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2 장 재림소망의 등한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핵심은 “그의 영광스런 강림의 날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주를 만나는 것”(딛 2:13)이다. 요한은 기록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요일 3:2) 하였다. 이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만남은 사랑하는 자들의 여행의 끝이 될 것이며 주님과 동료 그리스인들과의 새롭고 더욱 친근한 관계의 시작이다. (227.3)
 주님과의 마지막 만남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은 목적 없는 길을 여행하는 순례자와 같은 것이다. 에밀 브룬너가 감명깊게 말한 것처럼 “파루시아를 기대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현금 지불이 안되는 수표요 성의 없이 이루어진 약속이다. 파루시아를 기대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도달점 없는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허무하게 끝난다.”20 구속의 완성과 절정을 미래보다는 현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일시적인 이 질서가 결코 하나님의 옹호를 받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창조적이고 구속적 행위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21 (227.4)
 V. 개인의 불멸
 1. 참된 재림의 소망이 없음
 개인의 영혼이 사망 후에 완전한 지복의 상태(하늘)나 혹은 계속되는 형벌의 상태[지옥(hell)] 혹은 정결을 위한 중간 상태[연옥(purgatory)]로 즉각적으로 옮겨지리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대를 크게 약화시켰다. 사망 후 몸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의 영혼이 생존해 있다는 믿음은 로마 천주교뿐 아니라 많은 복음주의 교회와 특수 교파로 알려지기를 원치 아니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227.5)
 즉시 낙원으로 감. 영혼 불멸(생존)에 대한 믿음이 재림에 대한 기대를 얼마나 모호하게 하고 빛을 잃게 하는지는 알기 어렵지 않다. 만약 사망시 신자의 영혼이 즉시로 주님께로 가고 그 리하여 완전한 지복과 하나님과의 교제와 평화와 안식을 즐길 수 있다면 잠자는 성도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22 기껏해야 파루시아는 하늘에서 이미 분리된 영혼에게 육체를 부여함으로 하늘의 지복을 강화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질 수 있을 뿐이다. (228.1)
 연옥에 대한 관심. 정결케 하는 연옥의 형벌에 대한 관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별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옥의 고통에서 낙원의 축복으로 신속히 옮기도록 그들을 돕고 염려하며 일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그러한 관심은 재림을 위해 개인적으로 준비하지 못하도록 한다. (228.2)
 연옥의 일시적 형벌은 그리스도의 강림시의 마지막 심판의 의미와 필요성을 모호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고대하며 간절히 사모하기”(벧후 3:12)보다는 그들의 사랑하는 자가 연옥의 고통으로부터 낙원의 축복으로 신속히 옮겨지도록 노력하며 열심히 기도하도록 격려를 받는다. (228.3)
 2. 개인적인 생존
 이러한 가르침들은 성경과 무관할뿐 아니라 사후에 개인의 즉각적인 축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고무시키며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주님의 강림 때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실현되어야 할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그리고 공동의 구원을 위한 소망을 배후에 삽입시킨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에 의해 기록된 대로 이 믿음의 궁극적 결과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죽음 너머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23 것이다. (228.4)
 즉각적인 낙원. 사망 후 영혼의 생존을 믿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비록 육체로부터 분리된 심리적인 형태 속에서라도 즉시 낙원에 도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강림과 육체의 부활 및 시간에 대한 어떤 관심이나 흥미를 남겨 두지 않는다. (228.5)
 즉각적인 불멸에 대한 이러한 개인주의적 소망은 창조와 피조물(롬 8:19~23; 고전 15:24~28)의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성경의 공통된 소망을 무시한다. 참으로 중요한 이 미래가 사망 후에 개인의 생존하는 때라면 인류의 고민과 문제는 단지 주변적인 관심만을 가지게 되며 전 세계를 위한 구속의 가치는 거의 무시되어 버린다. (228.6)
 3. 헬라 철학
 사후의 육체로부터 분리와 심리적인 생존의 개념은 성서적 사상이 아닌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몸의 부활은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인 몸은 영혼보다 가치가 적었으며 결과적으로 생존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적 사고에서는 몸은 영혼을 위한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전으로서 창조와 부활의 가치가 있다. (228.7)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오직 헬라인들의 죽음의 개념에서 볼 때만이 사람의 영혼 불멸에 대한 교리가 가능할 수 있다. 반면에 부활의 신앙은 성서적 기초 위에서만 가능한데 그 곳에서 사망과 사망 후에 계속되는 생명은 자연의 유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여기서는 강력한 권세들이 투쟁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나올 때 기적이 필요하다 ∙∙∙ .부활의 소망은 창조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한다. 또한 하나님은 몸의 창조자이시므로 성경에서는 헬라의 사상과는 반대로 부활은 몸의 부활이어야만 한다”24라고 기록한다. (229.1)
 4. 올라가는가, 내려오는가?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은 적어도 사람의 일부에서 실존 의식은 잃어버릴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불멸을 뜻한다. 그러한 신조는 자기 자신과 또 영혼이 주님께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을 격려한다. 반면에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분리된 영혼이 주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오히려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산 자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이 주를 만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믿는 대신 육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229.2)
 파루시아는 개인의 영혼들이 그에게 올라가는 것보다 인류에게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는 사건에 의해 실현될 마지막 완성을 강조한다. 재림의 소망은 그대의 사망시에 있을 유토피아가 아니요, 그의 파루시아의 영광스런 날에 이 땅 위에서 몸을 가진 성도와 성육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참된 만남이다. 이 참된 만남으로부터 인성과 본질에 미치는 변화가 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큰 기대는 사망 즉시 있을 개인의 불멸과 하늘의 복락에 대한 신앙에 의해 모호해지고 사라지게 되었다. (229.3)
 VI. 교회와 그 예배
 1. 교회의 성례전적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