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2 장 재림소망의 등한
 그러나 인본주의적 영향은 재림 소망을 무기력하게 한 유일한 부정적 요소는 아니다. 이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상반된 신학적 해석들이 또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으므로 그것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자 한다. (222.6)
 제 2 부 신학적 영향
 재림의 시기와 방법과 목적에 대해 널리 유행하고 있는 상반된 교리적 견해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혼돈시켜 왔다. T. A. 칸토넨(T. A. Kantonen)이 말한 대로 그 결과로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대해 관심을 잃어 버리게 되었고 그것들은 세상에 다가올 사소한 것들을 예보하는 수정구슬같이 성경을 사용하는 점장이들에게로 돌아섰다. 아마도 몇몇 교리적인 입 장들은 무의식적으로 재림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약화시키거나 혼돈시켰다.”11 이 교리적인 가르침 중 일부를 간단히 고찰하게 될 것이다. 이 연구가 그들의 재림의 소망의 바탕에 깔린 잘못된 가르침들을 인식하고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222.7)
 I. 천년기에 대한 논쟁
 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기간—천년왕국으로 알려짐-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이 그리스도 인들을 서로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 재림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들을 의심스럽고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222.8)
 전천년, 후천년, 무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전천년(pre-millennial), 후천년(post-millennial), 혹은 무천년(non-millennial) 중 어느 것에 있을 것인지에 대한 상당한 불일치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존재한다.12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은 각 천년설의 장단점을 논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천년기전 혹은 후에 혹은 무천년에 오실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파루시아 그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을 일으켰는지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파루시아와 천년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상충하는 견해들은 재림의 교리 그 자체에 대한 혼란을 나타낸다. 더욱이 결과적으로 온 세상이 기독교화 될 무한히 긴기간 후(후천년설)나 유대인들의 회개(무천년설)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놓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임박한 기대감에 대한 의미를 거의 가질 수 없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믿을 수 없으리 만큼 긴 것을 미리 안다면 어떻게 신자들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벧후 3:11)” 하도록 고무될 수 있겠 는가? J. E. 피슨(J. E. Fison)은 “파루시아를 천년기의 시작 전에 두는 것이 천년기 끝에 파루시아가 있을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결여된 재림의 소망을 더욱 고무시는 것이 입증되는 것”13을 보았을 때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 관찰들은 어떤 천년 왕국설은 재림 소망을 약화시키는 역활을 하였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223.1)
 II. 휴거에 관한 논쟁
 재림 소망을 무기력하게 하는 또 다른 신학적 논쟁은 마태복음 24장 29절부터 31절에 언급된 이른바 교회의 휴거와 대환란과 그리스도의 재림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휴거라는 용어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라틴어 번역판인 벌게이트)에 사용되었고 영역에는 “위로 취하여 감”(caught up)로 번역된 라피오(rapio)라는 라틴어 동사로부터 유래 되었다. 신학적으로 그 용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교회를 옮기는 것을 묘사한다. (223.2)
 논쟁의 본질. 그 논쟁은 교회의 휴거의 시기에 집중된다. 어떤 사람들은 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날 것으로 믿으며 그리하여 전환난주의자(pretribulationists)로 알려진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휴거가 환난 중간에 일어날 것으로 믿으며 그리하여 중환난주의자(midtribulationists)로 알려진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는 교회의 휴거가 환난 후에 일어날 것으로 믿으므로 그들은 후환난주의자14(posttribulationists)로 알려진다. (223.3)
 부정적인 영향. 우리의 즉각적인 관심은 이 세 다른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교리에 대한 그것들의 부정적인 영향을 주목하는 것이다. 휴거와 환난과 부활이 언제 또 어떻게 일어 날지를 해결하는 것에 몰두한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 확실성 때문에 기뻐하기 보다는 미래의 신비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다. 재림에 관한 예언의 목적은 앞서 주지한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끄는 사건들과 이것을 뒤따르는 사건들의 정확한 순서를 알기 위한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길러주는 것이다. (223.4)
 사실과 목적. 교회의 휴거에 대한 언급에서 바울이 그 시간장소를 강조하지 않고 그 사실목적을 강조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 사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산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주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이끌려가는 것이다(살전 4:17). 여기에는 휴거가 환난 전에나 혹은 후에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어떤 언급이나 암시도 없다. (223.5)
 그 목적“공중에서 주를 만나 우리가 주와 항상 함께 있는 것(살전 4:17)”이다. 강조점은 만나는 장소나 만난 후에 있을 일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주님과의 만남의 사실에 있는 것이다. 이 주님과의 재결합이 공중에서 혹은 땅에서 혹은 하늘에서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어떤 지시도 주어지지 않았다. 성경으로부터 근거없는 결론을 추정하려는 시도는 재림의 소망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224.1)
 일부만을 위한 복된 소망. 주께서 회심하지 않은 자를 7년 대환난을 겪도록 여전히 땅에 두시는 반면 환난 전에 부활하여 변화된 성도들을 은밀하게 휴거시켜 하늘로 데려가시리라는 가르침은 주님의 강림의 공평성과 결과와 역할에 대해 의문을 일으킨다. 전환난주의자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대로 휴거가 복된 소망이라면 대환난을 겪어야 할 사람들은 그들을 지탱해 줄 복된 소망이 없다. (224.2)
 왜 그리스도께서 처음에는 은밀히, 다음에는 공개적으로, 처음에는 일부를 위해 다음에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을 위해 처음에는 공중에 그 다음에는 땅에 오셔야 하는가? 7년의 기간과 함께 그리스도의 재림의 인위적인 이중성은 재림 소망을 불확실하다는 조소에 노출시키는 것이 아닌가? 재림 소망이 그것의 문자적인 미래의 성취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직접적인 공격뿐만아니라 그 성취를 받아 들이고 고대하는 보수주의적 저자들의 간접적 노력에서까지 고통을 받는 것은 유감스런 것이다. (224.3)
 III. 자의적인 예언 해석
 1. 시기를 정함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것과 종말로 이끄는 사건들을 예보하는 일에 몰두한 사람들의 병적이고 때로는 우습기 조차한 광신주의는 번번히 재림의 소망을 조소와 비평에 노출시켰다. 2세기의 몬타누스주의자들로부터 20세기의 할 린제이와 같은 몇몇 세대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끄는 시기와 사건을 예언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해 왔다. 그들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은채 지나가면, 비평가들은 그들의 동기와 가르침 둘 다를 조소하였다. (224.4)
 윌리암 밀러가 1844년 10월 22일을 그리스도의 재림 일자로 정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티모디 P. 웨버(Timothy P. Weber)는 “비록 밀러주의자들이 그들의 대적들이 단언한 대로 나타나실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 흰 승천복을 입고 지붕이나 언덕에 모이지는 않았을찌라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지 않았을 때 그들은 미국 복음주의 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15고 기록하였다. (224.5)
 2. 최근의 사건들
 할 린제이의 각본. 그와 똑같은 조소의 태도가 최근의 사건들에서 성경 예언을 독단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의해 조장되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할 린제이는 대유성 지구의 종말이라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예언된 북방왕 러시아가 남방왕의 이집트와 함께 이스라엘에 대해 곧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1970년에 예언했다. 그는 이 대결이 예언상의 적그리스도인 유럽 공동체(EC)의 역공격을 일으키고 동방왕 중국이 그 쟁투에 가담하여 아마겟돈 전쟁과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