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2 장 재림소망의 등한
 재림의 소망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생애의 중심이 될 수 있을까?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의 신자들처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함과 경건함의 생애로 이끄는”(벧후 3:11, 12) 원동력을 재림의 소망에서 발견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오늘날 거의 사실이 아니다. 재림 소망은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지라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의식 속에서 모호하게 존재한다. 헨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가 관찰한 대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강림하실 분을 위하여 하늘이나 지옥이나 혹은 그 어떤 곳에도 여지가 없다.”1 (218.1)
 본장의 목적. 본장은 재림 소망에 대한 편만한 경시 풍조에 공헌한 요소들 중 몇 가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이해하는 것은 재림 소망의 이해와 경험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 넣으려는 노력에 있어서 중요한 첫걸음이다. 이 연구는 두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재림 소망을 경시 또는 포기하게 만든 인본주의적 관념론들을 고찰한다. 그 두번째는 무의식적으로 재림 소망의 생명력을 빼앗아 버린 신학적 견해들을 고찰한다. (218.2)
 제 1 부 인본주의와 물질주의의 영향
 I. 인본주의적 소망의 기원
 초기 1500년간 서방 기독교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신조를 유지하였다. 이 신조의 엄청난 영향은 거의 평가하기가 어렵다. 한 예가 미래라는 뜻의 용어인 아브너르(avenir)(프랑스와 스페인) 또는 아베니레(avvenire)(이태리)에 의해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 결정된 고유한 그리스도인의 미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218.3)
 1. 재림 대 미래.
 아브니르(avenir) / 아베니레(avvenire)”란 용어는 영어에 똑같은 동의어가 없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미래(future)로 번역되나 미래(라틴어 푸투룸—futurum으로부터 유래됨)와 아브니르 아베니레(라틴어—아드베니레 advenire로부터 파생)의 의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후자로부터 “오심”을 의미하는 어드벤트(advent)가 유래 되었다. (218.4)
 사람 대 사물(Someone Versus Something). 두 단어의 근본적인 차이는 소망하는 미래의 종류에 있다. 에밀 브룬너(Emil Brunner)가 설명한대로 아베니르/아베니레는 “위로부터, 초월자로부터 발생한 사건을 통한 소망의 실현을 암시한다”2 반면에 퓨쳐라는 용어는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발달한 어떤 것”3이다. 그것은 이교도들이 “퓨투룸” 즉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을 믿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아드베니레” 즉 미래에 오실 어떤 분을 믿는 사실을 가리키므로 그 차이를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218.5)
 이 “아드베니레” 즉 주 예수의 “도래”에 의해 결정되는 미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인간적 근원들을 통해 실현되는 미래의 사회 질서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소망에 의해 점차적으로 대치되어 왔다. 인본주의자들은 본래 자아 실현을 위한 인간의 능력을 믿는 지식인들이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분리된 결과로서 약 500년 전에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219.1)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이 분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의 발전에 대한 소망으로 재림의 소망을 대치하도록 영향을 끼쳤다.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그것이 주님의 오심에 의해 설립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으로부터 성장하였으므로 에밀 브룬너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비합법적인 아들”4이라고 표현한다. 둘 사이의 차이는 더 나은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인가, 인간 역사에 신적인 개입인가의 차이이다. (219.2)
 II. 인본주의의 영향
 1. 미래주의적 신학들
 그리스도인의 활동. 인본주의적 사상의 영향은 인간의 역사에 신의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상황과 정치적 제도를 향상시키는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통한 하나님의 미래 왕국의 수립을 추구하는 소망의 신학, 흑인 신학, 해방 신학과 같은 현대의 몇몇 미래주의적 신학에서 간파될 수 있다. (219.3)
 교회에 의해 자극되고 증진될지라도 인간의 주도를 통해 실현될 더 나은 미래 사회를 위해 소망하고 활동하는 것은 거룩한 잠재력과 속성을 가진 세계의 발전을 위해 인간의 계획들을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들이 신약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진 만큼이나 인간 실존의 상황으로부터 멀어진 역사 속에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5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 왕국을 현 질서 안에 수립하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219.4)
 진실한 소망이 아님. 레슬리 뉴비긴(Leslie Newbigin) 감독은 “만약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후일에 이 땅에 존재할 사회의 상태에 달려 있다면,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들이 결코 보지못할 그 목표를 위해 기꺼이 살아 있는 인간들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옳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에 살고 있는 남녀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며 사회의 진보의 관점에서 무엇이 효율적인가에 대한 심판 이외에는 어떤 인간의 행위에도 마지막 심판이란 없다”6고 지적하고 있다. (219.5)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의, 평등, 자유가 더욱 꽃 피는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 반면, 어떤 실현된 사회적 문화적 성취도 모호한 인간 능력에 의해 영향을 받아 여전히 결함이 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왕국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있지 말아야 한다. (219.6)
 2. 실존주의적 신학.
 상징적 진리. 인본주의의 영향을 또한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재림에 대해 취한 해석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그들은 재림을 인간의 역사에서 발생할 우주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진리의 상징으로서나 “현세를 초월(역사를 넘어선)한 마지막 승리의 예표” 혹은 “현 세대를 변화시키는 점진적인 영적 발전”7으로 본다. 이러한 해석들은 재림 소망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을지라도 약화시킨다. (219.7)
 죠지아 하크니스(Georgia Harkness)는 크리스찬 센츄리지에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그리스도의 초림과 계속될 강림의 진리와 그 숭고한 중요성을 거의 논박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그 용어를 고지식한 것으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복잡한 것으로 이해하든지 간에—이 그리스도인의 최후의 승리를 위해 근본적이라는 것에 대해 마땅히 의심을 가져 보아야만 한다.”8고 기록했다. (220.1)
 신비적 개념. 그리스도의 인격적, 가시적 재림에 대한 성서의 언급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현대의 세계관과는 더 이상 조화될 수 없는 1세기 유대인 묵시 문학 혹은 원시 시대 세계관의 산물로서 간주되어진다. (2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