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2 장 재림소망의 등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주의 만찬 의식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제도라는 교회의 과대 평가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장래에 강림하시리라는 기대감으로부터 신자들을 돌아서게 한 또 다른 요인으로 간주되어졌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이미 임재해 계신다면 모든 것은 교회 안에서 성취되며 파루시아의 기대에 대한 어떤 효과적인 여지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229.4)
 교회의 신성화. 논리 정연한 천주교 신학자인 에드워드 실레빅스(Edward Schillebeeckx)는 교회의 절대성을 예증하였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구속사를 가시적으로 완성하며, 세계와 세계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계시, 혹은 현현(顯現)하여 완성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이다”25고 기록하고 있다. (229.5)
 제이 이 피슨(J. E. Fison)이 옳게 기록한 대로 가톨릭 뿐만 아니라 영국 성공회의 이념에 특징이 되는 교회의 성례전에 대한 견해는 때때로 사실상 교회를 신격화하는 것이며 그것의 지상에서의 실체를 은혜의 실체로 바꾸도록 유도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미래의 종말론에 대한 신앙은 말 뿐이며 개인의 불멸의 소망에 관한한 참된 것일 수 있으나, 그것은 성서적 의미에 있어서 교회나 혹은 세상을 통합하려는 소망에 있어서는 거의 무의미한 것이다.26 (229.6)
 2. 현재에서 기대하는 미래
 오스카 쿨만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미래라고 말하는 것들이 가톨릭 사상에 의해 상당히 현재로 옮겨졌다” 27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천년 왕국(계 20:4)을 교회 시대로 해석하는 가톨릭의 해석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파루시아의 기대를 시들게 하는데 기여해 왔다. 쿨만은 이렇게 발전하게 된 예를 “교황청의 행정 총회의 결의”(1944년 7월 29일)에서 발견한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가시적 강림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의무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그리스도의 강림이 더 이상 ‘확실한 것으로 가르쳐질 수 없다’).”28 (230.1)
 적절한 균형의 필요.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재림의 소망에 대한 로마 천주교회의 견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이고 불가시적인 임재와 그의 미래의 파루시아의 때에 육체적이고 가시적인 영광스런 나타나심 간의 적당한 균형을 유지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마 28:20) 그의 현재적인 임재의 실재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가 아직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230.2)
 그리스도의 임재의 완전한 실재는 그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이해되고 경험될 것이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 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심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참조, 골 3:4)라고 기록하였을 때 이 진리를 감명 깊게 표현하였다. 이 새로운 실체를 파루시아의 때에 목격되고 경험될 현재의 교회 세대로 옮기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오로지 재림 소망을 점진적으로 포기하는 결과만을 낳게 될 것이다. (230.3)
 VII. 먼 재림의 거짓 안전
 1. “먼 미래”의 철학
 재림 소망을 잘못 위치시키거나 그릇된 신학적 견해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먼 미래라는 견해에 기초한 거짓 안전감에 의해서도 약화된다. 그리스도의 문자적 재림을 믿지만 먼, 그리고 거의 무관한 미래에다 그것을 위치시키는 거짓 안전감과 부주의 가운데서 시간을 보내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다. 어리석은 청지기처럼 그들은 심중에 “나의 주인이 더디오 시리라”(눅 12:45)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직도 어느 정도 먼 미래에 있다는 잘못된 가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230.4)
 첫째로 그들은 주님이 없는 동안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생애를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활동으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다. 주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생각할 때는 세속적 관심이 우세하고 주께서 가까이 이르렀다고 느껴질 때는 거룩한 관심이 우세하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오심이 가깝다는 자각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도록”(딛 2:12) 촉구한다. (230.5)
 2. “시간이 풍부하다”는 철학
 두번째의 거짓된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일들을 시정할 많은 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은 내일이 오늘의 잘못을 쉽게 시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것이다. 더욱이 시간 요소에 의존하는 사람은 주님의 강림에 대해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나타낸다. (231.1)
 결과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전야에 자신의 생활 모습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분의 파루시아를 그의 목표와 열망을 성취시키는 것보다는 붕괴시키는 사건으로서 간 주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견해는 그 사람이 아직도 구원과 주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머나먼 파루시아의 거짓된 안전감 아래서 사는 것은 재림의 소망을 생명력 없는 원리와 메마른 교리로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231.2)
 VIII. 새 세계에 대한 오해
 공중 어딘가에 영혼들이 영원히 노래하고 기도하는 영적 은신처가 있다는 일반적인 낙원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대를 약화시켜 왔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강림 때에 세우실 새세계가 아름답지만 비실제적인 장소요, 또 현실 세계의 확실한 기쁨이 모호한 경배와 묵상이 있는 곳으로 바뀌는 곳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려워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재림은 이 현상 세계가 그들에게 준다고 느끼는 전율과 흥분을 향한 그들의 소망이 끝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31.3)
 1. 천상의 낙원
 시인 라우리에 리(Laurie Lee)는 그의 수필 “낙원”에서 현대인의 마음속에서 낙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얼마나 불만족스런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곳은 너무나 순결하고 정결하며 자선의 행위들이 너무 많아서 신자들로 하여금 큰 흥미를 갖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반면에 지옥은 행위의 90퍼센트가 짙은 색깔, 높은 온도, 야릇한 악마 그리고 언제나 사귈 수 있는 동료가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29 (231.4)
 대도시의 정경과 소리를 사랑하는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수도원적인 평화와 고요함이 영원히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 곧 “영광과 끝없는 기쁨의 맨숀(mansions)들이 있는 그 곳, 곧 찬란한 하늘에서 영원토록 당신을 경배할” 영적 세계를 설립하기 위해 속히 오실 구세주의 계시는 거의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231.5)
 이 막연한 천상의 낙원에 대한 이상은 성서적 가르침보다는 헬라 철학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이미 주목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물질적인 구성 요소들은 악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생존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철학의 목적은 물질적인 몸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영혼이 영원한 축복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약과 구약 성경은 모두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에 있는 이원론(dualism)을 거부한다. (2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