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3 장 심판과 재림소망
 로마의 시스틴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 심판의 역사적이고도 일반적인 견해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오른 팔을 똑바로 드신 채 원한에 사무친 심판자의 모습으로 다가오며, 지옥의 망령들에게는 번개처럼 형벌을 내리시면서 천국의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축복을 받도록 솟구쳐 오르게 한다. 구원받는 자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간다. (236.1)
 그런 두려운 마지막 심판의 보복적인 묘사는 재림의 기쁨과 찬양뿐만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역동성까지도 무시한다. 마지막 심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흑암과 복수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승리와 기쁨도 가져온다. 그리스도는 단지 불신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려 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영생의 선물을 상급으로 주시는 승리의 재판관이시다. (236.2)
 본 장의 목적. 다음 두 장은 마지막 심판과 그것이 갖는 재림과의 관계에 대한 성서적인 가르침을 정의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마지막 심판의 역동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재림의 소망을 고양시키고 이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강하게 한다. (236.3)
 성경이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많이 말하였기 때문에 이것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간단하게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장에서는 간결함과 명료함을 위해 마지막 심판의 다음의 네 중요한 국면들을 조사할 것이다.

 1.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

 2. 마지막 심판의 범위

 3. 마지막 심판의 기준

 4. 재림 심판의 성격 (236.4)
 제 1 부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
 1.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에 대한 부정
 현재의 경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마지막 심판의 기계적 성격에 고통받아 왔다. 널리 알려진 신학자들, 곧 칼 바르트(Karl Barth),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C. H. 도드(C. H. Dodd),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등은 거의 마지막 심판은 언급하지 않고 대신 현재의 심판 사상을 강조했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을 극적이고 절정의 우주적 사건이 아닌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 혹은 정죄로 귀착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가 안받아들이는가에 따른 현재의 결정으로 나타낸다.1 (236.5)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대한 그들의 응답으로 그들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10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현재 생활에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어떤 심판도 마지막은 아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그것은 회개한 사람을 부르기 위해 계획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은 최종적이고 저항할 수 없다. 그 이상의 상급 법원에 항소가 불가능하다. (236.6)
 성경은 강조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행 17:31; 롬 14:10; 고후 5:10 참조)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과거의 죄에 대한 속죄적 죽음뿐만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딤후 4:1)는 그의 미래의 재림에 뿌리를 박고 있다. 마지막 심판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자들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종국적이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알게 하는 그리스도의 소망의 근원에서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 한다. 바울은 그것에 대해 “모든 사람들 가운데 ∙∙∙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라고 하였다. (237.1)
 임종시에 인간 운명이 결정됨. 몇몇 사람들이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을 거절하는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각 개인의 운명은 그들의 임종시에 이미 결정되어 진다고 믿는 것이다. T. 프란시스 글라손(T. Francis Glasson)이 강력하게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죽은 후의 운명을 알고 있다면 인류 전체를 단번에 심판하는 마지막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모든 것이 이미 정해 졌으므로 어떤 공포나 불확실함도 결코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2 (237.2)
 이 합리적인 논리가 널리 퍼져 있을지라도 불행하게도 성경과는 별개인 플라톤의 사상에 의거한 이원론적인 인간본질의 이해에 의존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서도 첫번째로 영혼을 위해 임종시에 두번째로 육체와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시 있을 보상과 형벌의 두 국면을 가르치지 않는다. 생명의 부활이나 정죄의 부활(요 5:29)은 단지 한 부분이 아닌 전인적으로 경험되어질 것이다. (237.3)
 조사심판의 불필요성. 다른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최종적 운명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을 거절한다. 혹자는 이 견해를 재림교회의 탓으로 잘못 돌린다. 안토니 A. 훼케마(Anthony A. Hoekema)는 이렇게 썼다. “예를 들면 재림교회는 각 개인의 임종시에 그가 구원받 았는지 잃어버림을 당했는지를 결정하는 조사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3 (237.4)
 이 진술은 재림 교도들의 가르침에 관한 명백한 오해이며 왜곡인데, 그것은 과거의 재림교도들의 문학 작품 가운데서 있었던 경솔한 진술에 의해 제의되었을 것이다. 재림교회에 있어서 조사심판 혹 재림전 심판의 목적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각 개인이 어떤 운명을 받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공정성을 하늘의 지적 존재들에게 나타내는데 있다. (237.5)
 재림교회 기본 신조 23조는 분명히 말한다. “조사심판은 하늘의 지적 존재들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잠들었고 그러므로 누가 그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 이 심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한다.”4 (237.6)
 2.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
 자명한 진리. 성경은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을 주장하지 않고 그것의 실제성을 공리적이며, 자명한 진리로 단순히 인정한다. 내세에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점진적인 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해 나타나는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이다. 마지막 심판의 실재는 죽음처럼 피할 수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히 19:27)리라. (237.7)
 바울은 수사적인 투로 질문한다. “ ∙∙∙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3). 그 대답은 결코 의심스럽지 않다. 마지막 심판은 너무 자명하고도 근본적인 실체이므로 동료 신자들의 행동에 대한 어떤 현재적 심판도 부적절하게 하고(롬 14:10 참조) 믿는 자들에 대한 “인간 법정”의 심판을 상대적 가치 정도로 생각하게 한다(고전 4:3, 4 참조). (238.1)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의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이다(고후 5:21; 요일 4:10 참조).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그러한 무거운 심판을 지셨다면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마지막 심판을] 어찌 피하리요”(히 2:3). (238.2)
 하나님의 구속하는 사랑의 선물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마지막 심판의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대한 믿을 수 없을만큼 엄청난 계시이다. 만약 그분이 도덕적인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흉악한 죄가 되는 사랑을 거절하는 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죄에 반대하여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롬 2:5)날 것이다. (238.3)
 하나님의 도덕적 본질의 요구. 마지막 심판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도덕적 본질과 그의 창조의 도덕적 질서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폐지하는 것은 그의 도덕적 본질과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폐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도덕적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이 시라면 그는 최후의 결정적 방법으로 모든 이성을 가진 피조물들의 도덕적인 행동을 심판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그들의 계시와 옹호를 위한 외형적인 마지막 심판을 필요로 한다. 명확하고 영원한 방법으로 악을 처리함으로 선악간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것은 오직 마지막 심판뿐이다. (2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