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사람은 조심성 있고 명민하고 용의주도하게 그리고 앞을 내다보며 결정하고 행동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생활양식에서 분별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잠언에서 신중한 사람은 말을 조심하는 사람(12:23), 악과 그 결과를 피하려는 사람(14:16; 22:3; 27:12), 책망과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15:5), 모욕에 괘념치 않는 사람으로 묘사된다(12:16) 예수님은 영적 생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여러 비유에서(마 7:24-27; 25:1-30; 눅 16:1-9), 몸소 모본으로(마 16:1-4; 요 12:33-36), 또 가르침으로(마 10:16)말씀하셨다. (813.4)
 분별력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신중한 결정은 자신의 유익을 최우선으로 삼아 선택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와 자신에 대한 의무가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은 자기본위가 아니라 원칙 위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셨다(마 5:38-48; 6:19-34; 10:37-39; 16:24-27). 예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그리스도인 수천명의 순교는 그리스도인 생활양식의 본보기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맥락 속에서 가장 뛰어나게 작용한다. 그리스도인은 대안들을 따져보고, 지혜를 간구하고, 충고를 구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분별력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길 것이다. (813.5)
 c. 용기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 전쟁, 제자의 삶으로 묘사할 때가 많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에는 개척 정신, 군사의 용맹, 주인을 섬기는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 이 모든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위험을 당해도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에 용기를 계발하도록 돕는 몇 가지 상황이 있다. 무엇보다 회심하여 삶의 모든 단계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경험할 때는 개인의 습관과 악한 성향에 맞서고(고전 9:24-27), 사회와 동료들의 압력을 견디고(단 3:16-18; 6:19-23), 가족과 결별하고(마 10:34-38), 심지어 박해를 당하고 죽음까지 감수할(계 2:10; 7:14) 용기가 요구된다.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바칠 때 역시 실망과 절망 앞에서도 굳세게 버틸 수 있는 용기가필요하다(시 27:14). 용기는 유혹과 시련을 경험하면서 자라난다(고후 4:16-18). 마지막으로 지도자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홀로 설 힘과 용기를 찾게 된다. (813.6)
 도덕적 덕목인 용기는 우주를 다스리고 자녀의 곤경을 돌보고 그들의 약점을 용서하고 고치시는(롬 8:31-39) 하나님을 믿을 때 지속된다. 용기의 기초는신체적 힘이나 인간적 특성만이 아니다. 용기는 일종의 도덕적 원기이며, 제자들이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자기 삶의 주인이신 주님을 따르게 해 준다(히 12:2). (814.1)
 d. 용서
 인간은 죄에 빠진 뒤로 용서를 힘입어 산다(엡 4:32; 느 9:17).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이 완성될 때까지 이 덕목을 장려해야 한다. 물론 그분의 왕국에는 더 이상 죄가 없으므로 용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품성에 이 덕목을 길러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아담 이후로(예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여(롬 3:23) 자신과 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모든 악행이 유발하는 분노와 중오 그리고 죄가 인간 상호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만들어 놓은 거리는 견딜 수 없이 심각하다. 죄를 용서할 때만 이 간극에 다리를 놓아서 깨어진 관계를 돌이킬 수 있다. 이것은 가해행위로 인해 생기는 분노를 의도적으로 물리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용서는 성화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814.2)
 그런데 인간의 죄 된 마음에는 순결하고 거룩한 행동을 유발하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상처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이 용서를 일으킨다. (814.3)
 용서를 이해하려면 용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용서란 면죄나 두둔이 아니다. 용서는 잘못이 없었다는 증빙이 아니라 오히려 잘못에 대한 추궁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잘못을 인정한다는뜻이며 죄의 책임에서 풀려나 제2의 기회를 얻게 달라는 것이다. 용서는 잘못을 봐주는 것도 아니다. 봐준다는 것은 나쁜 짓을 저지른 상대의 책임을 부정하는 행위이며 무시, 곤경, 강압 등으로 책임을 경감하려는 석연찮은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죄를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면 화해도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용서란 책임의 소재를 확실하게 밝히는 동시에 그 죄책으로부터는 놓임 받게 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서란 도덕 질서를 거역하거나 배척하는 행위가 아니다. 피해자 측의 분노는 조화롭고 질서정연한 상황에 균열과 붕괴가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용서는 질서를 회복하고, 권리와 특권을 존중하고자 한다. (814.4)
 용서에 대한 이러한 견해에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무조건 관대한 게 아니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사실 성경은 건강한 관계 회복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회개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겔 18:30; 마 3:2; 행 17:30, 31; 계 2:5, 16). 분석해 보면 회개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죄의 인정 혹은 고백이다(잠 28:13; 겔 33:14, 15; 요일 1:9). 이 단계에서 죄인은 잘못된 행위를 선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도덕적 옳고 그름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814.5)
 고백만으로는 죄인이 죄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잘못을 기꺼이 버리고자 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다. 입으로 하는 고백과 더불어 변화되려는 흔쾌한 마음이 따라야 한다. 절대로 성경은 사랑의 이름이나 기타 신적 행위로 죄 ‘안에서(in)’ 용서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봐주시기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주장하는 것은 죄‘로부터의("끼)’ 용서이다 즉 악에서 떠나는 능력을 제공하는 용서이다(눅 1:77; 행 2:38; 롬 6:1-4).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815.1)
 “사탄은 그럴듯한 이론으로 수많은 사람을 속인다. 즉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 안의 죄를 눈감아 주신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는 존재한 적이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용서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의의원칙을 저버리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22). (815.2)
 저지른 잘못은 타인에게 피해와 손실을 안겨준다. 정의는 이 손실에 대해 완벽한 배상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회개의 셋째 단계다(민 5:7). 완벽한 배상이란 좀처럼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이 개입한다. 그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죄인의 상황을 떠맡으신 것이다 용서는 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엡 4:32).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듯이 또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다(요일 2:12). (815.3)
 회개하면서 죄인은 자신을 죄로부터 분리시킨다. 덧붙여 회개는 자기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행복과 권리에 대한 존중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게 하여 관계는 회복된다. 회개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이 잘못과 하나가 되어 살지 않으며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과 같이 그 잘못을 정죄합니다.” (815.4)
 그렇다면 어떻게든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서의 덕목은 왜 그리스도인 품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할까? 성경은 여러 이유를 제시한다. (815.5)
 첫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마 18:21-25).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산다면 우리는 용서받은 자이다(시 130:3, 4). 우리가 살며 사랑하며 무언가에 희망을 걸고 있다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우리는 아버지의 용서하시는 마음에 힘입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눅 15:11-24). (815.6)
 둘째, 우리 자신이 동료 인간의 용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마 5:23-26). 사실 하나님의 용서는 이웃의죄에 대한 우리의 용서와 비례하여 연결되어 있다(마 6:12; 눅 11:4). 인간은 가장 사랑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며 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다. 동료 인간의 참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 또한 남에게 용서를 구하며 뉘우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815.7)
 셋째, 용서란 가장 극단적인 공격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대응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양쪽 모두가 관계되는 일이며 둘 다 겸손히 하늘 아버지께 의지할 필요를 인식하게 한다. 봐주기, 무력감, 냉담함으로는 상처 입은 관계를 악영향 없이 치유될 만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관계를 재설정하여 상대방도 예수님의 은덕을 받을만한 존재로 대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게 해 준다. (815.8)
 마지막으로, 용서의 가장 고무적인 특징은, 용서를 제공하기 위해 가해자가 회개할 때까지 피해자가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에서 이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롬 5:6-11). 용서라는 희망 덕분에 죄인은 자신의 길을 되돌아보고 회개한다(눅 15:17-19). 용서는 오직 하나님의 죄 사함에 기초해있기 때문이다. 회개의 조건부적 특성은 무제한적으로 이미 주어진 용서의 효력에서 비롯한다(마 18:21, 22). 회개는 가해자에게서 가해하려는 태도와 기질을 끊어버리고 그가 용서를 받아들이게 한다(참조 구원론 III. A. 1). (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