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3 장 심판과 재림소망
 바울이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있게 할 수 없는 “행함”(갈 2:16; 롬 3:27, 28)과 사람이 마지막 심판에서 인정되는 믿음의 “행함”“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을 구별했다는 것은 종종 무시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6~8). (244.3)
 믿음에 대한 심판.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은 어떤 의미에서는 믿음에 대한 심판일 것이다. 그것은 공언된 믿음이 참으로 진실된 것인지를 나타낼 것이다. 만일 그 믿음이 참되다면 행위는 증거로써 거기에 수반될 것이다. 행위가 거기에 없다면 믿음은 진짜가 아니다. 야고보는 이 진리를 매우 뚜렷하게 설명한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244.4)
 마지막 심판은 우리 자신의 공로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우리에게 이르러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심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영생을 받을 만한 어떤 행위를 하느냐고 묻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은 의의 열매”(빌 1:11)가 무엇이냐고 물으실 것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살아 있는 활동적인 믿음의 증거(롬 5:4; 고후 9:13)를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일은 마지막 심판을 통과할 적당량의 행위를 매일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믿음이 살아 있어 “사랑으로 역사”(working through love)한다는(갈 5:6) 것을 매일 실증하는 것이다. (244.5)
 바울은 극적인 방법으로 그의 믿음에 대한 실재성의 증명을 위한 그의 노력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말한다. 그리고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 3:13, 14)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신자들을 훈계하여 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시나니”(빌 2:12, 13). 자발성과 행위를 지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에서 그리스도 인들에게 그의 개인적 업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그의 믿음의 반응에 대해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이다. (244.6)
 3. 심판의 방법과 기준
 방법과 기준의 혼돈.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행함에 따른 마지막 심판간의 분명한 긴장은 마지막 심판의 기준과 기준에 이르는 방법 사이에 있는 관계의 오해에 의해 자주 기인된다. 구원의 방법으로서 행함과 무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바울의 강조(롬 3:27, 28; 갈 2:16)에 감명을 받은 몇 사람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그리스도인의 행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행함에 대한 믿음이라고 결론내린다. 행위에 따른 심판을 말하는 성서적 진술의 목적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사람들이 구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현재적 칭의와 마지막 심판 모두를 결정하는 데 유일하게 작용하는 원칙이다. (245.1)
 이 견해가 갖는 문제는 구원의 방법, 즉 믿음의 의를 강조하려는 정당한 관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심판의 기준인 의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견해는 믿음에 의한 죄인들의 칭의보다는 오히려 죄됨(sinfulness)의 칭의를 조장한다. 그런 견해는 바울 서신을 독단적이고도 일방적으로 읽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사도의 동등 하고도 중요한 가르침인 심판의 기준을 무시하면서 구원의 방법에 대해 그가 가르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45.2)
 하나님의 선물과 요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모두에서 바울은 구원의 역동성을 설명하면서 처음에는 구원의 방법을 그 다음에는 구원의 기준을 토론한다. 갈라디아서의 전반부 4장까지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서의 전반부 11장까지에서도, 바울은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구원의 방법은 인간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란 것을 설명하고 있다(롬 3:21~28, 10:9, 10; 갈 2:16, 3:10, 11, 4:28~30). 그러나 구원의 선물(방법)을 설명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그분의 뜻과 부합되는 하나님의 요청을 토론하는데 두 편지서의 남은 부분들을 충당하였다. (245.3)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그분의 요구를 간과하는 반면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무시함을 의미한다.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새 생명에 거하도록”(롬 6:4) 인도함으로 우리 삶에서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기준인 하나님의 뜻에 새롭게 일치되도록 끝까지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245.4)
 뗄 수 없는 연관성.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과 그의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과 그의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인식했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 믿음의 진실함을 보일 순종의 반응을 요구한다. (245.5)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우리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도록”(딛 2:12, 13) 가르친다. “육신을 쫓지 않고 그 영을 쫓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는”(롬 8:4)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죄의 형벌과 권세로부터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롬 8:1~3). (245.6)
 믿음의 증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확실하게 의의 높은 표준에 이르도록 요구하신다(고전 7:19 참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의 목적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핑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형상으로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롬 12:2 참조). (246.1)
 우리의 죄된 본성의 변화의 증거는 우리의 행위들 또는 바울이 “성령의 열매”(갈 5:22)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에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인지를”(롬 2:6) 설명한다. “행함” 또는 “열매”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증거를 구성하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에서 결정적이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했다. “문제는 선한 행위가 결정적인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이 그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함에 이를 수 있는가에 있다.”12 (246.2)
 결론은 믿음에 의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행위가 살아 있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의 기준에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행함의 제시는 진실한 믿음이 존재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산 믿음은 항상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행함에 따른 심판은 지금이나 그 때나 구원하는 믿음은 가상적인 믿음이 아니고 실제적인 믿음임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246.3)
 4. 마지막 심판은 공의롭고 엄숙하다
 공의로운 심판. 행위에 근거한 심판은 그것이 허구가 아닌 사실에 기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게 공의로울 것이다. 인간의 심판은 자주 외모나 사실의 부분적인 지식에 의존한다. 그들은 행위들을 고려할 수 있으나 그것들을 고무시켰던 동기들을 고려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살아왔던 각 사람의 명백한 행위뿐만 아니라 감춰진 동기들의 풍부한 지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 진리에 기초했다는 것을 안다”(롬 2:2 N.I.V 역자 번역).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고전 4:5; 롬 2:16). (246.4)
 하나님의 공의를 엄격한 율법주의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자비와 항상 섞여 있다. 하나님은 한때는 공의로, 다른때는 자비로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 안에서 자비와 공의는 함께 섞여 자비로운 공의의 한 지속적인 태도를 형성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목적을 위해 다른 태도와 역할을 생각하지 않으신다. 이와 반대로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구속하기를 구하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야고보는 말한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246.5)
 심판의 엄숙함. 행위에 따른 심판을 또한 마지막 심판이 엄숙하고 영원한 결과를 수반할 것임을 의미한다. 사람이 행해왔던 선과 악은 그것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였는지 거절했는지를 반영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원한 구원 혹은 정죄를 결정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246.6)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 29). (246.7)
 마지막 심판의 엄숙함은 때때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표현되었다. 사실, 심판의 날은 때때로 “진노의 날”(롬 2:5), “진노의 큰 날”(계 6:17, 11:18 참조). 계시록 14장에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진 땅에서의 포도 수확과 비교되었다(19절). 하나님의 진노는 갑작스런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한”(롬 1:18) 자신의 강력한 불쾌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2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