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전반에 걸쳐 현재의 실존은 에덴 동산의 이상적인 실존에서 멀어져 버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실존이 앞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이 구약 속에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그것은 언제나 미래이다. 그와 같은 미래의 하나님의 왕국의 회복 사건 가운데는 영생(단 12:2), 최후의 심판(단 7:9-14), 죽은 자의 부활(사 26:19; 단 12:2),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렘 31:33),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지식과 이해(렘 31:34), 그리고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으시는 일(욜 2:28, 29)이 있을 것이다. 구약을 마치면서 회복의 희망은 유대주의의 묵시문학 속에서 기독교 시대와 첫 세기를 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157.4)
 그러나 신약에 와서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에 실현된 것이라는 확신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과 후기 유대인의 기대 속에 미래에 구현된 것이라 여겨졌던 것들이 그리스도의 인격(person) 속에 현재적 실체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심판, 부활, 하나님과의 교제와 지식, 그리고 성령을 경험하는 일이 그리스도인 신앙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재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현재적 종말론은 미래를 부정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더 큰 것에 대해 보증금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참고 엡 1:14). (158.1)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현재와 미래의 왕국은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고 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세워질 미래의 왕국에 기본적인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의 현재적 실체에 대해 거의 독점적인 강조를 두고 있는 곳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요한복음 5:24, 25에서 표현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 같은 현재적 종말론을 드러내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제4 복음서에서 영생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현재 실현된 것이다(1:4, 5; 5:24, 25). 또한 예수의 인격과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실현되는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이다(3:18-21; 5:24, 25).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에서 강력하게 예증된 것처럼(11:1-44), 부활 또한 예수의 말씀 속에서 현재에 실현된다(5:24, 25).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뿐만 아니라(14:21-23), 로고스(말씀)가 내려오실 때(1:1-5, 14), 마침내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제공하실 것이다(1:18; 14:9). 그리고 예수께서 들려지실 때, 성령의 충만하심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부어질 것이다(7:39). (158.2)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종말 시간에 대한 기대의 표현은 반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르러오는 하나님의 왕국의 실현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레이먼드 브라운(Raymond Brown, 1:cxvii)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 영광 가운데 임하실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구약의 구절을 가리킨다면, 서언(1:14)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답한다. 누군가 하나님의 최후의 개입을 뜻하는 심판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요한복음 3:19‘그 정죄(심판)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라고 대답한다.” 유대교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 실체가 되었다. (158.3)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요한이 미래의 종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요한복음 5:28, 29에서 그는 직설적으로 미래의 부활과 심판을 말하고 있다. (159.1)
 요한복음 14:1-3에서는 하늘에서 여정을 끝낸 후 자신의 제자들에게 돌아올 미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미래 실체인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으로 “마지막 날에”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6:39, 40, 44, 54; 12:48). (159.2)
 그래서 요한은 신약의 종말론의 현재와 아직(now and not yet) 모두를 함께 쓰는 일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이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현재 실현된 종말론에 기본적인 강조를 두고 있다. (159.3)
 현재의 심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최후의 심판을 포괄적인 종말의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심판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심판은 세 가지 분명한 단계로 이르러온다. 심판은 종말 때(5:27-30; 12:48)뿐만 아니라, 십자가(12:31, 32)와 복음을 전파할 때(3:18-21; 5:24, 25) 일어난다. (159.4)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고 예수께서 선언하셨다(12:31).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들림을 당할 것과 연관시켜 심판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32절). 십자가에서의 심판은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성취할 것인데, “이 세상 임금” 사단이 쫓겨나는 것(31절)과 “모든 사람”을 예수께로 이끄는 것이다(32절). (159.5)
 바울의 가르침은 이 같은 십자가의 심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로마서 8:3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속죄제물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 죄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심으로 죄된 인간에게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32, 33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하신 모든 약속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켰을 때 인간에게 성취되었다고 했다. 이 말씀을 통해 알게된 것을 서로 연결시킴으로 십자가에서 심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매우 분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160.1)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person) 안에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셨다.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셨다. 십자가에서 모든 세상의 죄는 예수의 육체(body) 안에 쌓여졌다(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내려보실 때, 모든 인류가 너무도 가증한 품성 속에 죄가 가득한 채 창조주의 육신 속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셨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인격(person) 속에 인간 죄에 대한 그의 심판을 베푸신다. 이전에 저질러졌거나, 저질러 질 수 있는 모든 죄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person) 속에서 정죄받았다. 인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에 대해 심판과 죽음의 정죄를 받았다(롬 8:3). 십자가에서 사단은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에 대한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요 12:31).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그의 아들의 인격(person) 속에서 처리하셨다. 그런 후 심판은 그의 사역의 첫 부분이 마쳐진 약 서른 여섯 시간 후로 연기되었다. (160.2)
 심판은 주일 중 첫날 아침에 속개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한 번 더 내려다 보셨다. 그는 그곳에서 점도 흠도 없는 어린양 같은 완벽한 인성을 보셨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고후 5:21), 죄로 책잡히실 수 없는 분(요 8:46)이 다시 그의 육신으로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죄 없으신 인성을 내려다보실 때, 그분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생명과 영원의 가치가 있다고 판결을 내리셨다. 그런 후 그 판결을 집행하셔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는 전 인류 위에 축복을 선언하셨던 것이다(행 13:32, 33).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제 예수와 관계를 맺고있는 모든 인류에게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고후 1:20). 죄된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서 정죄받은 반면에 예수의 부활 시에 죄 없는 인성은 구속받아 생명을 부여받았다. (160.3)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심판은 과거에 살았던 모든 인류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요 12:32). 그대와 나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표자의 인격(person) 속에서 심판을 받았다. 우리의 죄는 그의 인격(person) 안에서 정죄를 받았다. 그가 받은 정죄는 또한 우리가 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의는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때 우리에게 보장되었다. 예수께서 그의 모든 사역 속에 의로우시다 선언되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칭의는 또한 우리의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모든 인류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심판에 이르게 되었다. (161.1)
 요한복음에 의하면, 두 번째 국면은 복음 전파 속의 심판이다. 심판의 이 두 번째 국면은 첫 번째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은 십자가의 심판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지를 결정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인류에게 제시 될 때마다 그들은 심판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3:14-21). 빛이 어둠에서 비췰 때 모든 사람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반응할 의무가 있다(19-21절). 생명과 사망의 쟁점은 기로에 있다(5:24, 25). 이 심판은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시행되는 현재적 실체이다(3:18). (161.2)
 “강단”에서의 심판이란 엄숙한 사상이다. 사람들이 예배하러 모이는 매주, 심판은 복음을 설교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회중 가운데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끌려 가든지, 더 멀리 떠나가게 될 것이다. 중간 지점은 없다. 설교자의 책무가 얼마나 중요한가! 청중들은 열성이 없고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듣는 것보다 설교를 듣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심판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러야 그들이 그 심판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멸망당한 죄된 인성과 부활시 일으킴을 받은 죄 없는 인성 중 어느 하나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선택을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면서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다. 그들은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두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영혼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 도덕적인 관점을 고찰하거나, 성의 없이 하는 것보다 차라리 설교를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61.3)
 그러나 요한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일 속의 심판이 끝이 아니었다. 종말에도 심판이 있다(5:27-30; 12:48). 그러나 이 심판은 앞서 있는 두 심판의 국면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이는 두 심판들을 확증하고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종말에 우리는 복음설교에 대한 우리의 반응 속에 우리 자신에 대해 선포한 심판 이상의 또 다른 것으로 심판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12:48). 지금 우리가 거절한 생명의 말씀은 그때 되돌아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5:45). 지금 우리가 받아들인 생명의 말씀은 그때 풍성한 영생으로 우리를 일으킬 것이다(29절).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죄를 구속하고 영생을 얻게 하기에 충분하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지금 그 안에 머무는 자는 마지막 때에도 발견될 것이다. (162.1)
 ■ 말씀을 적용함
 1. 오늘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치유받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심리학과 기도가 정신질환과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오늘날 겨우 소수의 사람만이 연못가의 사람과 같은 극적인 경험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