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3 부 성소에서 예수님과 함께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12. 진설병의 상 (나의 모든 자양분은 그리스도의 것임)
 떡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먹혀야 한다. 그것을 감사하거나 비할 데 없는 그 특성을 찬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사유(私有)되어야 한다. 생명의 떡 속에 있는 영양분은, 매일의 성경 연구를 통하여 예수님을 먹고 살아가며 성령을 통하여 그분을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도록 허용함으로써만 흡수된다. “얼굴의 떡”처럼, “계시된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진이다. ∙∙∙ 아, 각 분야의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는 일꾼들이 만국을 치료하기 위한 생명나무의 잎을 먹게 된다면 좋으련만”(Bible Training School, 1903. 3.). 이 일들은 성경 전편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약속들을 나타낸다(치료봉사, 66).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들은 우리의 영적·육체적 필요를 위한 영양분을 공급해 준다. 점점 더 많이 그것들은 하늘의 이상을 드러내고, 그분의 품성을 우리의 경험 속에 재생시키기 위한 힘을 공급한다. (155.4)
 에덴동산에서 주님께서는 떡을 만드는 여러 가지 곡물을 인류에게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분께 바친 제물을 요구하셨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분의 상을 위한 매 주일의 선물로서 나라의 곳간에서 진설병 열 두 덩이를 제공해야 했다(레 24:8). 우리 역시 “영원한 언약”(레 24:8)에 의한 우리의 감사의 표를 그분께 돌려드려야 한다. 이 계약은 상 가까이 서 있는 포도즙 병에 의하여 성막에 나타난 성육신하신 분의 죽음을 통하여 인쳐졌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만족히 여기신다. (155.5)
 찔림받은 떡
 진설병에 대한 한 가지 이름은 고난 받으신 아버지에 의하여 고안되었고 예언적 진리와 함께 흐느껴 운다. 그러나 그 눈물을 통하여 비치는 것은 언약의 은혜의 무지개이다. 빵 굽는 제사장은 솥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떡에 구멍을 내어야 했다. “찔림받은 떡”(레 24:5, “케이크”)은 찌르는 긴 못과 내어 미는 창을 우리의 상상 앞에 생생하게 그려 준다. 그것은 그분 스스로가 상처받은 떡이요. 그분 스스로가 찔림받은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자아 희생을 나타낸다.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상처받은”(사 53:5)하늘 성막에 있는 이 떡은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볼 것이라고 한(슥 12:10)예언, 모든 구속받은 자들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예언을 영원히 나타낸다. 이 고난의 이상(異像)을 오래 지켜보고 이 생명을 주는 떡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도록 하라. (156.1)
 하나님은 떡덩이의 수를 열 둘로 정하셨다(레 24:4). 관대한 처사가 이 숫자에 숨겨져 있다. 열 둘은 “광야교회”(행 7:38)를 이룬 이스라엘 지파들의 총체이다. 열 둘은 복음교회의 투사들의 수이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열 두 보좌”를 약속하셨다(눅 22:30). 영감의 서약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우리에게 보증한다. 믿음의 모든 자녀는 하나님의 상에서 기억되고, 각 사람은 아버지의 보좌에 한 자리가 있다. 각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백성은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하나의 떡을 나누는 한 가족이다. (156.2)
 똑같은 무게의 이 떡덩이들은(레 24:5)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말한다(행 10:34). 각 지파는 다른 지파들처럼 똑같은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비록 각 특별한 제자가 그의 “믿음의 분량”(롬 12:3)을 가지고 있지만 하늘은 각자에게 그의 필요에 적합한 자양분을 제공한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하여 손을 뻗는가 하면 다른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친구와 더불어 이야기하기 위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산에 올라간다. 그러나 둘다 만족을 얻는다. 구주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이며,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고, 그분 안에서 죽고, 마침내 그분과 함께 통치한다. 왕의 잔치자리에서 각 사람은 임재의 떡(Presence Bread)을 먹는 자로 명명되고, 각 사람은 하나님의 미소에 의하여 소중히 여김을 받게 된다. (156.3)
 진설병은 금요일 오후에 준비되었다
 제사장들이 떡을 구운 금요일은 예비일이었다(눅 23:54; 출 16:23; Menahoth 11:2). “진설병의 떡덩이들은 분리하여 반죽되었고 두 개 한 쌍으로 굽혔다. 그것들은 틀에 넣어져 만들어진다. 그것들이 솥에서 나오면 어떤 결점이 생기지 않았는가 해서 다시 틀에 넣어졌다”(Menahoth 11:1). 안식일마다 새 떡덩이들이 거룩한 상 위에 놓여졌다(대상 9:32; 레 24:8; Menahoth 4:4). (156.4)
 랍비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진설병의 떡덩이들은 길이가 열 손폭(한 손폭은 10cm 강)이었고 너비가 다섯 손 폭이었다. 각 떡덩이는 상의 폭을 가로질러 세로로 놓여졌고 상의 양쪽 끝에서는 각각 두 손폭 두 배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156.5)
 “그리고 가운데는 두 손폭의 공간이 남아 있어서 바람이 그 사이로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Menahoth 11:4). 각 모서리는 위쪽을 향해 있었는데 “그것들의 뿔들은 일곱 손가락 너비(한 손가락 너비는 3/4인치)의 높이였다”(Menahoth 11:4). (157.1)
 진설병은 납작한 떡을 분리시키는 금갈대들과 함께, 그리고 모든 것 위에 뿌려진 유향(레 24:7)과 소금(레 24:7, LXX; 2:3)과 함께 두더미로 진설되었다(레 24:6). 히브리 기록들은 “각각 속이 빈 갈대 반쪽과 같은 모양으로 된” 28개의 갈대를 말하고 있는데 “열 넷은 한 줄을 위하여, 열 넷은 다른 줄을 위해서”였다(Menahath 11:6). 이것들은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떡덩이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요세푸스는 그 진설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상 위에 ∙∙∙ 무교병 열 두 덩이가 놓여졌는데, 각 더미에 여섯 개가 하나씩 포개져 있었다. ∙∙∙ 그리고 그 떡덩이들 위에 유향이 가득든 병 두 개가 놓여졌다”(Antiguites III:vi: 6). (157.2)
 여기에 의식에 대한 기록이 있다. “네 제사장들이, 둘은 손에 두 줄의 떡(혹은 진설병의 더미)을 들고, 둘은 두 개의(유향)접시를 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또 네 사람이 그들 앞에 갔는데 둘은 두 줄의 떡을 치워 주고 둘은 두 접시를 치워 주기 위해서였다. 그것들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얼굴은 남쪽을 향하고 북쪽에 섰으며, 그것들을 치워준 사람들은 낡은 떡덩이들을 치워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새 떡덩이들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언제나 한 손 폭 너비의 다른 떡덩이 위에 한 손 폭 너비의 한 떡덩이를 올려 놓았다. 왜냐하면 ‘내 앞에는 항상’ 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유향]의 접시들을 태웠고, 떡덩이들은 제사장들 사이에서 나누어졌다”(Menahoth 11:7). (157.3)
 제사장들이 진설병을 먹었다
 진설병을 먹는 것은 그것과 일체됨을 묘사했다(레 24:8, 9; 고전 10:16, 17). 제사장과 떡은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떡이 하나가 될 때를 대망케 했다. 이렇게 먹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사장들에게 요긴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먹지 아니하면 ∙∙∙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소화가 되면 이 떡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예수님이 죽음을 맛보셨기 때문에 그분을 먹는 모든 사람은 필요에 결코 주리지 않고 결코 죽지 않는다. (157.4)
 모든 제사장들은 한 주일 묵은 떡을 먹는 특권을 받았다(레 24:9). 일반적으로 “임무 교대를 맡아 들어가는 제사장들이 여섯, 임무 교대를 끝내고 나가는 제사장들이 여섯” 떡덩이를 취했다(Sukkah 5:8). “진설병은 9일째가 되기 전에 결코 소모되지 않았고 11일 째보다 더 늦게 결코 소모되지 않았다. 곧 그것이 안식일 전날에 굽혀서 다음 주일 안식일에 먹게 된다면 그것은 9일 째가 된다. 만일 안식일 전날이 절기일이 된다면 그것은 10일 째 날이 된다. 만일 신년의 두 축제일이 안식일 전이 된다면 11일 째 날에 먹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굽는 일은 안식일에도 절기일에도 하지 않는다”(Menahoth 11:9). (157.5)
 하나님은 당신의 상이 계속해서 하늘의 음식으로 차려져 있도록 요구하셨다(레 4:7; 대하 2:4). (157.6)
 아버지의 온화하고 사랑스런 집의 향기, 냄새 좋은 떡덩이들은 매 안식일 하나님 백성의 구미를 돋구었다. 조리법은 오래된 것이고 힘든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잘못도 매 떡덩이를 만드는 일에 부지 중에 게재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증했다. 그러나 안식일마다 떡은 신선하고, 건전했다. 이것은 모든 것에서 어제와 동일하지만 새롭고 오늘을 만족시켜 주는, 하늘 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하늘 떡을 보게 된다. (158.1)
 낡은 떡덩이들은 옮겨지고 새 떡은 상 위에 놓여졌지만 유향은 금단 위에서 태워졌다.(부조와 선지자, 354). 그리하여 성막을 향기로 채웠다. 지각이 예민한 예배자들은 “사람이 영적 양식과 육신의 양식 모두를 주께 의존한다는 것과 또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그것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부조와 선지자, 354). (158.2)
 “우리는 이 세상 생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혜를 입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는 떡도 그분의 찢어진 육체로 산 것이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660). 하나님 앞에 하나의 “기념물”(레 24:7)로서 타고 있는 이 귀중한 향료는 우리의 대제사장의 중보의 향기였다. 그것은 또한 육체적 영적 양식에 대한 그분의 백성들의 기도와 감사의 표현에 향기를 더 했다. (158.3)
 굶주린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뜰에 들어올 때 안식일 시간은 신성하다. 일반 음식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일주일 동안 성경의 들판에서 진리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 위하여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그의 마음은 불이 붙어 있는 한편, 무릎으로 그는 밀을 갈고 밀가루를 체질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이기심의 누룩을—제거하고 하늘 소금의 맛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달콤한 영께서 밀가루 속으로 흘러들어와서 십자가로 기름을 발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런 수고를 통하여 그의 안식일 떡덩이의 실체는 주 예수님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날에 그의 강단은 그의 백성의 주림을 채워 주기 위하여 준비된 하늘 진설병으로 펼쳐진 잔칫상이 될 것이다. 어떤 설교자도 그 자신의 마음이 말씀으로 더불어 나누는 달콤한 교제로 황홀해지기 전에는 그의 입술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취하지 말 것이다. (1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