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거룩함, 의, 그리고 사랑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거룩한 하나님이시므로 그는 죄를 간과하지 않고 절대적인 엄숙함 가운데 자신의 알려진 뜻에 대한 모든 범죄를 다루신다(출 34:7).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가장 무게 있는 독특한 계시로 나타난다(롬 3:24, 25; 요일 4:10).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그 무거운 심판을 담당하셨다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10:26, 27 참조). (247.2)
심판은 신화가 아님. 점증하는 수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뜻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허용할 수 없는 이설(異說)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의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해 “만유의 주”가 될 것이라는 어떤 보편 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구절들에 근거해서 그들은 이유를 댄다(롬 11:32, 36; 고전 15:24~28; 엡 1:9, 10; 골 1:19 참조). (247.3)
보편구원론(universalism)으로 알려진 이 견해는 마지막 심판의 정죄에 대해 말하는 어색한 문장들을 하나님께 대한 응답의 실존적 급박감을 강조하기 위한 신화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 자유주의 해석의 결과는 H. 리차드 니버(H. Rechard Niebuhr)의 유명한 말로 생생하게 표현한다. “진노 없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심판 없는 왕국으로 죄없는 사람을 데려가신다.”14(247.4)
보편구원론에 대한 더 충분한 설명은 후에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그런 견해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분명한 성서적 가르침을 진지하게 대하는데 실패하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사랑 모두의 의미를 파괴할 것이란 점을 주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정확하게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근본적인 그리스도인 낙관 주의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진실된 심판의 교리가 포함된 진지한 문제를 주장해야만 한다.15(247.5)
요약하면 마지막 심판의 표준은 알려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각 사람의 신뢰의 반응이다. 이 반응은 “사랑으로 역사하는”(갈 5:6) 살아 있는 믿음에서 나온 “행위” 또는 “열매”의 있고 없음에 따라 측정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위는 산 믿음에서 솟아나는 믿음이기 때문에 행위에 따른 심판의 기준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방법에 모순되지 않고 그것을 확증시켜 준다.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단순한 고백 이상의 믿음의 실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공의롭고 엄숙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에 부합된다. (247.6)
제 4 부 재림심판의 본질
1. 재림심판
시간 계산이 아닌 사건의 준비를 강조함. 성경은 다양한 방법으로 마지막 심판을 언급한다. “심판의 날”(마 11:22, 12:36; 벧후 2:9; 요일 4:17) “심판의 시간”(계 14:7) “진노의 날”(롬 2:5; 계 11:18) “마지막 날”(요 6:39) “큰 날”(유 6) “그날”(마 7:22). 이것들과 또 유사한 묘사들은 마지막 심판의 정확한 시간이나 기간을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고 심판의 단일성과 여러 측면에서의 장엄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248.1)
재림의 경우에서처럼 심판의 경우에서도 성경은 심판의 시간을 계산하기 보다는 사건을 위한 준비를 강조한다. 심판의 “시간”“날”의 언급은 마지막 심판이 60분 혹은 24시간 계속될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표현들은 또한 성경에서 불분명한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은 고통으로 특징지어진 기간이고 “구원의 날”은 하나님의 은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간이다. (248.2)
재림과의 병존. 수많은 성경 구절들은 마지막 심판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그의 영광의 보좌” 앞에 “모든 나라”를 모으는 것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올 때에”(31, 32절)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 그 때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고전 4:5) 것이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심판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있다. (248.3)
에녹이 예언했던 것을 유다가 말한다. “보라, 주께서 그 만군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을 ∙∙∙ 정죄하려 하심이라”(유 14, 15). 이런 구절들은 마지막 심판이 재림과 연관되어 일어날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 당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주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5~8). (248.4)
2. 집행하는 행위인가 조사하는 과정인가?
심판 소송. 인용된 구절들은 심판을 우선적으로 재림시에 그리스도께서 실행하는 집행 행위(executive act)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뭇사람을 심판하”(유 15)러 오시며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며”(롬 2:6) “양과 염소”(마 25:32)를 분리하신다. 그렇지만 마지막 심판을 하늘의 존재들과 사람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지는 사법적 조사 과정(investigative process)으로 나타내는 다른 성경 구절들이 있다. (248.5)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마 19:28) 특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남방 여왕”과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 때에 일어나”(마 12.41, 42) 완고한 자들을 정죄할 것이다. 바울은 구속받은 자들이 천사를 심판할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6:3). (248.6)
계시자 요한은 “책들이 펴 있는 크고 흰 보좌” 앞에서 마지막 심판이 거행되어 모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받는”(계 20:11~13) 것을 보았다. 이와 유사한 심판의 장면이 다니엘 7장에 묘사되었다.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계신 이가 있고 ∙∙∙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9, 10, 22절). (249.1)
심판의 계시(啓示)인가 개시(開始)인가? 인용된 구절들은 재림 자체와 조화되지 않는 수많은 천사들 앞과 구속받은 자들 앞에서 행해진 사법적 소송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어 만약 그들 자신이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재림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249.2)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살아왔던 모든 사람의 행동, 말, 사상을 조사하는 대법정의 회기의 개시가 아닌 이미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와 집행을 표시하는 시간으로 나타낸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롬 2:5). 그런 계시는재림교회가 일반적으로 “조사심판”이라 부르는 사전 조사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 (249.3)
3. 재림심판의 오해
가혹한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전통적으로도 재림은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나타나기에 앞서 대법정을 여시는 가혹한 심판관의 오심으로 나타난다. 이 견해는 마지막 심판의 성서적 가르침을 왜곡할 뿐 아니라 재림의 소망을 약화시킨다. 제이 이 피슨(J. E. Fison)은 “만일 우리가 그 분을 단지 재판관으로만 기다리고 있다면, 사실 기대하는 그 재판관은 더 이상 진정한 예수님이 아니다”16라고 말한다. (249.4)
그리스도께서 이제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의 경우들을 조사하는 대법정을 여시는 심판관으로 오시는 것으로 생각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재림은 구주를 만나고, 영생을 상급으로 받는 소망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 생애의 모든 은밀한 죄를 공개하는 심판관 앞에 서야만 하는 두려움을 말한다. (2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