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3 장 안식일과 새 언약 제 2 부 히브리서에 있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안식일과 언약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비교적 중요한 것이 히브리서에 첨부되어 있다. 왜 그럴까? 우선, 첫째로 히브리서가 신약의 어떤 다른 책들보다도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관계를 더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히브리서 4:9“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말씀이 문자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것이라면, 이 본문은 신약의 교회에서의 안식일 준수라는 분명한 증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72.1)
 히브리서 4:9에 대한 하나님의 세계교회의 해석
 하나님의 세계교회는 이 본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므로 인정한다: “만일 이 구절[히 4:9]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키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라는 부활후의 유일한 직접적인 명령일 것이다. 만일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그 때는 신약 교회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을 입증하는 기록된 본문이 없다. 이런 입장에서, 그 구절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37) (72.2)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저자의 토론 배경에서 히브리서 4:9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바로 이 일을 직접적이고도 더 큰 배경의 빛에서 그 본문을 연구하므로 행하려는 것이 실로 우리가 이제 하고자 하는 일이다. 히브리서에 있는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세계교회가 준 해석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삼단논법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72.3)
 첫 번째 전제:

   그리스도께서 폐지된 옛 언약의 법을 만드셨다.

 두 번째 전제:

   안식일은 옛 언약의 일부분이었다.

 세 번째 전제:

   따라서, 안식일의 문자적인 준수는 폐지되었다.38)
 하나님의 세계교회는 “안식할 때--사바티스모스[sabbatismos]-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는 구절을 일곱째 날 안식일의 준수가 아니라, 매일 경험하는 영적 구원의 쉼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는 구원의 영적인 쉼은 사바티스모스, 곧 ‘안식일 준수’이다. . . 요약하자면, 그 구절의 현안 문제는 우리에게 옛 언약의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쉼’으로 들어가도록 권고하고 있다.”39) 히브리서 4:9에 있는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세계교회의 해석에 대한 평가는 라쯔라프의 해석을 분석하는 배경에서 주어졌으므로 그 둘은 매우 유사하다. (72.4)
 히브리서 4:9에 대한 라쯔라프의 해석
 하나님의 세계교회처럼, 라쯔라프도 언약과 안식일에 대한 히브리서의 가르침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가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의 진술에서 명확해진다: “본서의 문맥적 가르침은 우리가 연구하는 바로 그 요점, 곧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의 율법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진술들을 가장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40) (72.5)
 라쯔라프의 주장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세계교회의 주장과 같다. 그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폐기되어 버려진 옛 언약의 율법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히브리서 9:1“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헬라어는 봉사, 곧 섬김으로 되어 있음)”이 있었음을 주석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진술한다. “안식일이 신적인 예배와 봉사(레위기 23장)의 규칙들 중의 하나였음은 의문의 여지없이 분명하다. . . 우선 본인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복습하므로 명확히 하도록 하겠다. 첫째, 우리의 저자는 그 시내 언약을 첫 언약이라고 부른다(다른 곳에서는 옛 언약이라고 부름). 그런 후 그는 말하기를 그 언약은 신적 예배를 위한 규칙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십계명을 분명히 언급하는 ‘증거 판들’을 포함하는 이 ‘첫 언약’에 포함된 것들을 열거하기를 계속한다. 그것들의 문맥적 배경 속에는 성경의 사실들이 있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을 포함하는 ‘언약의 비석들’과 안식일을 포함하는 ‘신적 예배를 위한 율법들’은 낡았고 사라질 때가 되었다.”41) (72.6)
 히브리서에 있는 불연속성(discontinuity)
 라쯔라프는 히브리서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사이에 있는 불연속성을 레위인들의 봉사에 관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종결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불연속성을 십계명, 특별히 안식일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73.1)
 히브리서의 저자가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히 7:11),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수반된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제사장들, 성소 그리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제사들은 “표상적”(히 9:9; 8:5)이기 때문에, 그것들 자체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다”(히 9:9).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실”(히 9:26)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효력은, 라쯔라프가 주목한 것처럼, 성소와 관련된 모든 레위인들의 제사를 “폐하고”(setting aside, 히 7:18), “낡아지게 하시고”(obsolete, 히 8:13), “폐하게”(abolishing, 히 10:9) 하는 것이었다. (73.2)
 문제는 이토록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라쯔라프가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구약의 법들이 폐지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레위인들의 제사들과 희생제사의 규칙들을 다루는 문제가 되는 진술들이 7장에서 10장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경시한다. 이 장들에서, 저자는 “율법”(히 10:1)과 “언약”(히 8:7, 8, 13)이라는 용어를 특별히 레위인들의 제사 봉사와 관련하여 사용한다. 이 배경에서 그 용어들은, 즉 레위인들의 봉사와 관련된 것들이 “폐하여진”(히 10:9)것으로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이 율법이 폐하여진 것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는 하나의 포장 진술로 사용될 수는 없다. (73.3)
 왈트 카이제르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분명히 첫 언약에서 폐하여진 것으로 그가 본 것은 의문과 제사의 법들, 곧 모세에게 보여진 첫 날부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경고들을 담고 있는 바로 그 항목들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출애굽기 25장-40장과 레위기 1장-27장에서 그에게 주신 것들이 산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식양(pattern)을 따랐을까? 이것은 모세가 제정한 ‘식양’, ‘그림자’, 또는 ‘모형’이 실체가 올 때까지는 실제적인 것들로, 그 실제가 어딘 가에 남아 있었을 것임을 의미했다! 히브리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모든 옛 언약 또는 율법서(토라)가 대체되었다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42) (73.4)
 라쯔라프는 히브리서 9:4에 있는 ‘언약의 비석들’에 대한 말씀은 ‘언약의 비석들’이 포함된 언약궤의 내용물을 묘사하는 배경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후자는 표상적인 기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종결된 지상 성소의 가구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끝난 지상 성소의 봉사는, 라쯔라프가 주장하는 대로, 단지 그것들이 그 궤 안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종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73.5)
 새 언약 안에 있는 십계명의 연속성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지상성소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히 9:24) 하늘성소로 대치되었다고 가르친다. 요한이 계시 가운데서 하늘을 보았을 때, 그는 성전 안에서 십계명이 담겨져 있는 “언약궤”(계 11:19)를 보았다. 왜 요한에게 보여진 언약궤가 하늘 성전에 있었는가? 그 대답은 단순하다. 그 언약궤가 하나님의 공의(십계명)와 자비(시은좌)에 기초한 보좌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74.1)
 만일 십계명이 성소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끝났다는 라쯔라프의 논증이 사실이라면, 왜 십계명을 담고 있는 언약궤가 하늘 성소에서 요한에게 보여졌는가?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고 계신 하늘 성소에 있는 언약궤에 대한 이상은 십계명의 원칙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74.2)
 불행하게도, 라쯔라프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한 그의 관심에서, 두 언약 사이에 있는 명확한 연속성을 간과하고 있다. 연속성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고, 이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히 1:1-2)하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그 계시 가운데는 연속성이 있다. 모세와 그리스도의 신실성과 성취 가운데는 연속성이 있다(히 3:2-6). (74.3)
 제사장들에 의해서 지상성소에서 표상적으로 드려진 구속의 봉사와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드려지는 실제적인 봉사(히 7장-10장)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훌륭한 구약의 신앙과 약속들을 나누는 신약신자들의 믿음과 소망 가운데는 연속성이 있다(히 11장, 12장). (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