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2 부 히브리서에 있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앞서 히브리서 3장4장에 나온 안식일의 쉼에 대한 토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과 유대인의 문헌에 있는 안식일의 쉼에 부가되어 있는 세 단계의 의미를 주목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구약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쉼이 무엇보다 일곱째 날에 일로부터의 육체적인 정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출 20:10; 23:12; 31:14; 34:21). 두 번째, 안식일의 쉼은 왕이 백성들에게 “모든 적들로부터의 쉼”(삼상 7:1; 왕상 8:5 참조)을 줄 수 있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특히 시온에 있는 자신의 성소(대하 6:41; 대상 23:25; 시 132:8, 13, 14; 사 66:1) 안에서 그분의 “쉬는 곳”을 발견할 수 있는 곳, 바로 그 안식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국가적인 여망을 요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77.3)
 안식일의 쉼을 대부분 아직 성취되지 않은 국가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정치적인 여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 번째의 해석, 곧 “마지막 때” 또는 “앞으로 올 세상”으로 알려진 메시야 시대의 상징으로 해석하도록 하는데 영감을 불어넣었다. 예를 들어, 데오도레 프리드만(Theodore Friedman)은 “안식일에 대해서 이사야가 언급하고 있는 세 구절 중 두 구절이 마지막 날의 선지자와 연결되어 있다(사 56:4-7; 58:13, 14; 66:22-24). . . 이사야가 ‘기뻐하다’(oneg)와 ‘존귀히 여기다’(kavod)라는 단어를 안식일과 마지막 날 모두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사 58:13--‘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 . 이를 존귀히 여기고’(사 66:11)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그 뜻은 분명하다. 마지막 날에 표징이 될 기쁨과 즐거움은 바로 여기서 지금 안식일로 인해서 그렇게 될 수 있다.”53) (77.4)
 후기의 랍비와 묵시문학서들은 안식일의 메시야적/종말론적인 해석의 더 분명한 예들을 마련한다. 예를 들어, 바벨론의 탈무드는 말하기를 “요셉은 항변하기를 우리의 랍비께서는 7년이 마쳐질 때에 다윗이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안식일이 지나갔으며, 아직도 그날이 오지 않았다”54) 아담과 하와의 책(The Book of Adam of Eve, 1세기 경)으로 알려진 묵시 작품에서, 천사장 미카엘(Michael)이 셋(Seth)에게 권고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죽은 자를 위하여 6일 이상 울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곱째 날은 미구에 있을 부활과 의 표징이기 때문이다”55)고 말한다. (77.5)
 어떻게 안식일이 앞으로 올 세상의 표징으로 간주되었는가? 분명히, 처음은 사막을 방황하였고, 후에는 바벨론 유수에서 경험하였던 어려웠던 경험이 에덴의 안식일을 미래에 있을 메시야의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보도록 영감을 주었다. 사실, 메시야의 시대는 물질적인 풍요(암 9:13, 14; 욜 4:19; 사 30:23-25; 렘 31:12), 사회 정의(사 61:1-9), 사람과 동물 사이의 조화(호 2:20; 사 65:25; 11:6), 탁월하게 긴 수명(사 65:20; 슥 8:14), 찬란히 빛나는 빛(사 30:26; 슥 14:6, 7), 그리고 죽음과 슬픔의 사라짐(사 25:8)등으로 특징지어진다. (78.1)
 이 간략한 조사는 구약과 후기 유대인의 문헌들에서 모두, 주일마다 오는 안식일의 쉼의 경험은 가나안 땅(대부분 미성취로 남아 있음)에서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국가적인 여망뿐만 아니라, “완전한 안식과 쉼”으로 보여졌던 미래의 메시야의 시대를 생각하도록 한다.56) (78.2)
 히브리서에 있는 안식일 쉼의 해석 단계
 구약 시대에 존재했던 안식일의 쉼에 대한 해석의 세 단계, 즉 개인적, 국가적, 그리고 메시야적 실체는 히브리서 3장4장에 있는 이 세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는 기초를 마련한다. 이 두 구절, 즉 시편 95:11창세기 2:2을 함께 생각하므로 저자는 안식일의 쉼의 세 다른 단계의 의미를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안식일의 쉼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히 4:3)고 말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쉼을 지적한다. 이 의미는 창세기 2:2을 인용하므로 설정하고 있다. (78.3)
 두 번째 단계에서, 안식일의 쉼은, 비록 광야의 세대가 실패했으나(히 4:6; 3:16-19 참조), 후에 여호수아의 지도하에서 쉼의 땅에 들어갔을 때 실현된(히 4:8)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는 약속을 상징한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단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분명해졌고 또 가능하게 된 구속의 쉼을 예표하는 것이다. (78.4)
 저자가 어떻게 이 마지막 의미를 일으켜 세우는가? 시편 95:7, 11로부터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내어 여러 번 인용하고 있다(히 4:3, 5, 7). 시편 95편에서, 하나님은 광야의 반역적인 세대(히 4:7-11)들에게 거절하셨던 하나님의 안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의 약속을 실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오랜 후에 “다시” 갱신하셨다는 사실, 즉 다윗 당시에 “오늘”(히 4:7)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하여금 두 사실을 의미하게 한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안식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서 그 땅에서 안식할 장소를 발견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있다”(히 4:9)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런 안식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히 4:3, 7). (78.5)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히 4:7)이라는 구절은 분명히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독자들은 “마지막 때”(히 1:2)에 하나님의 음성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여 진 것으로 들었고, 또 안식일의 쉼에 대한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의 사건의 빛에서, 안식일에 자신들의 일로부터 쉬는 것(히 4:10)은 구속의 현재의 경험(히 4:3)과 하나님과의 미래의 교제에 대한 소망(히 4:11) 모두를 의미한다. 히브리서의 저자에게는, 게르하트 폰 라드(Gerhard von Rad)가 올바로 지적한 것처럼, “창조의 전반적인 목적과 구속의 전반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본래의 안식일의 쉼의 성취에서 재 연합한다.”57) (78.6)
 히브리서에 있는 안식일의 쉼의 본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두드러진 “안식일의 쉼”의 본질은 무엇인가?(히 4:9). 저자는 안식일 준수의 문자적인 표상과 영적인 표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저자는 안식일의 문자적인 준수에 더 깊은 의미, 즉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반응을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안식일 준수의 문자적인 이해에 대한 지지가 9절에서 “안식일 준수--사바티스모스라는 용어를 역사적인 용례로 사용하고, 또 10절에서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의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에서 일로부터 쉬는 것으로 서술하므로 마련된다. (78.7)
 우리가 일찍 본 것처럼, 사바티스모스는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정의하기 위해서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문헌에서 사용된다. 결과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 본문의 입증 가치는 저자가 안식일 준수의 영원성을 논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는 사실에서 높여진다. (79.1)
 안식일 준수의 문자적인 본질은 하나님의 쉼으로 들어가는 것을 일로부터 쉬는 것으로 말하는 다음의 구절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의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히브리서 4:10의 일로부터의 쉼을 상징적으로 죄악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제”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 준수는 일곱째 날을 매일의 일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악적인 행위로부터 항상 자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새 언약”의 신자들은 안식일의 쉼을 일곱째 날에 일로부터의 육체적인 쉼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영적인 구원의 쉼으로 경험한다. 라쯔라프가 간주하는 것처럼, “새 언약의 신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지속적으로 즐거워해야 한다.”58) (79.2)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인 “죽은 행실”(히 6:1; 9:14)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은 일로부터의 하나님의 쉼과 인간의 쉼을 대조하고 있는 히브리서 4:10로 돌아가서는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하나님께서 “죄악적인 행위”로부터 쉬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추의 요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자신의 창조활동을 중지하신 것처럼, 신자들도 그 같은 날에 그들의 노동으로부터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일로부터 쉬는 것을 포함하는 안식일 준수의 특성에 대한 하나의 단순한 진술이다. (79.3)
 히브리서에 있는 안식일 준수의 의미
 그러나 히브리서의 저자의 관심은 단순히 독자들에게 안식일에 그들의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중단하도록 용기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쉬신 행위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고자 함이다. 그 책을 받는 자들이 “히브리인들”로 소개된 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의 예전의 관습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경향성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7장에서 10장이 성전의 희생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 것에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사고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준수의 육체적인 쉼의 국면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국면은 단지 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며, 남아 있는 유대 화되는 경향을 고무시키는데 이바지해 왔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오심의 빛 가운데서 안식일에 쉬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79.4)
 이러한 더 깊은 의미는 저자가 “불신”(unbelief-apeitheias, 히 4:6, 11), 즉 불순종의 결과로 인한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쉼에 들어가는데 실패한 사람들과, “믿음”(faith-pistei, 마 11:28), 즉 순종의 결과로 인한 신실함으로 그 안식에 들어간 자들 사이를 대조하는 가운데서 볼 수 있다. (79.5)
 제4장은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구주와 안식일 사이에 있는 관계와 연결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 더욱 깊이 다루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복음서에서 발견하는 그 날에 대한 구속적인 이해를 넓게 반영하는 히브리인들의 안식일 준수의 더욱 깊은 의미를 본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그분의 “쉼”(마 11:28)은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효한 “안식일의 쉼”의 핵심을 제시한다(히 4:7, 9). (80.1)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쉼의 행위는 단순히 일상적인 예전(“제사”--마 12:7)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이다. 그러한 반응은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히 4:7), “그의 음성을 듣도록”(히 4:7) 수용적이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쉼을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험하게 하며,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됨을 경험하게 한다(히 4:2, 3, 11). 안식일에 대해, 죤 칼빈이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들 속에서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일로부터 쉬어야 한다.”59) (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