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의 건강 상태를 더듬어 봄으로써 질병의 배경을 살피고 현재의 고생하는 병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동시에, 앞으로 병 치료의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고 한걸음 더 나가서 개인 개인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붙이고자 하는 바이다. (210.1)
 이와같이, 만성 신부전으로 고생하는 개인마다 어렸을 때 부터 그리 건강한 몸이 아니었거나 어머니 젖을 중분히 먹고 자라지 못하고 우유에 의존했을지도 모르며, 차차 자라나는데 따라 육식을 즐겨했을 가능성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우유를 어린 시절에 강요당했기 때문에 과민성 체질(過敏性體質)이 되어 축농 때문에 고생했거나, 목감기나 편도선염을 자주 앓았거나, 관절 류머티즘에 시달린 일이라든지 충치 등의 경험은 거의가 다 공통적인 병력(病歷)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10.2)
 이 세상 만사가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원인 없는 병이란 결코 없는 법이다. 현재의 질병 치료에만 급급하는 나머지 원인에 대해서 매우 소흘히 하거나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병을 더욱 만성화시키거나 고질이 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210.3)
 병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비단 만성 신부전에 한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모든 병에 다 해당이 되며, 특히 만성 신부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일에 선후가 있듯이 병치료에 있어서도 먼저 할 일이 있어 순서를 가릴 필요가있다. 만성 신부전의 치료가 중요하듯이, 또한 갖가지 원인의치료함 없이 완전한 치유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210.4)
 1. 여러 가지 병으로 얼룩진 유년 시대
 엄마 등에 업혔을 때니까, 아마 한살이 못 되었거나 좀 넘었을까 한 나이였다. 무엇인가를 오른쪽 눈에 넣는 듯하더니, 참으로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엄마등에서 울면서 펄쩍펄쩍 뛰던 기억이 7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211.1)
 그 후에 안 일이지만, 각막게양(角膜遺場)이라고 흔히 말하는, 눈동자에 상처가 생겨서 그 곳이 하얗게 되었던 것이다. 소위 눈의 티를 벗겨 낸다고해서 때찐을 넣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도 아플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흐렸던 눈동자는 맑아졌으나, 오른쪽 눈은 영영 시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후일에 안경으로도 교정할 수 없는 부정난시(不正孔視)가 되고, 인생 항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시력이 완전했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오대양을 누비는 마도르스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211.2)
 여름이 오면 의례 연중 행사와도같이 한두 차례 학질 때문에 곤욕을 치르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뜨거운 햇볕은 여지없이 두 눈을 자극해서 눈물이 나고 눈이 시그러워서 뜰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이라 서늘한 고목나무 그늘에 누워서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에는 해마다 2-3개월 간 학교를 빠지곤 하였다. (211.3)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 같은 눈병에 시달려 안과를 찾았으나 별로 신통치 않아, 나 자신이 항알레르기성 약을 먹고 짙은 갈색 안경을 쓰면 감쪽같이 좋아지곤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내 체질은 산성 체질이며 과민성 체질임이 분명했다. 극심한 이질로 입원 치료를 하는가 하면, 장질부사로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번은 철봉에서 떨어져서 오른쪽 다리에 골절이 생겨서 석고 붕대를 하고 2 개월이나 휴학을 했다. 선비(先此)께서는 내 벗은 몸을 보실 때마다 “너는 왜 그리 갈비뼈가 앙상하냐”며 걱정을 하시곤 하였다. (211.4)
 2. 그 때가 낙원이었다
 중농(中農)은 되었으나, 조밥에 입쌀알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조밥을 먹고 자랐다. 어렸을 때 이름이 영조였다. 그래서, 별명이 좁쌀 영조였다. 어머니는 조밥 먹이는 것이 애처로와서 “너 조밥 먹는다고 하지 마라”고 당부하시곤 하셨다. 이제 생각하면, 그 때 이밥을 먹이지 못하고 조밥을 먹여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만일, 이밥을 먹고 자랐다면 건강은 더 좋지 않았을 것이며, 산성 체질은 더욱 허약을 부채질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12.1)
 봄이면 산나물, 밭나물, 냉이국과 애탕국이 일미였다. 냉이나물이나 국은 위장을 튼튼하게 해주었고, 애 탕국은 간장을 강화시켜 주었다. (212.2)
 산골짝에서 싱아도 캐먹고 높은 봉우리에서 뻐꾹이도 꺾어 먹어 피곤한 봄철에 식욕을 돋구어 주기도 했다. 학교 오가는 길 논두렁에서 삘기도 뽑아 먹어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도 보충했다. 밭을 갈기 전 메를 캐서 밥에 두어 먹던 일, 두릅(沙蓄)을 캐서 씹던 일, 이 모든 것은 각기 그 나름대로 부족하기 쉬웠던 비타민과 광물질을 보충해 주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212.3)
 여름이 지나갈 무렵엔 복숭아, 배를 집의 과수원에서 싱싱한 것 마음껏 먹었고, 가을이 오면 뜰 앞의 대추나무, 뒷뜰의 밤나무, 감나무들이 늘 몸의 원소들을 아낌 없이 제공해 주었다. 이른 새벽, 무우밭에서 마음껏 살진것 뽑아 껍질 벗기고 먹던 그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무우 속의 비타민, 소화 효소 디아스타제 등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꿀을 기를 때마다 꿀송이채 씹어먹고 나면, 밀초는 껌에 비길 바가 아니다. (212.4)
 이 모든 것은 아득하게 지 나간 꿈이요 낭만이었고,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요 싱그러운 시였다. 참으로 그 때가 낙원이었다. (213.1)
 3. 송장 더미 속에서 불러 주신 생명
 1923년 4월 11일이라면 이른봄이다. 항해도 해주항 용당포 앞바다에 일본군의 구축함이 정박하고 있었다. 구경하기 위해서 해주 의창보통학교 전교생과 다른학교 학생 등 300여명이 돛을 세개나 단 배 하나를 타고 나섰다. 해변에는 두꺼 비가 발딱 나가자빠져 있어 배의 파선 사고가 생기니 오늘은 배를 부리지 못한다는 것을 설득해서, 기어이 배를 탔다. (213.2)
 돛 세 개를 다니 어찌나 빠른지, 먼 산이 어른어른할 정도였다. 돛을 거둬내릴 새도없이 배가 군함과 정면 충돌을 하고 말았다. 배 밑에 구멍이 뚫어지고 물은 폭포수같이 올라왔다. 그러자, 강풍이 불어닥쳐,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213.3)
 학생들이 저마다 살려 달라고 하늘을 향해 빌고 이리저리 갑판에서 헤매고 있을 무렵, 바람이 내 모자를 날려 버렸다. 죽는다 사는다하는 판에 모자 찾으러 다녔다면 곧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열 한살 나이로서는 어린 편이었다. 드디어, 배는 아우성 속에 중심을 잃고 뒤집어 엎어지고 말았다. 마치 밤 삶아서 자배기에 띄워 놓은 모양으로, 물 속에서 머리만 남실거렸다. (213.4)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엎어진 배 위에 휘감긴 밧줄을 타고 배로 올라가 보려고 온갖 힘을 다 썼다. 그런데, 줄 위를 붙잡았던 학생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바다 속 깊이 떨어져 들어갔다. 그래도 손에 쥐고 있던 도시락 주머니를 붙잡은 채 허우적거렸다. 그렇게 하기를 세번째, 손에 쥐었던 주머니를 버린것까지는 생각이 나고 집의 풍경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때가 아마 열한시 정도 되었을 무렵인 것 같았다. (2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