 언제나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다. (875.2)
 바울은 〈제임스왕역〉에서 “temperance(절제)”로 번역된 용어, 최근에는 더 넓은 의미의 “self-control(자기 조절)”이라고 번역되는 용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다. 이 단어의 의미가 단순한 금주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러 번 사도는 이 주제로 돌아온다(롬 14:21; 엡 5:18; 딤전 3:8; 5:23; 딛 2:3; 간접적으로 고전 6:10). 이 구절들은 바울이 엄격한 금욕을 가르쳤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진 않지만, 이는 몸이 성전이라는 그의 이해와 조화된다(잠 20:1; 롬 12:1, 2). 술 취하는 것을 금하라는 그의 기별은 분명하다(딤전 3:2, 3; 딛 1:7; 2:2-6, 12; 롬 12:3; 고후 5:13). (875.3)
 바울의 사역에서 기적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여기고 구약의 주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결코 자신의 능력으로 여기진 않았다(출 7:3; 신 6:22). 성령이 기적의 직접적인 근원이며(갈 3:5),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복음이옴으로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는데(롬 15:18, 19; 고후 12:12; 살후 2:9), 이 어구는 신체적 치유를 포함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기사와 이적”은 그가 선포하는 기별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죄로 인해 부과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대표하였으며, 곧 그 구원을 얻고자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롬 8:19-23). (875.4)
 헬라 세계의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면서 사도는 성경 전반에 나타난 건강과 치유에 관한 전인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이해에서 다소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헬라에서 건강은 운동선수들의 역량으로 표현되었다(사실상 신체적인 발육으로 정의됨). 이와 대조적으로, 히브리인들은 경기나 대결이나 운동 기량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신체적인 활동들은 대개 생산적인 노동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보상은 일이 잘 되었다는 만족감에서 얻었다. (875.5)
 2. 치유의 은사들
 병 고치는 은사(카리스마타 이아마톤)가 바울이 열거한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나타나는데, 그것은 항상 기적과 분리되어 나타나며 복수형으로 열거된다(고전 12:4-11, 27, 28). 하지만 은사들의 짧은 목록에는 치유의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엡 4:11, 12; 롬 12:6-8). 이런 치유는 하나님의 은사로 취급되며, 인간에게 친숙한 능력은 아니다. 치유의 은사라는 표현이 사도교회의 기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은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치유의 은사는 알로스(“또 다른”, 단수형)라는 단어(고전 12:8-10)와 병 고치는 은사들(복수형, 28, 30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개별적인 신자들을 통해 작용되도록 의도되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구조는 순회 치료사가 교회를 돌아다니며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사도가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 개인이 활용하는 은사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875.6)
 3. 치유되지 않은 세 경우
 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 12:7-9)라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은유적 언급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육체적인 치유가 적절치 않다고 여길 수 있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한다. 이런 결론은 우리를 겸손케 하며, 거기에 어떤 이유가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치유에 실패한 것이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하나님께 거절당했다거나 어떤 부적절한 도덕적 결함이 있다는 최종적인 증거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최상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분의 자비로운 성품을 우리의 가장 큰 유익으로 알고 의지할수 있다. (876.1)
 바울의 문제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교부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해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신체적인 문제였고 아마도 시력의 어려움을 포함한 것이라는 제안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바울이 편지를 대서하게 했으며(롬 16:22) 어떤 서신에는 마지막 인사를 자신의 친필로 기록했다고 언급함으로써 나머지 부분은 다른 사람이 썼음을 시시하는 부분(고전 16:21; 살후 3:17; 갈 6:11)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또한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그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3일 동안 시력을 잃었으나 그 후 치유 받았다고 기록된 것(행 9:18)과 같은 문제인지 다른 문제인지 알 순 없지만 다른 곳에서 지나가는 말로 또 다른 문제를 언급한 점이다(갈 4:14). (876.2)
 그러나 그런 문제가 바울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가 더 중요한 점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띠고 일어난 일이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에게 허용하셨지만, 그것은 바울이 그가 받은 특권으로 자고하지 않도록 바울에게 사탄의 역사를 행하고 괴롭히는 것(콜라피조, 고후 12:7)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바울을 계속하여 한계로 몰아가는 그 문제를 제거해 달라는 그의 간절한 기도는 세번이나 거절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육체적인 염려거리에서 하나님의 더 크신 목적과 그를 붙드시는 능력으로 나아갔다.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9절)고 반응했다. (876.3)
 바울의 경험은 질병이 육체적이고 병리적인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육체적인 질병은 신체에 침입함으로써 넓은 의미에서 치유를 하나님과의 조화로 보는 이해를 밀어내려고 위협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경험 너머에 서 계시며, 죄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 있지만 인간의 고통을 아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섭리”(providence)라는 말이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은 성경의 페이지마다 나타난다. (876.4)
 두 번째는 디모데의 경우이다 디모데는 청년이었지만 위장병으로 고통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병을 다루기 위해 바울은 그의 서신에 유일하게 나오는 의료적인 권면을 주고 있다.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디모데는 물만 마셔왔지만(23절) 이제는 의료적인 치유에 대해 다른 권면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그 의료적 처치는 치유와 함께 중지될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디모데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어려움이 계속되었고, 바울은 그것을 위해 의료적인 적용을 시도했다. 이 경험은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과 병행하여 의료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진리임을 확증한다. (876.5)
 세 번째는 바울의 가까운 조력자인 드로비모의 경우이다.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 기간 중에 드로비모는 병이 들어 병을 회복하기 위해 밀레도에 남겨졌다(딤후 4:20). 이 경우와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 모두 회복을 위한 치유의 은사가 함께하지 않았다. 이 모든 사례는 성경에 묘사된 온전한 의미의 건강이라는 이상적인 상태가 이생에서는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모든 사람들은 죄의 보편적인 결과 아래 살아가는 동안 고통을 받을 것이며, 죽음이 모든 사람의 종국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고통의 이유에 대한 해답뿐 아니라 예수의 재림으로 끝날 복된 소식도 발견한다. 사탄, 죄 그리고 죄의 모든 결과를 이기신 그분의 승리는 갈보리에서 이루어졌으며 빈 무덤으로써 확증되었다. 모든 점에서 온전한 치유는 예수의 오심으로 이뤄질 것이다. (877.1)
 F. 사도교회에 나타난 치유
 예수께서는 그분의 사역이 절반쯤 지나는 시점에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능력(엑수시아)을 부여하셨다(마 10:1).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이 이 은사를 사용할 때, 때로는 효과적이었고 때로는 그렇지 못했지만(마 17:16) 여지는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주신 명령은 세상 끝 날까지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고, 먼저 성령이 오실 것이었다. 갓 태어난 교회는 성령이 임하신 때로부터(행 2:1-4, 43) 놀라운 치유 기적을 보여 주었다. (877.2)
 사도교회의 대부분의 역사는 사도행전에 집중되어 있으며, 저자가 의사였기 때문에 치유 이적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성전 문의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을 시작으로(행 3:1-10), 일곱 번의 경우에 개인을, 일곱 번의 경우에는 무리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사가 기록되었으며, 멜리데에서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가살아난 바울의 경험과 그가 그 섬의 관리를 낫게 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의 끝에 등장한다(행 28:3-6, 8). 다른 이적과 기사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예루살렘과 기타 지역에서 일어났고(행 5:12-16; 8:5-8), 급성과 만성 질병 모두 치유되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치유 기사는 전체 성경 절수의 20분의 1미만이다. (877.3)
 간혹 언급되는 설명을 보면 많은 치유가 일어났지만 기록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행 5:16). 사도행전의 기적들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것보다 더 부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사역과 사도행전의 역사적 기록 모두에서 치유는 일어났고,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계획으로 받아들여지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육체적인 회복도 동반되었지만 사도교회의 핵심적인 전도 방법은 육체적인 치유보다 선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877.4)
 G. 야고보서에 나타난 기도와 치유
 야고보서는 치유가 어떻게 통합되어 초기 그리스도교의 회중이 움직이도록 했는지에 관하여 신약에서 유일한 예증을 보여 주는 책이다. 그것은 야고보서 5:13-16에서 발견되는데, 사실상 이 본문의 중심 주제는 기도이다. 기도는 예수께서 열렬하게 명하신 것으로(눅 18:1), 그분의 삶은 기도로 점철돼 있고 그분의 가르침의 사역에서 기도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마 21:22; 눅 11:9, 10; 22:42). 그러나 성경에서 치유와 기도가 일관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통을 갖기 위해 여러 시간을 할애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강하게 명하셨지만, 그분의 치유와 관련해서는 기도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예수께 치유해 주시라고 탄원한 경우에도 기도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모종의 기도하는 심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877.5)
 하지만 야고보서에서 치유는 기도와 연관되어 나타날 뿐 아니라 사실 기도의 역사로 나타난다 야고보서는 세 부류의 사람과 관련된 기도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는 곤경, 어려움, 괴로움, 낙심 혹은 불행에 처한(카코파쎄오) 자들로, 그들은 계속하여 기도 해야한다(현재 명령형). 그들은 그 환란이 제거될 것이라는 보증은 없지만 필요할 때 환란을 대처할수 있게 될 것이다. 두 번째는 기뻐하는 자들인데, 그들은 믿음과 기뻐하는 태도를 통하여 문제들을 극복한다. 그들에게 야고보는 찬양하라고 권고한다(약 5:13).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병든 자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장로들을 청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기도를 받을 것이며, 의인의 기도가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8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