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죄의 존재가 거룩해지고 죄스런 정신, 의지, 감정이 순결해지는지에 대해 성경에서는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예수님은 이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하셨다(요 3:1-15). 바울은 이것을 죽음, 장사, 부활(골 2:12-14)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칭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이다. 사랑으로 그분은 죄의 잔인한 순환을 파괴하시고 죄책과 채무로부터 용서와 자유를 주신다. 죄인은 옛 충성에서 떨어져 나온다. 그리고 새로운 헌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힘을 성령의 열매를 맺는 데 쏟게 된다(갈 5:22-23). 이것이 칭의의 사역이다. (783.1)
 도덕적 순결이라는 거룩함은 그리스도교의 역동적 개념이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본성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표현된다.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거듭나∙∙∙산 소망이 있게” 되었고 “하늘에 간직하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유업을 잇게” 되었다고확언한다(벧전 1:1-4). 이것은 하나님의 칭의 사역에 관한 아름다운 진술이다. (783.2)
 그러나 구속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칭의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 성화 과정의 시작을 촉발한다 칭의는 우리를 의롭게 하고, 성화의 과정과 은혜 안의 성장이 시작되게 하고, 우리가 예수님과 보조를 맞추어 성숙하게 한다(엡 4:13-14). 칭의를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 불렸다(롬 1:7; 고전 1:2; 빌 1:1; 골 1:2).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그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 선택받았다고 편지했다(엡 4:1).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아들과 딸로 입양하여 “성도”라 부르신 다음, 이 새로운 현실을 행동으로 드러내라고 요청하신다.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성화는 칭의를구체화하고 영속시킨다. (783.3)
 사도 베드로는 레위기 11:44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거룩한 자가 되라” 그는 작지만 중요한 구절 “모든 행실에”를 본문에 덧붙인다(벧전 1:15). 이 성경절의 첫 부분에서는 칭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성화를 언급하고 있다. 의롭게, 거룩하게 된 삶이란 성도의 머리에 후광이 나타나서야 인식되는 게 아니다. 성도의 말, 음식, 행위, 여흥, 동료들을 통해서 인식된다. 이 모든 것이 죄스럽고 불경한 가치관과 방식에서 분리되어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항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783.4)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시는 분은 우리를 지은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 힘으로 할수 있는 것과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또 그분은 자기의 도움으로 무엇이 가능한지도 아신다.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빌 1:6). 그분은 끝마칠 수 있을지를 헤아려보지도 않고 마구 일을 시작하지 않으신다(눅 14:28-32). 또 우리가 완전히 포기하고(33절) 그분에게 모든 기회를 드리는 제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하거나 죄 없다고 자랑하지 말아야한다고 또 선 줄로 생각하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신다(고전 10:12). 바울은 말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783.5)
 5. 사랑하고 순종하라는 부르심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자기보존, 자기 관심, 절대적, 개인적인 독자성을 갈망하는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욕구를 초월한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타인에 대한 무아의 봉사를 모든 행위의 주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요 14:15; 고전 13장). 이런 생활양식은 성경적인 사랑과 성경의 중심 메시지에 부합한다 예수님은 구약을 인용하여(레 19:18)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술하신다(마 22:37-40). 사랑은 의향이나 감성이 아니다. 사랑은행위이다. 사랑은개인적, 상호적, 사회적 관계의 원동력이며 이들 관계를 통제한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 사랑은 자존감의 말살 없는 겸손을 고취하며 자기 파멸로 치닫지 않는 자기부정을 고양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체성과 행복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신체, 정신, 영혼을 돌볼 것이다. 대인적, 사회적 측면에서 사랑은 나이, 인종, 성별,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정체성과 행복을 동등하게 존중하도록 요구한다(갈 3:28-29). (783.6)
 사랑은 가장 중요한 성령의 열매이며(골 3:14; 갈 5:22) 하나님의 속죄 행위의 최종적인 결과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자 사랑의 이유이다(요일 4:10-11, 19). 따라서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이라는 인간의 악순환에 제동을 걸고, 거절과 증오를 참아내며, 달갑지 않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산 제물이 된다. 인간이 그와 동일하게 반응할 필요를 느낄 때 하나님의 사랑, 즉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롬 5:5). 그러면 그 첫번째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롬 8:15). 또 우리가 아들딸로서 그분을 대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의 보살핌과 동정으로 대해야 할 형제자매로 받아들인다. (784.1)
 하나님과 이웃과 맺는 사랑의 관계에서 사랑과 순종은 함께 만난다. 낯선 사람이나 고아는 순종할 일이 없다. 노예도 순종하는게 아니라 복종하고 준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의 사랑에 감동한 자녀는 순종으로 반응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종종 하나님의 사랑은 순종과 관계있다(신 6:4-6; 30:16; 갈 5:14; 요일 5:3). 왜냐하면 사실 사랑은 순종하기를 즐기며 순종은 사랑을 구체화하기 때문이다(시 40:8). 그리스도인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따른다(롬 8:15; 요일 4:18). 율법을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용서하신다고 그들은 확신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순종하며 반응하기를 계속해서 거절할 때만 하나님과 분리된다(마 23:37; 롬 8:35-39). (784.2)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을 사랑에 근거한 명령으로 진술한다. 절대적으로, 즉 명확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은 사랑의 본질을 두 가지로 정의하신다. 첫째, 그분은 사랑이 요구하는 행동(요 3:16), 마음가짐(요 15:13-14; 롬 5:8), 사람됨(요일 4:8)을 보여 주신다. 둘째, 그분은 행동 마음가짐, 사람됨의 기초가 되는 기준을 기술하신다(출 20:1-17). (784.3)
 성경에서는 가상적이고 모호한 사랑, 실제적인 인간 행위와 거리가 먼 사랑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마 22:40)과 바울(갈 5:14)이 율법(하나님의 뜻)과 사랑(하나님의 행위)을 갈라놓으면서 이처럼 대단히 이상적인 사상을 소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견해의 지지자들은 사랑을 첫째 자리에 두고 율법을 둘째 혹은 보조적인 자리에 둔다. 사랑은 율법을 불필요하게 한다는 것이다. (784.4)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을 제시한다. 또 인간 역사에서 그분의 행위들은 그분의 사랑을 보여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어린 뜻(그분의 율법)과 그분의 사랑 어린 행위가 서로 불일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 모두가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율법과 사랑이 대립한다는 가정에 논박하신 것이다. 오히려 이 둘은 우리 하늘 아버지의 양면이다. 한편으로는 행복과 복리를 명령하심으로 사랑 넘치면서도 단호하게 악으로부터 보호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으로 활동하시면서 자기 자녀에게 좋은 선물들을 제공하신다. (784.5)
 그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사랑이m율법의 완성이라는 자신의 이해를 피력했다. 바울은 율법과 사랑이 구원을 위한 양자택일의 두 방식이 아니고 서로를 배제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율법을 사랑 어린 관계를 위한 처방으로 그리고 사랑을 이 관계의 성취에 요구되는 내적 요인으로 보았다. (784.6)
 사랑이 절대적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삶과 행동 기준에서 그 사랑이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틀림없다는 점에서도 절대적이다(고전 13:1-3). 사랑은 절대적이고 하나님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므로 그분의 명령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다. 그렇기에 거듭난 사람은 사랑을 선택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다(시 1:2). (785.1)
 성경의 아가페는 절대적이므로 또 권위적이다. 네 하나님과“네 이웃”“사랑하라”는 명령은 제안이 아니다. 모세의 책에 진술되었든(레 19:18; 신 6:5) 예수께서 재 진술하셨든(마 22:39) 이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의 지시와 달리 하나님의 명령은 늘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785.2)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간절히 말씀을 연구하다가 기초적인 원칙과 고상한 행동 규범 혹은 직접적인 행동 지침을 발견하면 협박이나 수치를 당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깊은 자존감과 감사가 마음에서 흘러난다. 행위를 유발하는 것은 변덕스럽고 독단적이고 전횡적이고 몰상식한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임을 그들은 깨닫는다. 사랑이 악한 성향을 억누른다는 사실을 그들도 바울처럼 알게 된다(고후 5:14). (785.3)
 인간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같아질수록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 어린 행위를 더욱 더 드러 낼수록 결과에 대한 염려는 사라진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라는 외침에 삶의 초점이 표현되어 있다. 이어지는 단원에서는 그리스도인 생활양식을 위한 하나님의 안내를 성경에서 찾아보자. (7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