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2 부 히브리서에 있는 옛 언약과 새 언약
 더 자세하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아 있는(아포레이페타이, apoleipetai) 안식(Sabbathkeeping-사바티스모스, sabbatismos)에는 연속성이 있다(히 4:9). “남아있다”(apoleipetai)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남겨졌다”라는 의미이다. 9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읽는 다면, “따라서 안식일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겨졌다”이다. 안식일의 영구 불변성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히 4:11)라는 권고에도 함축되어 있다. 사람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은 안식일의 “쉼”의 경험 역시 미래에 실현될 것도 내포되어 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종결될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74.5)
 저자는 레위인들의 제사장직과 봉사가 “폐해지고”(히 10:9), “낡아지고,” 그리고 “쇠하여진”(히 8:13)것으로 선언하는 한편,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히 4:9)라고 가르치고 있다. (74.6)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라쯔라프의 반대
 라쯔라프는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가 새 언약 신학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사바티스모스라는 용어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새 언약의 구원의 쉼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특별한 용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쉼을 성경은 독특한 단어인 ‘안식일의 쉼’(Sabbath rest)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특성화한다. 본인이 믿기로는 그 저자는 이 단어를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쉼’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단어 주위에 인용 부호를 붙일 때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미를 부가한 것으로 믿는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저자는 새 언약이 옛 언약에 비하여 얼마나 더 훌륭한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본인이 믿기로는 그가 제시하려는 진리는 새 언약의 ‘안식일’(sabbatismos)이 옛 언약의 안식일(사바톤, sabbaton)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43) (74.7)
 그 문제의 진리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 내거나 아니면 그것을 독특한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사바티스모스라는 단어가 이미 존재했고, 안식일 준수를 위한 전문적인 용어로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푸르탈크(Plutarch), 져스틴(Justin),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저서들과 그리고 사도 헌장(Apostolic Constitutions),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Martyrdom of Peter and Paul)와 같은 책에서 발견된다.44) 사바티스모스의 새로운 뜻을 고안해 내는 사람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니라 자신의 비 성서적인 “새 언약”신학을 지원하려는 데일 라쯔라프 자신이다. (75.1)
 안식일에서 주일로(From Sabbath to the Lord's Day)라는 학술적 심포지움에 기고한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앤드루 링컨(Andrew Lincoln)교수는 라쯔라프가 사용한 주요 자료는, 위에 나온 각각의 실례들에서, “그 용어가 안식일의 준수나 또는 기념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용례는 역시 안식일 준수를 언급하기 위해 칠십 인 역(LXX)에서 사용하고 있는 같은 종류의 동사인 사바티죠(sabbatizo)와 일치한다(출 16:23; 레 23:32; 26:34; 대하 36:21).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호수아의 시기 이 후부터 안식일 준수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을 말하고 있다.”45) (75.2)
 링컨(Lincoln)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바티스모스의 언어적 용례를 책임성 있게 다루는 일요일을 준수하는 학자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안식일에 사람이 일로부터 쉬는 것을(히 4:10) 일로부터의 물리적인 정지보다는 죄로부터의 영적인 정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를 선택한 것이다.46)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아래서 보겠지만, 히브리서의 저자가 노동으로부터 신적인 정지와 인간적인 정지 사이를 비교하므로 불신임을 받게 된다. (75.3)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라쯔라프의 5대 이유
 라쯔라프는 사바티스모스(sabbatismos)는 “넷째 계명의 제 칠일 안식일이 될 수 없다”47)는 자신의 주장을 지원하기 위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이유들은 근본적으로 같다. 라쯔라프는 히브리서가 여호수아 당시와 후에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그들이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그 후 사바티스모스는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와는 상관이 없었다고 주장한다.48) (75.4)
 이러한 결론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안식일의 쉼을

 (1) 일곱째 날의 신체적인 쉼,

 (2) 가나안땅의 국가적인 쉼, 그리고

 (3)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인(메시야) 쉼 등의 세 단계의 의미를 부가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논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하에서 쉼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히 4:8),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쉼에 들어오라는 초청인 안식일 준수의 영적인 국면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히 4:2, 6). 이것은 비록 가나안 땅의 정복 후에도, 다윗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쉼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사실이었다(히 4:7). 안식일 쉼의 영적인 국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sabbatismos]”(히 4:9)고 한 저자가 가리키는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경험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구절을 적절하게 이해는 것은 안식일 준수, 곧 남아 있는 사바티스모스는 그 날의 문자적인 준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쉼의 실제적인 행위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75.5)
 라쯔라프에 의해서 주어진 세 번째 이유는 ‘믿는다는 것’의 개념은 결코 옛 언약에 속한 일곱째 날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49)는 자신의 추측이다. 이러한 추측은 안식일이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는”(출 31:13) 표징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의해서 반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는 임재와 능력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나 또는 “믿음의 반응” 없이도 안식일에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가? 더 나아가서, 선지자 이사야가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하므로”(사 58:14) 존귀히 여기도록 설교하지 않았는가? 사람이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안식일에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 (75.6)
 라쯔라프가 제시한 네 번째 이유는 과거시제(헬라어에서는 단순과거[aorist]시제 임)인 “안식에 들어간”(has rested, 히 4:10)이라는 동사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과거시제는 그의 일로부터 쉬고 있는 신자들은 과거 어느 지점50)에서 그렇게 한 것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는 “안식에 들어갔다”라는 과거시제는 안식일에 일로부터 쉬는 주기적인 중단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고 경험된 은혜의 쉼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76.1)
 이러한 해석은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는, “안식에 들어갔다”(has rested-카테파우센, katepausen)라는 동사는 역시 과거인 “들어간 자”(에이셀톤, eiselthon-he that entered)라는 이 전 동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이다. 헬라어의 구조(단순과거 분사형)는 어떤 사람이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entered) 자는 이미 과거에도 “그의 일로부터 쉬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76.2)
 두 번째는 그 본문은 “일”(works)로부터의 “하나님의 정지와 인간의 정지” 사이를 단순히 비교를 한다. 영어성경 개정 표준어역(RSV)에는 본문을 “누구든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자기 일을 쉬느니라”(‘For whoever enters God's rest also ceases from his labors as God did from his’을 역자가 직역 함, 히 4:10)로 읽는다. 이 유추(類推)의 요점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쉬시기 위해서 일곱째 날에 당신의 일을 멈추신 것같이, 신자들이 안식일에 그들의 일을 멈추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만일 라쯔라프가 주장하는 것처럼, “안식에 들어갔다”(has rested)라는 동사가 “은혜의 안식”(rest of grace)을 언급했다면, 하나님께서도 역시 “은혜의 안식”을 경험했다는 유추가 되므로 분명히 불합리한 것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유추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더욱 충만히 그리고 더욱 자유롭게 역사 하시도록 허락하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일을 정지하는 것을 포함하는 안식일 준수의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진술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76.3)
 “들어갔다”(entered-eiselthon)와 “쉬었다”(rested-katepausen)라는 두 동사가 과거시제(aorist)인 이유는 그 저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남겨진 안식일 준수가 과거의 국면과 현재의 국면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과거에,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 그들의 일로부터 쉬므로(히 4:10) 경험되었다. 현재는, 우리가 순종하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히 4:11)써야 한다. 영어성경 개정표준어역과 신국제어역(NIV)은 둘 다 문맥이 안식일의 쉼의 현재와 영원한 특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 두 단어를 현재로 표현한다(히 4:1, 3, 6, 9, 11). (76.4)
 안식일의 쉼이 매일의 은혜의 쉼인가?
 히브리서 4:9에 있는 사바티스모스, 안식일준수”의 문자적인 뜻을 거절하는 라쯔라프의 다섯 번째 이유는“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약속이 ‘오늘날’에도 훌륭하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일곱째 날(seventh day) 안식일의 쉼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신자들이 매일(every day) 경험하는 “은혜의 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51)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 경우에서 오늘(today)이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새 언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쉼에 오늘 들어갈 수 있다. 그는 주일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 . 새 언약 신자는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지속적으로 즐거워해야 한다.”52) (76.5)
 어떻게 라쯔라프가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자신의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서 “오늘”을 잘못사용할 수 있는지 본인은 놀라고 있다. “오늘”(세메론, semeron)이라는 부사의 기능은 문자적인 안식일준수를 대치하는 계속되는 은혜의 안식일의 쉼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 단어는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경험하는 것으로서의 안식일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히 4:6).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95:7을 인용하여,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히 4:7; 시 95:7 참조)고 말하므로 백성들이 그분께 반응하도록 초청한다. (77.1)
 다윗 시대에 있었던 초청을 새롭게 하셨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안에 있는 쉼으로서 안식일의 영적인 국면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도움을 준다. “오늘”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생애 하므로 매일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인 배경, 곧 “오늘”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윗 시대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오늘”에 대한 라쯔라프의 해석이 바르다면, 이미 다윗 시대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의 문자적인 준수를 그분 안에서의 영적인 경험으로 대치시켰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터무니없는 결론은 불필요한 추측을 가지고 본문을 읽으므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77.2)
 구약에서의 안식일 쉼의 해석의 세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