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3 장 심판과 재림소망
 책임의 등급.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큰 뜻의 계시를 받았으므로 이와 상응하여 마지막 심판에서 그들의 책임도 더 크게 될 것이다. 받은 빛에 근거한 책임 중급의 원칙을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곳에서 가르치신다. 마태복음 11장 21, 2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게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 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눅 12:47, 48 참조). 두로와 시돈의 거민들은 그들의 삶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기회가 더 적었기 때문에 벳새다 사람들보다 마지막 심판 때에 훨씬 관대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241.3)
 형벌의 등급. 책임에 대한 등급의 원칙은 잃어버린 자들의 형벌의 등급을 함축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신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에서 가르치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 48). 마지막 심판에서 각 개인은 같은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받은 빛의 반응에 따라 측정될 것이다. (241.4)
 더 적은 특권을 받은 자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고귀한 계시와 구원의 도구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없이 살아왔고 오늘날도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신실하게 응답하였기 때문에 구원될 수도 있다. 어떤 특별한 종교를 통해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드러냈는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설 명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리라”(롬 2:14~16). (241.5)
 모든 사람이 마지막 심판에서 “핑계치 못할”(롬 1:20) 책임을 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양심에 기본적인 도덕 원칙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인간 대리자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결코 배우지 못하고 구속된 “이방인들” 가운데는 환희에 찬 놀라움이 있을 것이다. (241.6)
 엘렌 G. 화잇은 기록한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오히려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저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9 (241.7)
 더 많은 특권을 받은 자들. 구약에 신약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특권을 누렸던 사 람들은 이 계시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따라 심판되어진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죽음의 형벌보다는 생명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셨던 원칙들에 따라 살도록 반복해서 경고하였다(신 10:12; 사 1:12~20; 암 5:4~25 참조). (242.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구약의 신자들에게 주어진 계시가 구원을 위해 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부활시켜 그의 부유한 형제들을 경고하도록 그를 보내라고 요청했을 때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 하리라”(눅 16:31). (242.2)
 그리스도에 대한 응답. 마지막 심판에서 신약시대 신자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원의 준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었다. 예수께서는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고 말씀하신다. 그것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의 같은 말씀이 그것들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가져올 것이다(요 3: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3:36 참조). (242.3)
 “심판(krisis)에 이르지 않는다”는 진술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고후 5:10; 롬 14:10 참조)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경우가 마지막 심판에 고려되지 않는다고 의미할 수 없다. “심판”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영원한 “생명”과 반대 의미이기 때문에 그 문장의 의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지속적인 “듣고 있음”“믿고 있음”(헬라어 에서 현재 시제임) 때문에 마지막 심판에서 정죄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임이 틀림없다. (242.4)
 여기서 사용된 심판의 헬라어 명사(krisis)는 종종 정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요 3:19, 5:29; 살후 2:12). 바울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말할 때 이 연관된 말은 같은 견해를 표현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와 그들의 삶 속에서 “율법에 대한 요구”(롬 8:4)를 충족시킨 은혜를 받았으므로 그들은 현재의 생애나 미래의 심판에서 정죄함 없이 서게 된다. (242.5)
 2. 믿음이냐 행함이냐?
 행함에 따른 심판. 앞선 토론은 한 중요한 의문을 일으킨다. 만일 마지막 심판에서 칭의나 정죄함이 하나님의 알려진 뜻에 따른 각 사람의 순종이나 불순종으로 제각기 결정되어진다면 믿음보다는 오히려 행함이 마지막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인가? 그런 견해는 행함과는 별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분명히 모순되고 있다(갈 2:16, 21; 롬 3:27 참조). 어떻게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행함과 상관없이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면서, 다음의 마지막 심판 때에는 같은 사람을 그들이 행한 행함에 의해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가? 이 문제의 분명한 모순을 해결하려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은 마지막 심판이 행함에 따라 있을 것임을 참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42.6)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 이 가르침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면면히 이어진다. 시편 62장 12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행함에 따라” 각 사람을 보응한다는 원칙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표현한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는 마음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한다”고 말씀하신다. (243.1)
 같은 원칙이 신약에서도 가르쳐졌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라고 기록한다. 베드로는 독자들에 하나님은 “각 사람을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벧전 1:17)라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계시록은 다음의 약속으로 끝난다. “보라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네게 있어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으리라”(계 22:12, 20:12 참조). (243.2)
 이 행함에 따른 심판의 원칙은 마태복음 25장에 명백하게 예증되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오른편의 사람들에게 그 왕국으로 들어가도록 제안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36). 이와 똑같은 자비의 행위를 거절하는 것이 “영벌에 들어갈”(46절)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이유로서 제시되었다. (243.3)
 행함과 믿음의 관계.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이 행위와 무관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영생의 선물을 주셨다면 우리를 행위에 따라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 이 분명히 모순되는 두 가르침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어 왔다.10 (243.4)
 우리의 견해로는 성서적 사상을 종합적으로 잘 반영하는 것은 믿음의 역동적 견해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자들의 구원은 시작(칭의)부터 끝(심판)까지 각기 고립된 믿음이나 행위가 아닌 이 둘의 조화, 즉 역사하는 믿음(working faith)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243.5)
 믿음과 행함은 구원의 경험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나는 능동적인 반응인 것이다. 죤 칼빈(John Calvin)이 지적한 것처럼 “의롭다 하는 것은 믿음뿐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믿음은 홀로가 아니다.”11 개혁주의 저자들은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눈의 비유를 사용하곤 했다. 단지 눈만이 볼 수 있다. 볼 수 있는 다른 어떤 인간의 조직도 없다. 그러나 몸에서 찢겨 나간 눈 그 자체만으론 보지 못한다. 유사하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구원하지 못한다. (243.6)
 야고보와 바울. 이 점에 있어서 다른 강조점들이 몇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르침들 사이에 모순을 느끼도록 하였을지라도 바울과 야고보는 충분한 일치를 이루고 있다. 야고보는 바울이 명한 능동적인 믿음과는 다른 수동적인 믿음을 정죄한다. 유사하게, 바울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 즉, “율법의 행위”를 정죄했다. 이 행함은 야고보가 명한 믿음에서 일어나는 행함과 다른 것이다. (244.1)
 야고보는 2장 14절부터 26절에서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그의 행함이 믿음의 실제 증거였던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약 2:21~24) 설명함으로써 믿음의 표현인 행함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능동적인 역동적 믿음에서 나온 행함, 혹 열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데”(갈 5:21) 절대 필요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 야고보와 전적으로 동의한다. (2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