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2 장 재림소망의 등한
 2. 성서적 실재론(사실주의)
 구약 성경. 구약 성경에서 주님의 오심에 의해 시작되는 최후의 구원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요 이 세상에서의 변화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사 65:17) 공간 어딘가에 멀리 있는 어떤 불합리한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본래의 완전함으로 다시 새롭게 될 현재의 하늘과 땅이다.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사 32:15)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할”(사 11:6) 것이다. (232.1)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가 매우 좋았다는 7중 선포로 시작한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하나의 기념물로서 거룩하게 제정되었다. 이 평화와 조화, 물질적 번영과 최초의 안식의 기쁨—창조 후, 아담의 첫째날—들은 구약 성서 시대에서 장차 올 세계에 대한 일반적 용어인 마지막 날의 범례(凡例)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 (232.2)
 신약 성경. 신약 성경의 하나님의 새 세계에 대한 이상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이상과 같다. 신약의 저자들은 영광스럽게 된 영혼들이 흰옷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수금을 타며, 기도하며, 구름을 쫓으며, 불멸의 젖을 마시면서 영원히 보내게 될 천상 세계를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 재림을 통하여 순결하게 되고 변화되고 완전하게 될 이 유성에 대해서 말하였다(벧후 3:11~13; 롬 8:19~25; 계 21:1). (232.3)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썩어짐의 종노릇”(롬 8:19~23)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현재의 인간과 그에게 속한 피조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약 성서에서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재림 때에 들어갈 이 새 땅은 어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원래의 완전함으로 회복된 이 땅과 하늘이다(계 21:1~4). (232.4)
 참된 세계. 신자들은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부활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새 땅에 들어간다(계 20:5; 요 5:28, 29; 살전 4:14~17) 부정한 그 어떤 것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지만,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올 것이라 ∙∙∙ ,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다”(계 21:24, 26)는 말을 듣게 된다. 이 구절은 사람의 발명과 예술적이며 지적인 솜씨가 이룩한 것을 포함하여 옛 하늘과 땅에서 참된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영원한 질서 안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시사한다. 꼭맞는 “그 도시”의 인상은 활동성, 활력성, 창조성, 그리고 진정한 우정의 사상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232.5)
 성경에 묘사된 이러한 근본적인 하나님의 새 세계의 지상적 개념이 천상적이고 영화로운 하늘로 생각하는 대중화된 경건한 곳으로 대체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그러한 사건을 이 땅 위에서의 그들의 진정한 생활이 종식되는 것으로서 잘못 인식하고 분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무관심하도록 만들어 왔다. (232.6)
 결 론
 본 간단한 연구는 여러 요인들이 재림의 소망에 대해 편만한 무관심과 경시 풍조를 조장하는데 기여해 왔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232.7)
 인본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 결정될 미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인 자원을 통해 실현될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하였다. 이 인본주의적 사고 방식은 재림을 사회의 형편을 개선시키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또는 미래에 실제로 있을 경험을 현재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233.1)
 물질주의적 관념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현재의 경제와 기술이 가져다준 소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찾도록 유혹하였다. 이 이데올로기는 문자적이며 인격적인 재림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의주의나 경멸의 태도를 낳게 했다. (233.2)
 천년 왕국, 휴거, 재림 징조의 의미, 무조건적인 영혼불멸설, 교회와 예배의 본질과 재림의 지연 등, 이 모든 개념에 대한 상반된 신학관들은 모두 그들 나름대로 재림의 소망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하였다.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에 대한 성서적 언급들을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의 임재의 현재적 경험과 더나은 미래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로 대체함으로 재림 소망이 시들어지고 없어져 버리게 하였다. (233.3)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한 시간표나 파루시아를 전후한 사건들의 순서를 공식화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재림의 소망을 약화시켜 왔다. 그러한 관심은 종종 구속의 완성, 하나님의 공의의 옹호, 주님과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들 가운데 동료 신자들과의 영원한 교제가 실현되는 것에 대한 참된 소망보다는, 모든 다른 사람들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는 독선적인 엘리트의 조급성만을 더 한층 드러내었다. (233.4)
 재림의 소망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친구들과 원수들 양편에서 수난을 당해 온 것은 이 진리가 대단히 중요함을 나타내 준다. 한편으로 복된 소망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취급되거나 혹은 부 정되거나 경멸당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는 현재의 동기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233.5)
 만약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현재적 경험이 미래에 있을 이 세상의 악인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인류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은 실패이며, “우리는 모든 불쌍한 자 중에 가장 불쌍한 자”(고전 15:19)이다. 재림 소망에 대한 편만한 나태와 경시의 풍조는 우리를 좌절시키는 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위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일하고, 고대하며 기다리기 위한 우리의 책임을 심화시켜 주는 역활을 해야 한다. (233.6)
 각주
 1. Hendrikus Berkhof, Well-Founded Hope(Richmond, Virginia, 1969), p. 85.

 2. Emil Brunner, Eternal Hope(London, 1954), p. 25.

 3. Ibid., p. 25.

 4. Ibid, p. 25.

 5. John C. Bennett, “A Theological Conception of Goals for Economic Life,” in Goals of Economic Life, ed. A. Dudley Wary(New York, 1972), p. 416.

 6. J. E. L. Newbigin, Mission Under the Cross(London, 1953), p. 111.

 7. T. A. Kantonen, The Christian Hope(Philadelphia, 1954), p. 73. The author offers a concise review of the various existential interpretations of the Second Advent. Also A. L. Moore, The Parousia in the New Testament (Leiden, 1966), pp. 1~2.

 8. Georgia Harkness, “Progress in Eschatology,” Christian Century(January 14, 1953), p. 45.

 9. Rudolf Karl Bultmann, “NT and Mythology,” in Kerygma and Myth, ed. Hans. Werner Bartsch(London, 1961), vol. 1, p. 38.

 10. Paul S. Minear, Christian Hope and the Second Coming(Philadelphia, 1954), p. 206.

 11. T. A. Kantonen(n. 7), p. 73.

 12. 천년기에 대한 주요한 견해들의 간략한 고찰을 위해서는 Robert G. Clouse 에 의해 편집된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Downers Grove, Illinois, 1977) 과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Grand Rapids, 1979) pp. 173~193을 참조하라.

 13. J. E. Fison, The Christian Hope(London, 1954), p. 128.

 14. 휴거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의 간략하고도 세련된 고찰을 위해서 Gleason L. Archer, Paul D. Feinberg, Douglas J. Moo, and Richard R. Reiter, The Rapture:Dre-, Mid-, or Post—Tribulational ?(Grand Rapids, 1984)을 참조하라.

 15. Timothy p. Weber, Living in the Shadow of the Second Coming(Oxford University Press, 1979), p. 15.

 16. 린제이(Hal Lindsey)의 자극적이고 무의미한 종말 시나리오의 분석을 위해 사무엘레 바키오키(Samuele Bacchiocchi) Hal Lindsey’s Prophetic Jigsaw Puzzle:Five Predictions that Failed!(Berrien Springs, Michigen, 1985)를 참조하라.

 17. Timothy B. Weber(n. 15), p. 183.

 18. C. H. Dodd,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London, 1936), p. 174.

 19. J. E. Fison(n. 13), p. 63.

 20. Emil Brunner(n. 2), p. 12.

 21. “만약 임시적인 질서가 하나님의 옹호하심을 볼 수 없다면 시간과의 그의 실험은 실패하게 된다” 라고 막스 와렌(Max Warren)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22. 천주교 신학자들 사이에는 몸과 분리된 실체로서의 영혼의 전통적 개념을 거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피카엘 심프슨(Michael Simpson)의 The theology of Death and Etermal Life(Hales Comers, Wisconsin, 1971), p. 64을 참조하라.

 23. G. C. Berkouwer의 The Return of Christ(Grand Rapids, 1972), p. 34에 인용된 같은 견해가 Russell Foster Aldwinckle에 의해 Death in the Secular City(London, 1972), p. 82에 제시됨.

 24.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Philadelphia, 1964), p. 234.

 25. Edward Schillebeeckx, The Mission of the Church(New York, 1973), p. 45.

 26. J. E. Fison(n. 13), p. 65.

 27. Oscar Cullmann(n. 24), p. 147.

 28. Ibid, 또한 A. L. Moore, The Parousia in the New Testament(Leiden, 1966), p. 64을 참조하라.

 29. Stephen Travis의 I Believe in the Second Coming of Jesus(Grand Rapids, 1982), p. 176에 인용됨. (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