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극장
 텔레비전에 대하여 언급한 대부분이 극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게다가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는 몇 가지 문제가 더 생긴다. 먼저 관객은 영화 혹은 그 장면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각 개인이 관람객 단체의 일부이므로 개인적 취향 가치관, 선호도를 다수 앞에서 양보할 수밖에 없다. 상영되는 장면이 그리스도인 관람객에게는 불쾌한데 대중은 환호하며 웃을 때도 있다. 또 그리스도인 관객이 좋아하고 행복을 느끼는 대목이 나머지 관객에게는 정반대로 보일 때도 있다. 다수의 영향력은 개인의 판단을 약화하는 경우가 많다(시 1:1-3). 게다가 극장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기에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다. 또 입장료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기도 주저하게 된다. (811.1)
 집에서 비디오로 시청하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문제의 일부가 해결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다. 생각과 마음에 어떤 오락을 허용할지 선택할 때는 순결과 적합성이라는 성경적인 원칙을 따라야한다(잠 4:23). (811.2)
 d. 춤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도 즐거움과 행복한 마음에 절로 덩실거리는 일이 있지만(출 15:21, 22; 삼하 6:14), 성경적인 춤을 현대의 춤과 비교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현대의 사교춤은 감정을 ‘표현’한다기보다는 엔터테이너의 선택에 따른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춤에 참가하는 이들은 자신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영향력과 가치관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경험적으로 성경의 춤에서 표현된 감정(기쁨, 감사, 찬양)은 댄스홀에서 조장되는 감정(흥분, 욕정, 유혹)과 전혀 다르다. 후자의 감정은 그리스도인 생활양식에 어긋난다. 로맨틱한 음악과 리듬은 친밀하고 사적인 감정을 공공연하게 부추긴다. 부득불 그리스도인은 불필요한 유혹과 그리스도인 정체성에 대해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게 된다. 사교춤는 다른 상황에서라면 결코 허용하지 않을 신체적 친밀감을 정당화한다. 이런 친밀감은 결혼관계가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성적 욕망을 부추긴다. 또 춤에는 음주, 마약, 폭력과 무절제한 행동이 따를 때가 많다. 관능적인 옷차림과 분위기, 음악은 우발적인 접촉을 조장하고 이는 불순한 생각과 불행한 결과로 이어진다. 이러한 행사에 참여하거나 그런 장소에 가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시 1:1-6). (811.3)
 e. 음악
 음악은 청취자에게 사상을 전달하고 감정과 기질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도구다 여러 가지 요소가결합하여 이처럼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먼저 선율과 화음은 흥겹거나 위협적으로, 슬프거나 기쁘게, 로맨틱하거나 차갑게 생각과 마음을 건드려서 내면에 동일한 감정을 일으킨다. 리듬과 박자는 선율과 화음의 효과를 더욱 강렬하게 해 준다. 가사는 내용을 시적으로 표현하여 전체적인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본질적으로 음악의 영향은 잠재적이므로 객관적인 측정이나 평가가 어렵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휴양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811.4)
 예를 들어, 신앙적인 가사를 로맨틱하거나 코믹한 가락에 결합하면 신성한 주제가 하찮게 여겨진다. 비슷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화음과 호소력 있는 가락은 감흥을 자극하여 특히 집단적인 장소에서는 경계를 늦추게 한다. 또 그 자체로는 나무랄 데 없는 음악에 혐오스런 가사를 교묘하게 감추어 둘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음악은 문화와 교회의 경계를 뛰어넘는 접착제로 작용하여 사상과 취향을 형성하면서 선하거나 악한 영향을 퍼뜨린다. 이들 노선에 따라 세대가 갈리고 그리스도인 가치관이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생각과 마음을 어느 정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길은 타협하지 않는 확고부동함과 신중한 경계뿐이다. (811.5)
 5. 그리스도인의 덕목
 그리스도교 생활양식은 표준의 준수, 올바른 결정, 신속한 선행 그 이상을 요한다. 인간의 행위는 여러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영향력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면은 도덕적 인간의 외적 행동과 내적 정체성 사이에 작용하는 밀접한 상호의존이다. 행동은 성격에 영향을 주고 또 성격은 행동에 영향을 준다. 행동을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적인 행동은 미덕 혹은 악덕을 자아낸다. 결국 이것이 각 개인의 고유한 성품 유형을 빚어낸다. (812.1)
 그리스도교는 눈에 보이는 행동을 정체성, 즉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시키려고 애쓴다. 하나님은 첫째로 개인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죄의 악순환에서 구원하고(요 1:12, 13) 의와 생명의 선순환을 확립하고자 하신다(요 3:16). 둘째로 그분은 하늘 보물 창고를 열어서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이 회복되고 자라도록 힘을주신다(요 1:14, 16). 마지막으로 그분의 사랑은 그리스두교 생활방식의 표준을 규정한다. 이 생활방식 속에서 그분의 사랑은 인간관계를 통해 구체화 된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아래와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여 결론짓고자 한다. 이 덕목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그리스도인의 생동감 있는 삶에서 흘러나온다. (812.2)
 a. 성실성
 성실(integrity)의 어원인 라틴어 ‘인테그리타스(integritas)’“전체의, 훼손되지 않은, 완전한”이라는 뜻이다. 수학에서 ‘정수(整數, integer)’는 1, 2, 3, 4와 같이 각각의 양을 지닌 완전수를 뜻한다. 정수는 첫째, 저마다 고유하며 값이 다르다. 둘째, 각자 본래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정수 5는 덧셈, 뺄셈, 곱셉, 나눗셈 어디서든 숫자 5의 역할을 맡는다. 셋째, 정수는 값의 신축성이 허용되지 않는다. 많든 적든 다른 수를 더하거나 빼면 처음의 정수는 사라지고 다른 정수가 된다. (812.3)
 성실성이라는 덕목은 성품, 태도, 행동 말로 이루어진다. 이들 요소는 진리 및 사실과 완전하면서도 변함없는 조화를 이룬다. 경험되고 표현되는 사실에 약간이라도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면 그 완전성과 진정성은 파괴된다. (812.4)
 ‘존재의 성실성’은 진리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요 14:6). 삶에서 이 덕목이 빛나면 다른 모든 덕목을 유감없이 발휘할 힘을 얻는다. 가장 믿음직한 방식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경험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획득한다. 엘렌 화잇은 성실한 사람을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사람”(교육, 57)이라고 묘사한다. (812.5)
 원칙의 타협, 위선, 비겁함 속임수 불명예 등은 성실성과 공존할 수 없다. 한 가지 그릇된 행동이나 말때문에 품성의 참다움과 고결함은 손상을 입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잃어버린 온전함을 치유하고 회복한다. 요셉, 다니엘. 에스더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같은 사람은 죄인임에도 성실성이라는 덕목을 계발한 인물의 본보기이다. 이들은 진실하고 순결하기로 처음부터 스스로 굳게 결심했다. 정수(整數)처럼 성실한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서든지 참다움과 온전함을 드러낸다. (812.6)
 ‘말의 성실성’마태복음 5:37에서 예수님이 권면하신 말씀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말은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 진리를 바꾸거나 속여 놓고서 그것이 사실의 전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한 짓이다. 성실한 사람은 진실, 정직, 순수함 솔직함을 어떤 이득이나 보상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에는 “하얀 거짓말”이나 “선의의 속임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813.1)
 소위 부득이한 거짓말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사실이 밝혀지면 누군가의 삶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사실이 밝혀지면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칠 인물도 사실을 알 “자격”이 있느냐이다. 바꿔 말하자면 성실한 사람은 사실을 알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짓말할 “자격”이 있느냐이다. “자격”을 갖춘 거짓말도 여전히 거짓말일까? “자격 없는” 사람에게는 사실도 바뀌는 것인가? 무죄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를 함구하려는 것이 성실한 사람의 자연스런 충동이다. 필자의ㅡ개인적 경험에 따르면, 단순히 “나는 모른다.”(진짜 모를 경우) 혹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또는 “당신도 알만큼 알고 있잖느냐.”라든가 “다른 데서 알아보라.”는 말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의 선택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남을 구해 주면서도 자신의 결백을 지킨 경우가 있고 종종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는 때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의 목숨이 내 집의 벽장 속이나 나의 침묵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예외적인 상황이 지금도 극히 이례적일 뿐이며 또 이례적인 곤경이 발생할 때 그분은 그에 맞먹는 이례적인 은혜를 약속하셨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가 거짓말과 속임수에 대해 회개할 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들어 주시고, 악한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해 주시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813.2)
 b. 분별력
 분별력(prudence)은 철학(아리스토텔레스)과 신학(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에서 고전적인 전통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것은 도덕 행위자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올바른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이라고 정의된다. 분별력은 실제적인 지혜와 상식을 실행으로 옮긴다는 점에서 성실성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덕목에 영향을 준다. (8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