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2 장 재림소망의 등한
 이와 같은 각본은 소련이 이집트의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1967년 전쟁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 긴장이 감돌던 1970년대 초반의 사건과 공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늘날 린제이의 각본은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외교 및 경제 관계를 수립하고 소련의 외교관과 고문관들이 이집트로부터 추방된 이후로 실현이 불가능해졌다.16 (225.1)
 아마 만약 린제이가 그 책을 오늘날 다시 쓴다면 예언상의 남방왕을 모스크바와의 현재의 밀착으로 인해 리비아로 만들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종류의 독단적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인격적으로 재림하시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을 기발한 풍자나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이용하기를 극히 좋아하는 비평가들에게 도움을 줄 뿐이다. (225.2)
 3. 미래를 탐지함
 미래를 탐지하고 마지막 사건들의 연대기적 시간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재림 징조의 해석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행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보고 믿기 위해”(요 6:30) 표적이 요구될 때 표적에 대한 그러한 추구는 믿음과 다툼을 일으키는 데 왜냐하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막 8:12)고 말씀하시면서 표적에 대한 요구를 거절하신 이유이다. (225.3)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왕국의 표적들을 고대하라고 말씀하셨다(눅 21:28, 29; 막 13:28, 29). 이 분명한 모순은 믿음과 표적이 균형 속에서 유지되어야만함을 인정함으로 해결된다. 보는 것이 믿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배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표적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보는 것을 믿음보다 중요시 함으로 균형을 깨뜨린다. (225.4)
 인격적인 구주, 비인격적인 사건이 아님. 시기 추정이 불가능한 사랑의 세계 보다는 시기 추정이 가능한 사건의 세계에 임박한 재림의 확신의 기초를 놓는 것은 인격적 구주가 아닌 휴거와 심판, 천년 왕국과 같은 비인격적 사건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225.5)
 휴거와 같은 사건을 기다리는 것은 두려움과 적개심, 심지어 무관심을 일으킬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강림을 생각하면서 흥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모토 태도들(흥분, 두려움, 무관심)은 재림의 소망의 실체와 가치를 모호케 하는 경향이 있다. (225.6)
 4. 자아 생존을 위한 관심
 종말적 사건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현질서가 너무나 소망이 없기 때문에 사회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헛된 것으로 간주한다. 종종 미래를 조종하고 싶어하는 그들의 관심은 그들의 현재를 수습하는 것에 대한 무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 징조를 찾는 자들의 관심은 그들과 그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남은 인류에게(내적 집단 외의 사람들) 미치는 재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의 환영 할만한 성취로서 취급되어 진다. (225.7)
 이러한 사회적 양심의 결여는 비평가들에 의해 임박한 재림을 믿노라고 공언한 결과로 해석된다. 티모디 P. 웨버(Timody P. Weber)는 “어떤 전천년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이 세상 가운데서 일할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그러한 현질서에 대한 소망 없는 견해를 지지한다”17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분석에서 볼 때 재림의 기대에 대한 광신주의는 재림 소망의 선포와 경험을 불신자들의 조소에 노출시켜 그 토대를 약화시킨다. (226.1)
 IV. 현존의 삶
 광신적인 집단이 시기, 현대의 사건들, 역설적인 미래의 정치적 발전 등과 같은 주변적인 요소들에 집중함으로 재림의 소망을 약화시켜온 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현재적 경험과 미래의 우주적 구속을 희생시키면서 개인적인 불멸을 강조하므로 재림 소망을 무기력하게 하여 왔다. (226.2)
 1. 구원의 현재적 경험
 이 강조는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의 신학적인 전통 속에 현존한다. 그들의 정통적인 신학 논문들을 한번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종말론, 특별히 재림을 연구하는 일에 거의 무관심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는 기독교의 중심이 구원의 현재적 경험과 개인적인 영혼의 불멸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신학적 전통들은 그분의 재강림으로 성취될 모든 것들의 최후의 우주적 회복 속에 현재적 구원을 관련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226.3)
 실현된 종말론. 이런 신학적 추세는 “실현된 종말론”으로 알려진 해석 학파에 반영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의 왕국을 실현하셨다고 주장한다. 그의 부활은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마지막은 이미 도래하였으므로 문자적인 미래의 그리스도의 강림은 없다. 이 학파의 대표적 주석가인 C. H. 도드(C. H. Dodd)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 가운데서 소망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대적 경험 속에서 주어졌다”고 기록하였다.18 (226.4)
 2.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
 그리스도의 미래적 파루시아를 무시하는 반면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 가운데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인식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 5:25)는 공식에 의해 이 긴장을 설명한다. 3장에서 기록한 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현재적인 경험과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구원의 미래적인 완성 사이에 존재하는 심오한 통일적 의미를 성령의 사역을 통해 표현하고 경험하였다. (226.5)
 앞을 내다보지 않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졌다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소망(고전 13:13),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계에 결여되어 있는 한 덕목의 신경(神經)을 잘라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바울이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고전 15:19)가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J. E. 피슨(J. E. Fison)이 웅변적으로 묘사한 것처럼 “전체로서의 세계나, 세계 속에 있는 구원받는 공동체들이 앞으로 더 나은 것들이 올 것이라고 모호하면서도 혼란스런 낙관주의 속에서나 혹은 고도로 개인주의화된 복스런 이상의 개념 속에서, 개인의 영혼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계 앞에 놓여 있는 경이의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19을 의미한다. (227.1)
 3. 미래는 현재를 결정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날에 미래의 주님과의 가시적 재결합을 부인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현재적 임재를 믿는 것이 참으로 가능한지를 의아해 한다. 그리스도의 비가시적 임재의 현재적 경험은 주님과의 미래의 가시적 만남에 대한 소망에 의해 성장해 가지 않는가? 셰익스피어의 말, 곧 “여행은 사랑하는 자들의 만남에서 끝난다” 란 말은 낭만적 사랑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소망의 진수에도 적용된다. (2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