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은 미래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9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의 미래 재림 개념을 오늘날의 신자들의 실존에 영원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 계획된 신비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재림은 현재 기대하는 바가 미래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요, 미래를 현재에 경험하는 것이다. (220.3)
이러한 재림 소망의 실존적 해석은 고대하는 성경적 재림의 진전과 완성의 개념을 무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과 그의 구속 사업의 옹호의 우주적 계시로서의 신약의 재림관을 무시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서 종말의 전망과 그의 파루시아를 바라보며 책임감 있게 살도록 하는 동기를 없이 함으로 우리의 현재의 삶의 의미를 공허하게 한다. (220.4)
3. 물질주의적 관념론
기술의 위업. 소유와 부를 창출한 서구의 경제 체계의 성공 역시 그리스도인의 재림 소망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서구 경제 제도에 의해 창출된 기술의 위업과 사회적 번영은 정의와 사랑과 번영이 점진적으로 지배하게 될 새롭고 더 나은 사회 질서를 설립하기 위한 무한한 인간 가능성이라는 거짓된 환상을 창조하였다. (220.5)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재림 소망을 현재의 경제와 기술에 의해 제공된 소망으로 인식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우리의 팽창하는 경제와 기술의 현실적이고도 즉각적인 유익은 주님의 재림 때에 경험할 궁극적이고도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은혜의 개념을 모호하게 할 수 있다. (220.6)
자본주의. 개인 기업과 개인의 목표의 합법적 성취를 바탕으로한 자본주의에 대한 강조는 종종 타인의 필요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희생 시킨채 개인주의적인 성공과 성취를 고무시킨다. 개인의 목표—그것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의 성취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주께서 자신뿐 아니라, 지상에 살았던 모든 믿든 사람들의 소망을 성취시키는 날을 보고자 하는 기대를 거의 품을 수 없다. (220.7)
공산주의. 공산주의의 영향은 특히 많은 나라의 노동자 계급에게는 공히 부정적인 것이다. 공동 재산과 부의 균등한 분배에 기초되어 있는 새롭고 평등한 사회 제도의 약속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이상주의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그들의 유일한 소망으로 간직하도록 인도하였다. 이 이상주의는 동유럽과 극동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강력한 공산주의 정당이 있는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서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21.1)
경제적 정치적 계획을 통해 환상적인 궁극적 행복의 목표에 즉각적으로 도달하려는 광적인 노력은 어떤 인간의 계획도 인간의 죗됨과 탐욕과 사망의 공동 운명을 정복할 수 없으므로 운명에 봉착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의 축적에 의해 미래의 안전과 행복을 성취하려 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속에서 이 진리를 강조하셨다. 주께서는 그의 생명을 취하심으로 그를 책망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너에게서 취하여 가리니”(눅 12:20). 무덤의 문을 넘어 행복과 평강의 내세를 바라보려는 동기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은 오직 재림의 소망뿐이다. (221.2)
4. 회의주의적 태도
기롱하는 자들의 논쟁. 인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은 재림 소망을 대신하고 경시할 뿐 아니라 이 소망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와 경멸의 태도를 부추겼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격적이고 가시적으로 재림하시리라는 믿음을 비웃는 자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그들은 수 세기를 통하여 그의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선포해 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여 왔으나 그분은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 당시에 파루시아에 대한 믿음을 기롱하는 자들에 대해 기록하기를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우리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라고 하였다. 사도는 몇 가지 일들을 지적함으로 이러한 균일론자들(uniformitarian)의 주장에 응답한다. (221.3)
베드로의 응답. 첫째로 베드로는 이 기롱하는 자들의 동기에 도전한다. 그들의 경멸은 “자기 정욕을 따른 결과”(벧후 3:3)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대신에 그들은 이 세상의 정욕에 희생되었고, 그리하여 세속적인 자유의 거짓된 약속에 의해 지배되었다(벧후 2:14, 18~20). (221.4)
둘째로 베드로는 비웃는 자들의 역사의 무변성에 대한 주장은 하나님께서 창조와 홍수에 나타나신 바와같이 과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것을 전적으로 간과 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공상적이라는 사실을 “부러 잊으려” 한다고 지적한다(벧후 3:5, 6). (221.5)
세째로, 베드로는 이 기롱하는 자들의 오류는 그들의 역사를 독단적으로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을 측량하려는 데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벧후 3:8)” 사실을 무시한다. (221.6)
이 진술은 신의 시간 개념을 인간의 시간 개념에 소개함으로 인간의 시간 개념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인내를 지적함으로 역사를 “더디”다고 기롱하는 자들의 거짓된 해석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폴 S. 미니어(Paul S. Minear)가 강조한 대로 “그 요점은 시간은 하나님께 진실한 반면, 그분의 시간의 측정은 전적으로 그의 구속적인 목적에 종속된다”10 는 것이다. (221.7)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주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라 ∙∙∙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라고 설명함으로 회의론자들에게 응답한다. 실제로 “더딘 것”으로 많은 사람이 잘못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정과 회개와 구원을 위해 시간과 기회들을 기꺼이 제공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표출하는 것이다. (222.1)
오늘날에 대한 관련성. 그 당시의 기롱하는 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응답은 이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222.2)
첫째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지체하심을 참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처음의 창조와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실 가능성을 배제하는 균일론의 이론에 따라 역사를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222.3)
둘째로, 20세기가 지난 지금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는 문제는 더욱 예민하게 되었다. 인간의 기다림이 하나님의 기다림과 일치한다는 베드로의 재확신은 의미 심장하다. “하나님의 인내는 노아의 때에 방주를 지을 동안 기다리셨다”(벧전 3:20). 그것은 역사의 기간은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회개하고 구원 받기에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반영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222.4)
5. 결 론
인류에게 자기 실현의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는 인본주의는 재림 소망에 대한 믿음을 대단히 약화시켰다. 그것은 재림을 사회적, 실존적, 물질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대신하도록 자극하였고, 그리하여 그 사건 자체에 대해 회의주의적 태도를 조장하였다.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