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그분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단순히 신체적인 치유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문제에 새롭고 특별하게 개입하시는 것, 그분의 구원, 용서, 화목, 구원 등 육체적 치유를 초월하는 요소들에 대한 위대한 소식을 선포하는 데 있다고 보았음이 확실하다. 그분은 일곱 귀신이 돌아와 집을 다시 차지하지 못하도록(눅 11:20-26), 회개 곧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새로운 형태의 삶 속으로 백성들을 부르셨다. 전형적으로 그분의 치유는 용서와 짝을 이루었다 육체적 치유는 창조 때에 부여되었던 것과 같은 본래의 건강의 의미를 재창조함으로써 인간 전 존재의 치유 곧 샬롬을 회복시키는 더 큰 사역의 일부였다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께서(골 1:16-20; 히 1:2; 요 1:3) 죄로 인해 잃어버린바 된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다. 그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던 구원자이셨다(창 3:15). 그분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도구로 봉사했던 선지자보다 훨씬 더 큰 분이셨다. 죄로 망가진 세상에 친히 계시는 동안, 그분은 도덕적 타락을 이기셨다(히 2:17, 18; 4:15). 그분의 치유 봉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였음이 분명하다. (871.5)
 예수의 사역을 주의 깊이 연구해 보면, 이런 평가가 확증된다. 그분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께서 죄 많고 고통 받는 피조물들을 전적인 은혜와 사랑의 행위로 가납하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데 있었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여, 총체적인 구원이 이르러 오고 있었다. 그것은 죄악 세상으로부터의 최종적인 구원을 나타내는 증거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분은 구원하시고, 찾아 구하시고,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의 날을 선포하시고, 영원한 삶을 주시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분이 되고자 오셨다. 그분은 무엇보다 구세주이셨으며, 육체적 치유는 그분의 권위의 증거요 징표였다. (872.1)
 의심할 여지없이, 놀라운 치유 및 귀신으로부터 놓임 받은 일들은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확증하였고, 청중들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분은 복음의 혜택을 전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 곧 어떻게 하면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 그분을 섬김으로 이르러 오는 번영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 그 기반을 두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도전 받으셨다. 기적 자체로써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고, 따라서 예수께서는 떡과 물고기 이적의 이기적인 수혜자들에게 그런 취지로 말씀하셨다(요 6:26). 예수의 치유의 기적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는 당시 갈릴리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디베랴에 예수께서 방문하신 기록이 없다. 그것은 디베랴에 있는 병자가 고침 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나타낸다. 팔레스타인의 기타 수많은 도시도 비슷한 처지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에 그분의 더 큰 사역의 일부분으로서 실용적인 측면도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분의 치유와 구원이 참으로 자비로운 긍휼의 표현임을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그분의 육체적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임했다는 증거이다. (872.2)
 4. 치유와 믿음
 많은 경우 예수의 치유에는 믿음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사실 믿음은 치유 자체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겨진다(마 9:22, 29; 8:13; 15:28). 나사렛의 경우에서처럼 불신은 장애물이었다(막 6:5, 6; 마 13:58). 제자들이 치유할 수 없었던 경우에 예수께서는 그 이유를 그들의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때때로 믿음은 치유를 받는 당사자에게 있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에서도 나타났다. 주로 믿음은 치유를 위한 조건으로 여겨진다(마 9:29; 눅 17:19; 18:42). 특히,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보여 주는 많은 사례를 인용할 수 있다. (872.3)
 이런 사실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합리적이지는 않은 결론, 곧 만일 치유를 위해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실패의 원인이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충분한 믿음이 보인다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거나 적어도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 제시될 것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에 대한 기사를 오해하여 믿음 자체가 치유한다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오는 마술적인 기능을 한다고 여긴다(마 9:22). (872.4)
 그리스도의 치유에 있어서 믿음의 필요성이 중요하지만, 다른 주제 또한 복음서 기사들에 나타나는데, 믿음이 약간 보이거나 혹은 전혀 보이지 않아도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적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수 있는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중풍병자의 경우, 믿음 있는 사람들이 그를 예수께 데리고 왔지만 본문에는 그 사람의 믿음에 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그를 치유하신다(마 9:1-8). 손 마른 사람은 그 자신의 믿음이나 도와 준 사람의 어떤 믿음의 표현이 없었는데도 치유를 받는다. 이 일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마 12:9-13). 18년 동안이나 구부러진 여인도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지만 어떤 믿음의 표현도 기록되지 않았다(눅 13:11-13). 수종병이 든 남자도 어떤 믿음의 표현도 없이 고침을 받았으며, 예수께서는 치유가 안식일에도 적법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사례를사용하셨다(눅 14:4). 대제사장의 종의 경우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검을 사용함으로 그의 오른쪽 귀가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고, 표현된 믿음이 없었지만 치유가 일어났다(눅 22:51). 이런 기사들은 믿음의 중요성을 경감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표현된 믿음이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에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믿기 전에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 대해 평가하셨고(요 4:48; 20:29), 이 본문들은 발전된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 치유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872.5)
 믿음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또 한 가지의 관찰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믿음(히브리어 에무나; 헬라어 피스티스)이란 마음과 생각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주권적 의지를 믿는 신뢰를 낳는다(시 31:23; 고후 5:7; 히 11:8).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어둠 속에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이고 지성적인 헌신이지 맹신이나 감정이 아니다. 믿음은 성경의 가르침과 경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믿음으로 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며(롬 3:28; 5:1; 갈 2:16; 3:8), 하나님의 구속 받은 백성들은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계 14:12). (873.1)
 5. 안식일 치유
 예수께서는 아무런 사유도 설명하지 않고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셨다. 그런 행위들이 온당한 안식일 준수에 해당하는 성경적 규례를 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분의 행동들은 안식일 준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규례들과는 충돌되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셨다고 말하는 일곱 번의 다른 경우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분이 종종 종교지도자들과 대립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고 말한다. 공관복음에서는 누가가 다섯 번을 기록했는데, 베드로 장모의 열병(4:38, 39), 귀신 들린 남자(31-35절)의 치유는 둘 다 같은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경우는 회당의 손 마른 남자(6:6-10), 회당의 꼬부라진 여인(13:10-17), 바리새인의 집에서 수종병에서 고침 받은 남자(14:1-6)에 대한 기사이다. 마태복음은 이 사건 중 두 가지를, 마가복음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873.2)
 요한은 두 번의 안식일 치유 사건을 기록한다 둘다 꽤 긴 기사로, 베데스다에서 치유 받은 중풍병자(요 5:2-18)와 날 때부터 맹인 된 남자의 이야기로, 후자의 경우는 누가의 복음서 9장 전체를 채우고 있다(1-41절). (873.3)
 예수의 안식일 활동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분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한편, 전통적으로 부가된 규칙들은 무시하셨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무시한 행동이 그분의 대적들에게 안식일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분을 고소할 빌미를 주었고, 그분께서는 안식일의 목적을 재정의하여 성경의 이전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그 비난에 응수했다. 그분의 가장 자세한 응수는 요한에 의해 기록된 베데스다의 중풍병자 및 날 때부터 맹인된 남자와 관련된 기사에 나와 있다. 치유 받은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가 의로운 자인지 죄인 인지와 관련하여 그의 신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예수를 비평하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대응은 모든 천연계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끊임없이 일하실 뿐 아니라 안식일에도 일하시는데 그 속에는 치유의 과정도 포함되며, 긍휼을 베푸는 것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전통적인 규범들을 초월한다는 사실에 집중되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급성 질병과 만성 질병의 뚜렷한 구분 없이 모두 치유하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의 해방의 능력은 시간과 상관없이 고통 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예수의 안식일 사역들은 그분께서 두 가지 원칙을 얼마나 균형지게 유지하고자 하셨는지를 보여 주었는데, 그 두 가지는 안식일의 신성성에 대한존중과 고통 받는 자들에 대한 긍휼이다. 예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신 것 중에서 안식일에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문제가 가장 민감한 이슈였다. (873.4)
 안식일은 장애물의 역할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과 갓 창조된 인류 사이에 존재했던 태초의 친밀함을 향한 가교 역할을 해야만 한다 안식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샵바트“쉼”을 의미하며, 넷째 계명에 나타난 안식일의 목적에 대한 광범위한 묘사는 하나님께서 창조 사업에서 쉬신 것처럼 사람들도 그들의 활동에서 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의 치유의 능력은 안식일이 특별한 방식으로 사람의 매일의 걱정거리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하나님께 속한 사물들을 향한 인간의 관심을 회복시켜 주는 데서 비롯된다.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놓임을 받는 경험은 삶에 동반되는 스트레스로부터 회복을 가져다준다. (874.1)
 안식일의 혜택은 보편적이다. 넷째 계명은 안식일의 보편성을 설명해 준다. 즉 안식일의 혜택은 가족을 넘어 피고용인들, 심지어는 가축들, 체류하는 외인에게까지 확대된다(출 20:8-11; 참조 사 56:6-8). 예배와 연구를 위한 안식일 시간은 상호 돌봄과 관심을 나누고 예배자의 관심을 일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을 연합시켜 준다. 안식일은 모든 풀리지 않은 문제들, 즉 신체적, 정서적 및 영적인 모든 문제가 다가올 왕국에서 치유케 될 미래의 시간을 향해 맞추어진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고통받는 인류의 모든 상처는 치유된다.. (874.2)
 6. 회복으로서의 치유
 회복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반에 스며들어 있으며, 소망에 대한 견고한 토대를 제공한다(창 3:15; 롬 6:4, 9-11; 골 1:20, 21; 3:8-10; 고후 5:18-20; 고전 15:51-57; 요일 3:2). 치유와 회복은 종종 동일시되는데, 왜냐하면 질병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분리시키는 것처럼 치유는 관계를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치유 및 치유 관련 용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렘 30:12-17; 33:6; 46:11; 겔 47:12; 말 4:2). 그 관련성은 신약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치유를 가리키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소테리아는 치유나 구원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조되는 것 일 뿐 아니라, 전 인격의 회복과 치유도 포함한다. (874.3)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죄가 들어옴으로 잃어버린 바 된 것이 결국 창조하셨던 분께서 피조물을 회복하시는 분이 되실 때 회복될 것이라는 결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셨고 우리의 죄를 갈보리에서 대신 지셨던 분께서 사탄과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마침내 요한계시록의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 나타나실 것이다(계 20:14; 21:8).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들은 이전에 가졌던 온전한 상태로 회복될 것이지만, 악한 모든 자들은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멸망을 당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예언들은 이 새 땅에 질병과 고통과 죽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사 33:24; 계 21: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분께서 이 모든 악한 세력을 이기신 증거로 알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된다(살전 4:14-17). (874.4)
 E. 바울 편지서에 나타난 치유
 1. 독특한 특징들
 복음서와 비교할 때 바울의 사역에도 치유가 나타나지만 그의 사역은 그것에 덜 주목하고 있다. 그의 편지서들은 현대적 의미의 치유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를 거의 포함하지 않지만, 원칙에 대한 지침들은 제공하고 있다.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바울의 이해도 전인적이다. 즉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고 회복될 수도 있는 복합적 인격체이다(살전 5:23). 이를 바탕으로 사도는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그분께 드려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로 평가한다(롬 12:1).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에덴에서 잃어버린 바 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분 안에서 회복되며, 그 회복은 하나님과 함께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증거가 된다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인 오직 은혜(sola gratia)로써만 이르러 온다(롬 3:28; 갈 2:16). 행함은 결코 회복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 전에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의롭게 되었다(롬 4:9-11). 구속받은 자들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되며(롬 8:1-4), 그들을 통하여 새 언약의 조화로움이 회복된다(히 8:10, 11). (8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