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치유가 안식일에 일어난 것은(10절),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친숙한 사람에게는 전혀 놀라울 것이 없다. 예수께서 누군가 치유하실 때마다, 치유는 안식일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9:1-7, 14; 마 12:9-14; 막 1:21-28; 3:1-6; 눅 6:6-11; 13:10-17; 14:1-6).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행할 기회를 가질 때마다, 특히 안식일에 도움을 주고자 하셨다. (151.2)
 유대인과 대면한 장면은 질병을 치유 받은 자가 상당히 무지했음을 보여준다(10-15절). 유대인들이 예수를 향하여 호전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치유해준 사람을 발견하자 그들에게 바로 보고했다. 그러나 그런 무지함이 요한복음 전반에 걸쳐 기본적인 틀을 이루고 있다. 혼인 잔치에서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지 못했다.” 성전에서 유대인은 성전을 무너뜨리고 삼 일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의 말씀의 의도를 오해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제 이 사람도 누가 그를 치유해 주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반복해서 전해지는 기별은 그리스도와 분리된 인간지식은 정말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그가 다른 사람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신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즉 그는 그에게 이전에 그의 질병을 야기시킨 죄를 계속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14절). (152.1)
 안식일을 범했다는 유대인들의 불평에 응대하여, 예수께서는 그의 아버지가 행동하시는 것과 꼭 같이 자신도 행동할 뿐이라고 논증하셨다(17절). 하나님처럼 예수께서도 인간의 복리를 위하여 안식일에 일하고 계신다. 당시 유대인 저술가에 따르면 안식일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출생, 사망, 햇빛, 비, 그리고 계속해서 흐르는 강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Barclay, 1:183).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신 것과 같은 특권을 주장하고 계실 뿐이다. 그와 아버지 둘 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이다(Talbert, Reading John, 123, 124). 유대인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 그가 하나님과 동등함을 주장한다고 이해했다(18절). 예수께서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쟁점은 19-47절에서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7:19-24에서 안식일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8:12-3010:25-39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못에서의 사건은 유대인편에서 예수를 향한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적의를 처음으로 표출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와 같은 적의는 논쟁 중에 드러난다. 요한복음 7장에서 그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 요한복음 11장에서 그들은 어떻게 그를 살해할 수 있을지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5:16, 18에 그들이 적의를 가지게 된 두 가지 이유, 예수께서 하신 안식일의 활동 성격과 하나님과 그가 맺은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이 나타나나 있다.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 아닌가(19-30절)! (152.2)
 19절과 30절은 매우 유사하여 마치 편지봉투처럼 어떤 것이 앞이고 어떤 것이 뒷부분인지 구획 짓기가 어렵다. 예수께서는 그가 아버지와 같은 일, 즉 생명을 주는 일(20, 21, 26, 28, 29절)과 심판하는 일(22, 27, 30절)을 행하고 있다고 주장하셨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이 땅 위에서 행함으로 그는 아버지가 어떠하신 분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신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진리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9-23절). 그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무시하면서 아버지를 믿을 수 있다는 선택권을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으신다(23절). 아버지 자신이 그의 아들이 받기에 합당한 영예만을 받으신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아버지께 나아올 수가 없다(14:6-9). (153.1)
 24절에는 믿기 어려운 많은 말씀이 있다. 세상 역사의 최후의 심판이 “마지막 날”에 있을 때(12:47, 48), 24절에 의하면 이미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자들 위에는 이미 심판의 선고(verdict of judgment)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최종 심판의 선고를 깨닫게 되면, 영생의 경험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영생과 심판은 둘 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현재형으로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사실 25절은 이같이 생명에 이른다는 표현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병들고 억압받는 사람들, 삶의 여건이 빈곤한 사람들, 하나님과 산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느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봉사 가운데 이와 같은 개개인들을 그들이 상상할 수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생명의 경험으로 소생시키셨다(10:10). (153.2)
 28절과 30절에서 심판하고 생명을 주는 예수의 권세 행사는 현재형(“곧 이 때라”[“has now come”])에서 미래형(“때가 오나니”[“a time is coming”])으로 바뀌고 있다. 그 날은 육신이 죽어 무덤에 있는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들을 때, 육체를 포함한 완벽한 영생의 경험으로 나오게 될 때 이르러올 것이다. 예수께서 매우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부활시키실 뿐만 아니라 전혀 존재하지 않은 사람도 부활시킬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생명 주고 심판하는 그의 능력은 복음의 전파를 통해 지금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날은 그의 음성이 악한 자나 선한 자 모두를 포함한, 전에 살았던 모든 자들의 무덤을 꿰뚫을 때 이르러 올 것이다(29절). 여기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 예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한다면,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이 복음에 대해 더욱 더 생명의 새로움으로 반응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여는 자는 자기 몸을 무덤에서 일으켜 줄 저 능한 권능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화잇, 시대의 소망, 210). (154.1)
 선악간에 죽은 자의 전세계적인 부활이 있다는 개념은 놀라운 것이다. 요한복음 5:29은 처음으로 이 같은 전세계적인 부활의 희망을 표출한 다니엘 12:2의 묵시적 예언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의 총독 벨릭스 앞에서(행 24:25), 세계적인 부활의 개념이 정통적인 유대교의 일부였음을 확증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앞으로 영생을 경험하기 위해 일으킴을 받을 것임에 반해, 그를 거절한 자들은 하나님의 선고 앞에, 그의 선고가 공의로움을 인정하기 위해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다(빌 2:9-11). (154.2)
 이 말씀 속에는 엄숙한 경고가 들어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생에서 하나님의 호소를 무시해도 결국은 최후의 안식처에 침묵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불신자들이 죽음이 끝이라고 여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죽음 이후에 그 모든 행위에 대한 계산을 한 후, 그 적절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심판이 있다(고후 5:10; 계 11:18; 20:7-15; 22:12를 보라). 죄인들은 “죽음에서 죽음으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Jameison, Fausset and Brown, 1037). (154.3)
 심판의 필연성은 좋은 소식인 동시에 나쁜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주장에 대해 반발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심판은 좋은 소식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삶의 행동에는 의미가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어떤 것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작은 친절, 잊혀진 자비의 행위, 모두가 영원에서는 귀중한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궁극적인 영역 속에서 잊혀진바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준 냉수 한 컵조차 심판에서는 상응하는 보상의 선고를 받을 것이다(마 10:42). 심판의 기별은 “그대가 하나님과 관련 있고, 그대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다면, 그대의 삶은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기별은 세속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임을 보여주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효과적인 것들 중에 하나이다. (155.1)
 그러나 5:19-30에서 예수의 말씀은 능력 있고 장엄하지만, 과거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잘못 전하여 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예수의 증언에 대해 유대인들이 의문을 발한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에 대해 확증되지 않는 증거는 부적절함을 인정하셨다(31절). 유대주의의 기본적인 원리 중에 하나는 진리는 적어도 두 증인의 증언으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신 19:15; 계 11:3-13).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증언에 침례자 요한, 자신의 봉사, 아버지, 그리고 성령을 더하심으로써 유대교 안에서 진리를 세우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증인의 배가 되게 하셨다(31-40절). (155.2)
 어떻게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아버지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이 적법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가(37절)?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증거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요한1서 5:9, 10을 보라). 예수와 대면하게 될 때, 인간은 그의 주장이 참되다는 강한 확신을 가진다. 이 확신을 거부하지만 않는다면(예수를 따르는 일은 신분상의 불이익을 야기하고[요 12:42, 43], 즐기던 죄를 포기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3:18-21]), 그것은 우리를 고백으로 이끌어 간다. 예수께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알고 있는 것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증거라고 5:37에서 말씀하신 것이다(또한 7:17을 보라). (155.3)
 유대인들이 예수의 증인들의 증거를 거부할 때(43, 44절; 또한 8:13, 14를 보라), 그는 유대주의 안에서 최고의 증인인 모세를 불러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하는 자로 섬겼지만(출 32:7-14), 이제 예수의 입에서 모세는 심판자로 변형되었다(45-47절). 모세의 말은 예수를 거절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가 예수에 대하여 기록했고 그를 위한 길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끝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의 글도 믿지 아니 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156.1)
 이와 같은 만남으로 예수와 유대인 사이에 투쟁이 개시되었고, 이 쟁투가 복음서 내내 계속되어 결국 예수님이 체포되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들 유대인들의 적의감 속에 요한은 복음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의 적의를 보고 있는 것이다. (156.2)
 문단의 주요 주제
 대체(對替) 주제
 반복해서 언급했던 것처럼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대체의 주제이다. 이 장도 예외가 아니다. 생명을 주시는 심판자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나팔절의 궁극적인 대체가 이루어짐을 보았다. 절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제4 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56.3)
 연못가에서의 치유는 대체 주제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의 이같이 중요한 시설은 자비와 치료를 제공하는 그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그러나 유대주의의 물이 치료할 수 없었고, 사실 일생을 무가치하게 산 사람을 위해 뭔가 해주기에 무력했던 반면에, 예수께서는 치유하셨다. (157.1)
 베데스다 연못이 그 사람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공된다. 독자들이 이 사람이 중풍병이 걸린 지 38년 된 것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38년 방황한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이 상황의 역설은 절정을 이룬다(출 16:35; 민 14:33-35-광야에서의 보낸 시간은 전체 시간 40년에서 여행의 시작을 위해 시내 산에서 보낸 시간과 애굽에서 가나안의 여행이 마칠 무렵 정복을 위한 준비로 쓰인 시간을 빼야 한다). (157.2)
 요한복음의 종말론
 요한복음은 미래의 세상 종말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미래의 실체로 보는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에서는 현재의 실체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재, 혹은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은 이 복음서의 배경의 빛 속에서만이 명백히 드러나므로 여기서 그 배경에 대한 간단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