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재창조와 제칠일 안식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은바 되었다(요 1:1-3). 따라서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런데 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자기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백성인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요 1: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이 되시어”(롬 3:25)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롬 3:23,24) 의(롬 3:21)를 “다 이루시었다”(요 19:30). 죄와 사망에 팔려간 인간들에게 의와 생명을 찿아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었다(행 2:36).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는 죄인들을 의롭게 하고 죽음으로 정죄된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는 구원의 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은 사람과 세상을 영적으로 다시 살려내는 구속 행위였다.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 행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재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속량되었고 창조주 하나님은 정당화되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의롭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견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의롭게 되었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율법이 우뚝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만족되었다. 성부 하나님이 만족하게 되었고 성자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었다. 사막 같이 메말랐던 이 땅에 성령이 내리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죄가 죄같이 되었고 죄가 무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로 죄악이 멸하였고 죄인이 죄의 사슬에서 풀리어 의롭게 되었고 사단의 간담이 돌 같이 되었다. 마귀가 단죄되었다. 지옥이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 (157.1)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시간 속으로 영원이 들어오는 것이고 밤 속으로 한 낮이 들어오는 것이었고 겨울 안으로 여름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죽음 안으로 생명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지렛대로 지구를 하늘까지 들어 높이고 하늘 나라를 지상까지 내려오게 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하늘 나라가 햇빛 같이 밝히 나타난 일이었다. (158.1)
 하나님의 아들이 이 희망 없는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 그가 와서 세상을 구원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동안 어둠과 공포와 전쟁에 떨어왔던 사람들의 마음과 심령에 안식이 깃들었다. 십자가 구원의 이 기쁜 소식과 더불어 비로소 우리는 죄와 악으로 부폐해진 우리의 공로에 대한 신뢰를 철저하게 청산하게 되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죄와 얽히어 왔던 자신의 옛 삶을 청산하게 되었다. 끈질기게 이어져온 죄와의 인연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 우리에게로 왔다. 우리에게서 안식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안식의 삶은 곧 영생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한 이 안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158.2)
 히브리서 4장 1-9절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사업을 다 이루시고 안식으로 들어가신 첫 안식일 곧 에덴의 안식일에 의하여 이미 상징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쁨과 행복과 안식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하여 그들을 자신의 첫 안식일에 초청하셨다. 이 특별한 날은 인간이 자신의 영성을 나타내는 표징이요 시금석이었다. 안식일은 눈에 보이거나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처음서부터 안식일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창조물들의 우상화를 방지하는 방파제였다. 처음서부터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시고 따라서 그 피조물들과 전혀 다른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하여야만 하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확인하고 온 우주에 증거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참다운 만족과 안식은 오직 자신의 조물주이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교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한 분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날이다. (159.1)
 안식일은 결혼제도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제정된 사회적 제도들 가운데 인간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사회제도인 것처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에 제정된 종교 제도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겨진 유일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이야기는 제칠일 안식일에 도달하여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만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목적에 대한 설명과 안식일에 대한 설명이 겹쳐 있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능력의 반영이고 확증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하늘의 인장을 찍은 것이 곧 안식일이다. 제칠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안식일 위에 덤으로 내린 특별한 지참금 같은 것이다. 안식일을 즐겨 지키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에게 내린 이 복을 항상 덤으로 누리게 되는 것이다. (159.2)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필요는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배려이다. 사람은 7일을 주기로 하여 안식일을 계속적으로 지킴으로써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인 지식을 계속적으로 간직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정서를 계속적으로 함양할 수 있다. 안식일을 최초로 지키기 시작했던 첫 사람 아담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마에 항상 하나님의 인을 지닐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언약에도 함축되어 있다. 이 언약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속을 위해서 창조주의 사역에 의존하게 하고 있다. 즉 언약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의 의지에 하나님의 인이 반영되는 것이다. 성경이 안식일 계명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의 언약이 하나님과 사람 양쪽에 의하여 성실히 준수되어야 하며 안식일의 언약을 성실히 준수하는 사람의 양심에서 하나님의 인이 반영된다는 것이다(출 31:12-17; 16:28, 29; 사 56:4; 겔 20:12, 13, 18-22; 22:8, 26; 렘 17:19-27; 히 4:10). 따라서 안식일이 꾸준히 준수되는 풍토에서는 이교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우상숭배자들이 생겨날 수 없다. 안식일이 참되게 준수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명상하고 하나님의 길과 가르침을 배울 기회들이 계속적으로 충분히 제공된다면 그만큼 이 세상의 가정들이 하늘나라의 가정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전쟁과 범죄 같은 것으로 이 세상이 얼룩지거나 어둡게 될 가능성이 적어지는 것이다. (160.1)
 복음서에 나타난 재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안식일
 우리는 안식일의 주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열띤 토론들을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복음서에서는 대략 여덟 장 건너 한 장씩,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 사람들의 전통에 의해 비참하게 더럽힘을 받아 온 사실들이 언급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네 복음서는 신약 시대 교회의 처음이자 마지막 증언이다. 왜냐하면 네 복음서는 복음 시대의 첫 일들에 대한 보고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보다 늦게 기록된 신약교회 최후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제도와 결혼 제도를 개혁하여 에덴 동산에서 제정되었던 그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려고 무한히 애를 쓰는 모습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안식일 제도와 결혼 제도의 개혁을 위하여 안식일과 사람이 창조되었던 그 “태초”로 돌아갈 것을 사람들에게 촉구하셨다(마 19:4, 8; 막 2:20).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안식일을 사람들에게 “즐거운” 날로, “여호와의 성일”로, 그리고 여호와의 “존귀한” 날로(사 58:13) 회복시키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행동에서 앞으로 안식일의 준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때가 올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성전이 무너지는, 창세 이래의 대환란 중에도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2)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이 승천 이후에도, 그리고 대환란 가운데서도, 안식일은 계속 준수되어야 한다는 당부가 아니겠는가. (161.1)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기록의 끝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업을 새 창조의 일로 소개하였다.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생명의 빛의 세상에 오심으로 서술하였다(요 1:1,3,4).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장의 첫 부분은 창세기 1장의 첫 부분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고 할 때, 창세기 1장의 첫 부분이 창조주의 등장을 말하고 있다면 요한복음 1장의 첫 부분은 재창조주의 등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요한복음의 말미에서는 십자가의 사건을 서술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구속의 과업을 “다 이루신” 사실과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사실을 함께 기술하였다(요 19:28, 30). 우리는 여기서 마치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세기 2장 1절의 선언을 다시 듣는 감회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지으신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다 마치니”라는 창세기 2장 2절의 기술을 다시 읽는 감회를 갖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지으셨던”(요 1:2,3) 예수님은 창조 주간의 제6일의 끝에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창 2:2) 안식일에 “안식하셨듯이”(창 2:3) 재창조에서도 그가 제칠일 안식일에 구속의 안식을 누리시기에 앞서 제6일이 저물어가고 제7일이 이르러오는 시점에 십자가 위에서 그가 구속하시던 “모든 일이 이미 다 이룬 줄 아시고”(요 19:28)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이다(요 19:30). (162.1)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사람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에 의해 시험을 받았듯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시험을 받은 십자가의 나무도 골고다 “동산 안에 있었다”(요 19:41).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첫째 사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선악의 지식으로 골고다 “동산 안에 있는” “나무에 예수님을 매달아 죽인” 것이었다(행 5:30). 그리고 그뿐이 아니다. 요한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 아담이 제6일에 자신의 옆구리에서 자신의 갈빗대를 허물어 자신의 여자 하와도 낳고 제7일에 자기의 신부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으로 초청되었듯이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제6일 곧 안식일의 예비일에 십자가에서 자신의 옆구리로부터 “피와 물을” 쏟으며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낳고(요 19:34) 제7일에는 자기의 교회와 하나가 되는 제칠일의 안식으로 들어가셨다. (163.1)
 이처럼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의 구속의 일을 제6일에 “다 이루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과는 달리 제6일에 운명하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섯째 날이 저물기 전에 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되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안식일 하루 전체를 무덤에서 보내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창세기의 창조 주간이 복음서에서는 수난 주간으로 재현되었던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 번째의 안식일에 안식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여섯째 날에 십자가에서 두 번째 창조인 구속의 과업을 “다 이루시고” 제칠일을 무덤에서 안식하셨던 것이다. 이로써 최초의 안식일에는 새로운 영광이 더해지게 되었다. 창조의 영광에 재창조의 영광이 추가되었다. 창조의 영광에 십자가의 영광과 부활의 영광이 추가되었다. 창조의 영광에 재림의 영광과 새 하늘 새 땅의 영광이 추가되었다. 이제 제7일은 첫 창조의 기념일일 뿐만 아니라 재창조의 기념일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 안식일은 하나님의 세 번째 창조를 기념하는 책임까지 겸하게 될 것이다(사 66:22,23). (163.2)
 예수님을 가장 많이 알고 가장 많이 사랑하였던 제자들과 측근들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계명을 쫓아 안식일에 쉬었다”(눅 23:56).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거룩한 여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여섯째 날이 아직 다 저물기 전에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였다”(눅 23:56). 한 번 생각해 보자. 세상이 창조될 때 그리스도가 지켰고 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지키셨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에 무덤에서 지키셨으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지킨 거룩한 안식일을 우리도 똑같이 기억하여 지킨다고 하여 우리가 정죄를 당한다면 어떻게 이것을 올바른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과 제자들의 모본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안식일을 준수한 기록들이 산재해 있다. 우리들은 사도들이 안식일을 지킨 모본을 따라야 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안식일 준수의 기록(행 13:14, 27,42-44; 16:13; 17:2; 18:4)들이 모두 단순히 전도회의 회중을 확보할 목적으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안식일을 이용한 기록이라고 고집할 만큼 우리는 어리석어야 하는가. (164.1)
 그러나 안식일의 주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증언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는 안식일에 주님이 행하신 일곱 개의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이적들은 모두 긴급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그 이적들은 긴급한 상황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안식일 정신을 그 특징으로 하는 메시야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음을 증거하기 위한 의도적인 이적 행위였다. 예수님의 안식일 이적 행위들은 생명과 건강과 기쁨의 회복이라는 종말론적, 메시야적 시대의 특징들을 증거하는 것이었다(막 1,2,3장; 눅 6,13,14장; 마 12장; 요 5:9; 사 35:5, 6; 61:1-3). (165.1)
 히브리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안식일의 관계
 안식일에 대한 신약성경의 다른 증언들로 눈을 돌려보자. 신약성경의 시대는 바야흐로 유대교가 그 장려한 성전 의식과 함께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의 시대였다.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남겨 있는 “더 좋은” 것들의 기록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십자가가 준비해 놓은 “더 좋은” 그 축복들을 충만히 수용하라는 권면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와 본보기로 제시되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하늘의 성소로 들어갔으며 우리도 “예수의 피를 힘입고 예수께서 휘장 곧 그분의 육체 가운데를 열어 (만들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것”(히 10:19,20)이라고 주장한다. (165.2)
 이러한 권면의 의의를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믿음으로 안식일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히브리서 3, 4장의 주장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들어간다”는 표현은 히브리서 3, 4장에서만 12회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의 자녀가 누렸던 에덴의 안식일 안식, 이스라엘이 광야의 순례를 끝내고 들어간 가나안의 안식,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미래에 들어갈 하늘의 안식 등은 모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구속의 능력을 믿는 신자들이 누리게 되는 양심의 안식을 상징한다.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쉰다”(히 4:10).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구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시각부터는 더 이상 자기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의 공로 때문에 의기양양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무력감으로 말미암아 낙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들어가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참 안식을 얻는다. 신자들은 이제 넝마같이 망가진 자신의 행실이나 업적을 바라보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업적을 바라본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안식일에 누리는 신체적인 안식은 일 주일 내내 그들의 양심에서 누리는 영적 안식의 한 표현이고 표징인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버리는 것들”의 한 표현으로 우리들의 삶 안에서 누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안식들의 증거인 셈이다(히 11:1 참조).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태초부터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에 의하여 상징되어 온 하나님의 지성소 곧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66.1)
 아담의 육체가 최초의 안식일 전날에 열렸듯이 그리스도의 육체도 새 창조의 안식일 전날에 쪼개졌다. 그리스도가 운명하실 때 찢긴 성소의 휘장은 우리의 대표이며 우리의 대리인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그 육체의 찢어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육체의 쪼개짐은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히 10:9)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히 10:19,20).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쪼개어 만든 “새롭고 산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아가 거기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167.1)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위대한 행위와 업적을 기념하는 항구적인 장치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흘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인이다(히 13:20). 안식일의 하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그것은 인간을 미신의 올무에 사로잡는 하나의 주물(呪物)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안식일이 그리스도와 그의 다 이루신 구속의 기쁜 소식과 연결될 때에는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온 눈부신 선물이 될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위해 남겨진 사바티스모스(안식일 안식)로 안내하는(히 4:9) 능력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167.2)
 안식일을 “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