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승리가 개인의 삶에 실현되는 결정적 단계는 바로 회개하라는 부르심에 기꺼이 대답할 때이다(고후 5:20-21). 한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생겼던 거리는 이제 죄인과 죄 사이에 생겨야 한다. 이 거리는 저지른 행위에 대해 괴로워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삶의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는 갈망에서 생긴다. (781.1)
 이런 철저한 결심을 북돋는 요소가 여러 가지 있다. 첫째, 죄인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그분은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주신다(롬 8:32). 그분에게 기회를 드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능력과 권세에서 확신을 얻는다. 둘째, 죄인은 아무것도 지닌게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잃을 것도 없다. 셋째, 성령께 이끌려 평화와 용서를 얻은 사람이 많다는 증거는 가장 잠잠한 영혼에게도 확신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죄인이 자신을 돌이켜 죄로부터 멀어지면 또 다른 부르심, 다시 말해 예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듣는다는 사실이다. (781.2)
 2. 제자 되라는 부르심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이 부르심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죄인이 바쁜 일상속에서 부르심을 받는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에 기습적으로 침범하여 길을 막는다 둘째, 부르는 분은 예수님이다. 셋째, 그 부르심은 사실상 명령이며 긍정적 또는 부정적 대답 둘 중 하나만을 요구한다(눅 9:59-62). 넷째,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 예수와 함께 걸으면서 기왕에 가졌을지 모르는 방어수단은 버리라고 요구한다. (781.3)
 3. 믿고 순종하라는 부르심
 네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는 자신이 “즉시” 따라간 이유를 설명한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이다(요 1:41). 그리스도인은 믿기 때문에 순종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도 성립한다고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말한다. 즉 제자는 믿기 위해서 순종해야 한다. 순종과 믿음이 함께 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걸음은 결코 시작될 수 없다. (781.4)
 “우리의 도덕적 결함을 두둔하는 존재는 마귀뿐이다. 마귀는 ‘문제를 자꾸 늘어놓으라. 그러면 순종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도덕적 어려움을 부각시켜서 거기에 휘둘리고 노예가 되면, 자유하게 하는 행위인 순종에는 마음이 닫혀 버린다. 그 지점에서 바로 인간의 전적인 불경이 드러난다. ∙∙∙문제는 단 하나, 실제적인 순종이다.”(Bonhoeffer, 63). (781.5)
 순종과 믿음에는 보상이 많다. 그것은 메시아이자 구주이신 예수께서 요구하는 길이므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일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가장 잘 아신다. 그분은 인간처럼 시간, 공간, 지식에 제약받지 않으신다(잠 27:1). 덧붙여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그분은 무심하게 계시거나 우리를 무지와 무기력 속에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자녀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나타난다. 열렬하고 자발적인 순종의 결핍은 하나님과 더 깊고 진한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다는 증거인 경우가 많다. (781.6)
 4. 거룩하라는 부르심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거룩함은 구속의 최종적 목표다. “거룩함”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 생활방식에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적용된다. (782.1)
 a. 구별이라는 거룩함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출 3:5; 19:18, 24; 호 11:9) 다른 존재와 구별되고,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독립적이며, 피조물에게 무력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절박하고 비참한 상황에 대해 단절되었거나 무관심하지 않다(시 14:2; 잠 15:3; 마 10:29-31; 눅 12:6-7; 행 14:16-17). (782.2)
 거룩하라는 부르심은 욕망, 유행, 죄스러운 방식에서 분리되어 살라는 초청이다. 이것은 세상의 영향력에서 나오라는, 분리되라는, 벗어나라는 부르심이다(사 52:11; 고후 6:14-18). (782.3)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6)라며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해야 할 근본적인 분리를 단호하게 진술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분리되어 말씀으로 거룩해지고(17절) 그분에게 굳게 헌신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존재에는 타협하거나 상대적이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여기에는 어떤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했다(단 3:18). (782.4)
 거룩하라는 부르심은 ‘세상에 존재하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호소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 산 위에 있는 빛이라고 새로운 신분을 말씀하시면서 이 점을 강조하신다(마 5:14-16). 빛의 광채는 자신을 받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도 자기를 받들지 말아야 한다. 빛은 어둠에 삼켜지지 않는다(요 1:5). 그리스도인도 거룩한 생활양식의 빛으로 무지와 죄의 어둠을 꿰뚫어야 한다. (782.5)
 b. 도덕적 순결이라는 거룩함
 하나님의 거룩함은 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그분의 행위, 말, 계획, 관계에는 결함과 죄가 전혀 없다. 그분에게는 더러움과 악이 전혀 없다(사 5:16; 벧전 1:15; 요일 1:5). 그분은 도덕적 으로순결하시다. (782.6)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하라고 하면서 도덕적 순결의 삶으로 초청하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있나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마 5:8). 이 청결은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과 실존적 또는 행위적 영역 모두에서 나타난다. 본질적 영역의 중요성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설명하신다. 열매의 질은 나무의 종류와 상태에 달려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마 7:16-20). 아무도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얻을 수 없다. 온전하고 건강한 나무는 질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선한 삶은 인간 마음에 쌓인 선에서 자연스레 흘러나는 것이다(12:35). (782.7)
 하지만 인간은 시편 기자의 말처럼 죄악과 죄 중에서 태어났고(시 51:5) 거룩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데 어떻게 거룩하고 온전하고 고상하고 순결할 수 있을까? 악에 익숙한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렘 13:23).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예수님은 대답하신다(요 15:5). (782.8)
 여기서 칭의의 선물에 대해 상술할 수는 없지만 몇가지 핵심 요점이 언급되어야만 한다(참조 구원론 III). 성경에서는 품성 변화가 자연적인 선량함에서 생겨나며 그 선량함은 단지 확인과 적용이 필요할 뿐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자유주의 낙관론에서 비롯되었든지 인간의 잠재력에 관한 뉴에이지 사상에서 비롯되었든지 간에 인간 스스로의 변화를 옹호하는 가르침은 성경으로 보나 인간 경험으로 보아도 들어맞지 않는다. (7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