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조사심판의 역사 제7장 조사심판 교리의 비평가들
 우리는 대개 우리 신조에 대한 비평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비평들에 대하여 잘 대응하는 것도 우리의 이해를 성장시키는 한 가지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857년 이후로 재림교회의 조사심판 교리에 대한 반대들이 제기 되어왔다. 우리에 대한 비평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경우에는 우리의 조사심판 교리에서 수정이 필요한 측면들을 그들이 잘 지적하였다. 심판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에 있어서는 특별히 그러하다. (77.1)
 재림교회 내의 비평가들
 이어지는 지면에서 내가 언급하는 비평가들은 모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몸담았던 적이 있는 인물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림교회를 떠났고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가 조사심판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재림 운동을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확신은 대개 유지하였다. (77.2)
 더들리 캔라이트(Dudley Canright)는 재림교회의 전도자요 저술가였으며, 2년간은 대총회 위원회(General Conference Committee)위원을 지냈다. 그는 몇 번이나 교회와 사이가 틀어져 떠났었지만 매번 돌아오고는 했다. 하지만 1887년 2월에 그는 재림교회와 완전히 절연하고 침례교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교리에 대한 신학적 반대세력의 ‘선봉장’이”1) 되었다. (77.3)
 1889년에 캔라이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와 절교함>(Seventh-day Adventist Renounced)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그 책은 지금까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 대한 비판서 중에 고전적인 저작으로 남아있다. 이 416쪽 분량의 책에서 절반 이상은 안식일에 대한 반론에 쓰였다. “성소”에 대한 장에서 캔라이트는 조사심판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의 비판은 1844년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독특한 사역을 행하고 계신다는 재림교회의 개념에 집중한다. 그의 논리는, 히브리서에 따르면 “1800년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으로 직행하여 그분의 보좌에 앉으셨다. 히브리서 8:1. 그러므로 그분은 1844년이 아니라 그때에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분명하다”2)는 것이다.

 
 예수께서 언제 하늘 성소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는지에 대해서는 28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77.4)
 엘릿 왜거너(Ellet J. Waggoner)는 재림교회 내에서 성경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에 우리의 관심을 일으킨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와 A. T. 존스(Jones)는 1888년 대총회의 개회에 앞서 열린 목회자 성경연구회의 주 강사였다. 왜거너의 주제는 갈라디아서의 율법이었고, 그는 그것을 기초로 삼아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강의를 확대해 나갔다. 당시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왜거너의 이해를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유감스럽게도 1890년대에 왜거너는 극단적인 완전주의로 선회하였고, 마지막 세대 성도의 흠 없는 완전함으로 하나님의 정당성이 옹호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 (78.1)
 왜거너는 조사심판에 관한 재림교회의 교리 중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가 부정하는 한 가지는 죄인의 죄가 하늘 성소로 전가된다는 개념이었다. 그는 “죄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일종의 상태”라고 주장하면서, “하늘에 있는 성소로 죄가 전가되어 그 장소를 더럽힌다든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거너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따라서 기원 후 1844년이든지, 또 다른 언제든지, ‘성소의 정결’ 같은 일은 았을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왜거너는 1844년에 대해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폐기하고 말았다.”4)

 
성소로 죄가 전가되는 것에 대해서는 19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78.2)
 왜거너가 조사심판의 교리에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또 한 측면은 우리가 다니엘 8:14의 2,300일을 2,300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그말은 2,300 저녁—아침이지, 2,300 일(日)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모든 경우에 ‘일’[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은 따로 있으며, 히브리 성경에서 ‘날’을 의미하는 낱말로는 그것이 유일하다. 왜 여기에만 예외가 생겼는지 이상하게 여겨본 적이 한 번도 없는가?”5)

 
연—일 원칙에 대해서는 27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79.1)
 1891년 이전에 왜거너는 조사심판 교리의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그의 믿음을 다 버렸다.6) 그럼에도 그는 그 후 10년 이상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 (79.2)
 앨비언 F. 밸린제(Albion F. Ballenger)는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목사로 일하였다. 1890년대에 한 동안 그는 오늘날 대총회 홍보, 종교자유부의 전신인 국가종교자유협회의 총무로 일하였다. 1900년 경 그는 영국제도의 교회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고, 한 때 아일랜드 합회의 합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79.3)
 바로 그 무렵에 밸린저는 성소에 대하여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었다.7) 그의 주요 주장들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기원후 31년 보다 앞서서 이미 수천 년 동안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봉사하셨다는 것이었다. 밸린저는 또한,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1844년이 아니라 승천 시에 하늘 성소의 둘째 칸에 들어가셨다고 하는 점에 캔라이트와 동조 하였다. 하지만 밸린저는 여전히 1844년에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믿었다. 그는 단지 그것이 성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었다.

 
심판과 성도의 죄 문제에 대해서는 11장에서 대답할 것이다. (79.4)
 밸린저는 1914년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쫓겨나다>(Cast Out for the Cross of Christ)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고, 교회에서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을 끌기 위하여〈개서링 콜〉(The Gathering Call)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밸린저에 대응하기 위하여 교회 행정자인 엘머 E. 앤드로스(Elmer E. Andross)가 쓴<더 뛰어난 봉사>(A More Excellent Ministry)라는 책을 1911년에 출판하였다. (80.1)
 W. W. 플레처(Fletcher)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으로서 문서전도인, 전도자, 행정가와 대학의 성경교사로 30년 가까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시아의 교회들을 섬겼다. 그는 성소와 조사심판에 대한 우리의 교리와 의견이 달라서 1930년에 교회를 떠났다.8) (80.2)
 플레처는 성소에 관하여 밸린저의 극단적인 견해들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기원후 31년에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히브리서가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그와 의견이 일치하였다. 이로써 지상 속죄일의 원형인 조사심판이 1844년에 하늘에서 시작되었다는 재림교회의 이해가 틀렸음이 드러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또한 구약의 성소에서 제물의 피를 제단 위와 휘장 앞에 뿌린 것이 성소로 죄가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속죄를 상징한다고 이해하였다. (80.3)
 유감스럽게도 플레처가 교회를 떠날 때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목회자들과 교인 다수가 그와 함께 떠났다. (80.4)
 루이 R. 콘라디(Louis R. Conradi)는 독일인이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럽 재림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다니엘 8:9-14에 대한 재림교회의 해석 때문에 고심하였다.9) 10-12절은 작은 뿔이 하나님의 백성과 성소를 공격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13절에서는 한 “거룩한 자”가 다른 “거룩한 자”에게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묻고, 14절은 그에 대답한다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재림교회의 해석에 의하면 성소의 정결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죄를 처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10-12절에서 성소를 더럽히는 것은 작은 뿔의 죄인 것으로 나온다. 또 콘라디는 그리스도께서 1844년에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재림교회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분은 승천 시에 둘째 칸에 들어가셨다고 그는 생각했다. 재림교회의 성소와 조사심판 교리에 대한 반대가 일차적인 이유가 되어 콘라디는 1932년에 재림교회를 떠나 제칠일침례교회에 가담하였다.

 
작은 뿔의 죄와 성도의 죄에 대해서는 13-17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80.5)
 재림교회 내 근래의 두 비평가
 앞에서 언급한 우리 조사심판 교리의 비평가들은 모두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전반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레이먼드 F. 코트렐과 데스먼드 포드는 20세기 후반에 가장 두드러졌던 교리의 비평가들 중 두 사람이다. (81.1)
 레이먼드 코트렐.
 퍼시픽 유니언 대학(Pacific Union College)의 종교학과에서 다년간 가르친 후에 레이먼드 코트렐은 전 7권으로 된〈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의 부 편집장으로 초빙되었다. 또 그는 지금은〈애드벤티스트 리뷰〉(Adventist Review)라고 불리는〈리뷰 앤드 헤럴드〉(Review and Herald)지의 부편집장도 되었다.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