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이 눈을 뜨고 보니, 시체들을 건지러 온 배의 시체 더미 위에 있음을 비로소깨달았다. 배가 선창에 닿았을 때는 벌써 석양이 기울었고, 거적 위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고기에 물어뜯긴 시체들이 즐비하였다. 나도 시체로 건졌을 것이요 내 정신으로 돌아온 때는 5-6시간 이상이 경과했으니,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완전히 죽은 가운데서, 오로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것이다. 어찌나 물을 많이 먹었던지, 일어서서 소변을 보다 다리가 아파서 앉아서 보았다. (214.1)
 사고 당시, 어머니께서는 빨래를 하러 선녀산 뒤 냇가로 가셨다. 채 다 빨지도 못했을 때인데, 갑자기 안개 끼인 것같이 사면이 자욱해 오더니 수양산이란 큰 산이 떠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고 불길한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보니, 용당포로 가는 신작로에 사람들이 미어질 듯 몰려 가고 있었다. 집에 와서 들으니, 오늘 군함 구경 간 학생들이다 빠져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형님이 허겁지겁 용당포로 내려와 나를 만나보고 돌아가서는 이 소식을 전했는데, 어머니께서는 “영조가 살았어요! ”하는 소리가 곧이 들리지 않더라고 후일에 말씀하셨다. (214.2)
 300명 중 생존한 학생은 30명이 채 못 되었다. 시체 더미위에서 살아 나온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214.3)
 죽음 속에서 다시 불러 내시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올리며 그분의 영원하신 뜻과 계획에 몸바쳐 그의 영광을 위하여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나는 이때부터 생일 둘을 갖게 되었는데, 첫째는 이 세상에 태어난 7월 16일이요, 또 하나는 새로 살아난 생일 4월 11일이다. (214.4)
 4. 몸이 약하니 마도르스나
 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다른 아이들은 중학교를 간다고 하나, 집의 경제 사정도 그렇고 몸도 약하니 우선 뱃사람이 되어 몸이나 단련시키고 건강을 쌓아올리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황해도 옹진수산학교에 시험을 치러 갔는데, 그 때 나이가 13세였다. 학과는 무던히 한 것 같았으나, 신체 검사에는 시력때문에 결국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215.1)
 집에서 공부해서 다음해에 중학교에 진학하기로 했으나, 지혜로우신 선친의 배려와 주선으로 공립학교 6학년에 재수하기로 하였다. 물론, 몸이 약한 탓도 있어서 학교를 자주 빠져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였던 관계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중학교 입학 시험이란 뚜렷한 목표가 서 있어, 비로소 공부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 (215.2)
 낯선 친구들과 사귀는 것도 문제였지만, 시력이 약해서 아마 눈을 제대로 잘 뜨지 못하였던지 “자다 깬 놈”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런 것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공부에 열중했다. 그래서, 그 반에서 내 성적을 따라오는 애가 없었고, 나는 무어라 놀리든지 말든지 공부만 한다는 식으로 공부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215.3)
 이상하게도 전에 없이 몸도 건강하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로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였다. 어느덧 1년이 지나가고, 그리던 해주고등보통학교 교모와 교복은 나에게 만족을 안겨 주었다. (215.4)
 집의 형편이 펴이게 되자, 조밥은 밥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선망의 대상처럼 군림한 것이 이밥이었다. 그 때는 몰랐으나, 이것이 내게 각종 질병을 안겨 준 실마리가 되었다. 매일같이 변비로 시달리고 그때문에 치질마저 곁들여서, 대변 후에는 영락없이 출혈이 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위궤양 때문에 식사 후에는 통증에 시달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216.1)
 공부에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고, 봄 여름 가을이면 마라톤연습, 겨울이면 스케이트 타기에도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으며, 교내 하모니카 밴드에도 빠지지 않고 활약했다. 어느덧 5 학년이 되었다. 의학을 지망하기로 했다. 그것도, 동생들이 많았던 관계로 단기에 마칠 생각으로 4년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택했다. (216.2)
 시골 중학교에서 서울의 일류 전문학교 입학이란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각종 수험 참고서를 준비하고 시간 배정을 해보니, 하루 잠자는 시간은 3시간 밖에 안된다. 철통 같은 계획하에 수험 준비를 시작한 2주일간은 참으로 신나게 진행이 되었다. (216.3)
 따스한 4월 어느 봄 날, 물리 참고서를 공부하는 참인데, 1페이지를 읽었는데 무엇을 읽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되었다. 5-6차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저녁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뒤부터는 아무리 공부를 하려해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로맨틱하고 쎈티멘털하던 꿈 많던 감상의 세계는 내게서 완전히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남들이 웃어도 왜 웃을까 의아하고, 우는 것을 보아도 슬픈 감정이 없었다. 계속해서 2주일간을 한잠 자지 못하고나니 미칠 것만 같았다. (216.4)
 병원에 가보아도 신경 쇠약이라고만하고 별 신통한 치료도 없다. 한약방에 가도 단방을 하라는 말밖에 없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희망에 부풀었던 것도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이제는 낙오자가 되나보다. 수험공부는 다 틀렸으나 학교 성적은 우수하니 어디든지 무시험 입학하는데를 찾아보았다. 처음으로 고등상업학교(현 상과대학)에 원서를 냈으나 보기좋게 무시험검정에 불합격, 2차로 사범학교(현 사범대학)에 냈으나 역시 마찬가지다. (216.5)
 나에게는 모든 것이 이렇게 야속한가? 그러나, 실망은 하지 않았다. 쇠약해진 신경을 내 힘으로 회복시켜 보자, 중학교 입학 때도 1년 재수를 했으니 1년 재수하는 한이 있어도 먼저 건강을 되 찾자고 굳은 결심을 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냉수 마찰과 냉수 관주를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했다. 건강은 차차로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맨틱하고 쎈티멘털한 감정은 영원히 사라진 것만 같아 안타까왔다. (217.1)
 5. 내 일생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
 어느덧, 여름방학도 지나가고 가을이 되었다. 모두들 입학시험 준비에 바빴다. 그러나, 그것도 나에게는 한낱 지나간 꿈이 되고 말았다. 매일의 학과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고, 그 이상은 다만 운명에 맡길 따름이었다. (217.2)
 다정다감하던 중학교 생활도 거의 끝마쳐 갈 무렵, “이또”라는 선생이 부르더니 “너, 일본 가서 공부해 볼 생각 없어?”라고 넌지시 묻는 것이었다. 건강에 자신이 없던 터이라 거절하고 말았다. 이제 생각하면, 그 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217.3)
 졸업장을 들고 교문을 나서니, 앞이 막막한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실망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본래에 계획했던 의과입학 시험을 재다짐 했다. 앞으로 입학 시험까지 남은 한 달을 어떻게 하느냐 생각 끝에 무작정 상경해서 하숙집에 짐을 풀었다. 입학 시험에 대한 총정리를 시작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답안지를 받아 들고 보니, 내가 너무 높은 표준을 세워 놓고 지나치게 무리를 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17.4)
 문제는 신체 검사였다. 시력 검사에는 여지없이 불합격을 각오하고, 이제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앞에 걸린 시력표를 다 외어 버리고 말았다. 근시까지 겹쳐서 안경을 씼던 터이라 더욱 불리했다. 후문에 의하면, 시력 관계로 논란이 있었다하고, 입학생 80명 중 12번으로 무난히 입학이 되었던 것은 결코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2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