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3 부 성소에서 예수님과 함께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12. 진설병의 상 (나의 모든 자양분은 그리스도의 것임)
 떡은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만들어진다
 떡은, 죄로 저주받고 눈물로 부드러워지고 땀으로 기경된 땅에서 자라난 곡식으로 만들어진다(창 3:17~19). 어둠에 묻혀 있지만 그것은 희망을 경작하는 땅에서 돋아난다. 그러나 사람의 노력은 하늘의 축복들—씨의 심장을 따뜻하게 해 주는 태양, 그 영혼을 부드럽게 해 주는 비—의 지원이 필요하다. (152.6)
 그렇게 할 때만이 그것은 “더 풍성한 생애”로, 곧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죽음은 생명의 전주곡이다. (153.1)
 “숨겨져 있던 세월” 동안 예수님은 악명 붙은 나사렛, “싹” 혹은 “가지”라는 히브리 이름으로 된 마을에서 사셨다(히브리어 nasek, Edward Robinson, Greek and 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475를 보라. 사 11:1은, 아라비아어 어근에서, “녹색으로 되다”이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런지 의심했다. 그러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천한 제한된 지역에서 “연한 순”(사 53:2)같이 자라나셨다. 그리고 사람의 손이 그분을 죽여 매장했다. 3일 후에 하나님의 떡 밀은 생명으로, 이 세상의 밭 이랑에서 “첫 열매”로 돋아났다(고전 15:20). 그분은 “인자의 살을 먹지 ∙∙∙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경고하신다(요 6:53). 성육신한 말씀은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영감의 말씀 속에 묻어 두셨다. 그분의 제자들이 읽고 그 원칙을 받아들일 때, 그분의 생명이 그들의 것이 된다. (153.2)
 으깨어진 밀
 주님께서는 진설병은 위하여 “고은 가루”를 요구하셨다(레 24:5). 고운 가루를 얻기 위하여 곡식은 낫으로 수확되고, 도리깨로 타작을 당하고, 바람으로 키질을 당하고, 맷돌의 윗짝과 아래짝 사이에서 갈리는데, 그것은 우리 구주를 사람들이 취급하는 것에 비유되는 처사들이다. 증오와 무시의 칼들이 그분을 잘랐다. 부인(否認)과 조롱의 곤봉이 그분의 뼈를 상하게 했다. 광신과 편견의 질풍이 비난과 조소의 겨를 몰고 와서 그분의 동기와 목적을 둘러쌌다. 그러나 그분의 고통을 통하여 성령의 바람은 그분의 품성을 키질 했다. 거절의 맷돌이 그분의 영혼을 눌러서 뭉겠고, 화신한 악이 마치 밀 가루가 체 안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할 퀴는 손가락으로 그분을 체질했다. 심지어 우리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다. 그분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 그분은 상함을 입고 징계를 받으셨다(사 53:5). 그리고 그분께서 끝까지 인류의 시련을 견디셨기 떄문에, 산 떡은 끝까지 지원할 수 있다. (153.3)
 주님께서는 제사장에게 “고운 가루”(레 24:5)만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셨다. 이것을 위하여 밀은 갈리어지고 그 본래의 양의 3분의 1로 줄어들 때까지 열 하나의 체로 체질을 당해야 한다(Menahoth 6:6, 7). 그리스도에게는 흠이 없고, 쓸데없는 찌끼가 없고 울퉁불퉁한 부분이 없다. 그분의 생애는 가장 세밀한 데에서도 완전하다. 한 어린아이로서 그분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눅 2:52). 성인이 되었을 때 이방인 빌라도는 경외의 마음으로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라고 부르짖었다. 그분의 봉사가 끝날 때 로마의 재판관은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귀들까지도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마 8:29)로 인정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위하여 다락방에서 걸어나오실 때 사단은 그분을 매복하여 공격하고자 그늘에 숨어 기다렸다. (153.4)
 그러나 구주께서는 그의 존재를 폭로하시고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상관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30). 사단까지도 하늘의 고운 가루에서 아무런 흠을 발견할 수 없었다. (154.1)
 감람유가 첨가되었다
 감람유를 밀가루에 첨가해야 한다(레 2:4). “감람 열매의 기름은 성경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 중 하나이다”(Unger의 성경사전, 805). 랍비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모든 소제는 ∙∙∙ 기름을 넣는 것에 있어서 세 행동을 요구했다. 그것은 곧, 그릇에 기름을 붓는 것, 가루에 기름을 섞는 것, 그리고 준비되기 전에 그에 다시 기름을 넣는 것이었다”(Menahoth 6:3). 기름은 부드럽게 해 주고 고쳐 주고 조명해 주는 성령의 봉사를 상징한다. 생명의 떡은 세 차례 기름부음을 받는다. (154.2)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히브리어로 “메시야”, 헬라어로 “그리스도” 이시다. 그분은 성령 충만의 생애를 사시기 때문에 “희락의 기름”으로 넘쳐 흐른다(시 45:7; 히 1:9). 성령의 감화의 기름은 부드럽게 하고 매끄럽게 한다. 마지막 손질로서 고대의 예식법은 제사장이 손가락을 기름 속에 잠그고 굽지 않은 모든 진설병의 떡에다 “십자가 모양의 헬라어 글자 X(chi)”를 기록하도록 요구했다(Menabeth 6:3). 기름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히 9:14)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줄 것을 예표했다. (154.3)
 소금이 맛을 냈다
 맛을 내고 보존하기 위하여 소금이 첨가되었다(레 2:13). “소금의 맛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진리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한 모든 노력은 별 효력이 없다”(3T, 559). 소금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그 제사를 하나님께 가납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예수께서는 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그대의 정력과 능력은 그대가 나의 영을 받는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되려면 그대는 나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시대의 소망, 439). (154.4)
 진설병에는 누룩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레 2:4, 11; 10:12). 이 “누룩 넣지 않은 떡덩이들은”(Josephus, Antiguities III: vi:6) 소제로서 자격을 갖추어 제사장들이 먹게 되었다. 누룩의 부재는 언제나 어떤 이질적인 영향도, 어떤 타락케 하는 힘도, 어떤 외적인 원칙도 우리 구주의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누룩 넣지 않은 떡은 완전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다. (154.5)
 밀가루는 반죽되었다
 모든 재료가 준비되고 혼합되면 반죽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갈바리의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비유로서 제사장은 밀가루를 누르고 찢었다. 오직 이렇게 한 후에 그것은 솥에 들어갈 준비가 갖추어졌다. 일생 동안의 투쟁 후에 생명의 떡은 당신의 마지막 “불 시험”(벧전 4:2)을 견디기 위하여 십자가의 풀무에 들어가셨고 당신을 삼키고자 하는 지옥의 돌풍을 허용하신다. (154.6)
 진노의 불꽃이 그 일을 마쳤을 때 하늘의 떡덩이는 “다 이루”어졌고(요 19:30), 모든 굶주린 영혼들을 만족시킬 준비가 되었다. (155.1)
 성서적 이름들은 진리의 두꺼운 천을 짜는 빛나는 실들이다. 주님께서는 이 열 두덩이 떡을 “내 앞”(출 25:30)에 진설하도록 요구하셨다. 그러므로 진설병은 “얼굴의 떡” 이라고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모두가 영광스러운 많은 표정으로 당신의 아들을 쳐다보시기 때문이다(잠 8:30). “얼굴”은 임재 혹은 개성을 대표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공의와 자비, 능력과 긍휼, 심지어 눈물로 빛나는 그분의 아버지의 모든 사랑스런 얼굴들을 본다. (155.2)
 일곱 가지 촛대의 빛은 “계속해서”(레 24:2, 4, 5, 6; 대하 13:11)떡을 비추었다. 쉐키나의 빛 역시 그분의 아버지의 영광 안에 거하시는 아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떡덩이들을 광채 가운데 끌어안았다. 그것들이 그분의 모습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것들은 “진설병(shewbread)”이라 불리어졌다. 예수님은 “땅이 생기기 전부터 ∙∙∙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 뻐하신 바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22, 23, 30)라고 노래하셨다. 각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당신의 눈동자”처럼 여기셨다. “자기 앞의 사자”처럼(출 33:14, 15; 사 63:9; 신 4:37) “그분의 임재의 떡”은 그분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나타내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양육하시는 성격을 보이었다. (155.3)
 떡은 먹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