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6. 왕에 대한 반응들 (11:1-13:58)
 독자들은 이 비유를 읽은 후에 두 가지 인상을 갖게 된다. 첫째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충성을 유지한 자들은 분명히 소수에 속한다. 그런 통찰은 예수의 첫 번째 청중들의 경험과 20세기 말엽의 복음 전도의 냉엄한 현실과 조화된다. 둘째로, 그 비유는 복음에 대한 가지각색의 받아들임이 하나님 잘못이 아니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는 구원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실 수는 있으셔도, 열매맺는 것은 인간의 반응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제공하시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불행히도 복음의 선포는 인간의 자행자지함과 하나님과 그의 왕국의 원리들로부터의 죄악적 인류의 소원(疏遠)을 뿌리뽑지 못한다. (170.1)
 가라지의 비유(24-30, 36-42절)는 네 가지 토양의 비유보다 조금 더 깊이 있게 예수에 대한 배척을 설명하고 있다. 흙이 인간의 반발의 외고집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가라지의 비유는 인간의 영역 너머 마귀의 초자연적 활동-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우주적 쟁투-을 가리킨다. 그와 같이 메시야에 대한 배척은 인간의 책임에서 기인된 것일 뿐 아니라 마귀의 역사(役事)에서도 기인된다. (170.2)
 예수께서는 또한 제자들과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가라지의 비유를 주셨다. 그것은 가라지(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와 알곡(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혼합체이며, 이런 상태는 세상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것은 다소의 가라지들이 파문(제명)을 통하여 제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인간의 식별력과 통찰력이 가라지를 뽑아내는 과정을 수행하기에는 충분치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의 통찰력 결여는 인간 관계의 복잡다단함과 죄의 기만성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현재에 교회에서 가라지를 철저히 뽑아내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알곡은 세상 끝에 천사들에 의해 분리될 것이며, 그 때에 각 사람은 자신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40-43절). 그 때까지는, 하나님의 밭은 완전에는 상당히 미달될 것이다. (170.3)
 세 번째 비유(겨자씨)와 네 번째(누룩) 비유는 또한 메시야에 대한 배척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31-33절). 본질적으로, 이 비유들은 작은 시작이라고 좌절하지 말도록 가장 초기의 제자들(연장해서 우리들도)을 가르쳤다. 예수의 봉사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는지 모르나 시간은 그런 관찰이 그릇되었음을 마침내 입증할 것이다. 작은 겨자씨나 소량의 누룩이 그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왕국도 그와 같을 것이다.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예수의 숨은 임재이다. 다시 한번 이 두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있게 될 궁극적 승리를 가리킨다. (171.1)
 다섯 번째(숨겨진 보물들), 그리고 여섯 번째(값진 진주)의 비유들(44-46절)은 우리가 네 가지 토양의 비유에서 잠시 살펴본 바 예수에 대한 배척에 있어서 인간의 반응 요인들로 되돌아가게 한다. 예수의 왕국이 종교적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대다수에게는 인기가 없었다(그리고 결코 그런 적도 없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예수를 메시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대가(代價)는 다름아닌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존재 모든 것이다. 그는 그 왕국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은 그들의 바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고 나중에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16:24, 25). (171.2)
 그처럼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Bonhoeffer, 99)고 말할 수 있었다. 제자도의 바로 그 대가-즉 모든 것-는 마태의 유대인 독자들과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해왔는지, 왜 어떤 가라지들이 주의 밭에서 알곡으로 위장해 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긴 설명을 한다. “진정한 알곡”이 되려면 사람은 그 왕국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71.3)
 그 사실에 비추어, 바로 지금이 “바리새인들”과 오늘날 교회의 다른 율법주의자들이 이웃에 대한 아가페(사랑)를 그 복음에 대한 “값싼” 왜곡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을 중지해야 마땅한 그 때이다. 예수의 요구는 율법주의적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명하고 규정하는 적은 금욕들과 예식들 보다 무한히 더 많다. 그리고 불행히도, 바로 저 금욕들과 예식들은 더욱 더 자신의 성취에 대한 교만으로 인도할 수 있다. 복음의 요구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그의 모든 존재의 총체적인 굴복이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의 경건한 자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났다”고 본회퍼는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심지어 그것조차도 그에게서 취해감을 당했다”(Bonhoeffer, 51). (171.4)
 마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비유는 그물의 비유이다(47-50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미 탐구한 바 있는 주제로 돌아가신다. 그물의 비유의 주된 요점은 아주 직설적이다. 시대의 끝(예수의 재림)에 악인들은 의인들과 분리되어 응분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의 첫 두 교훈적 강연들에서처럼, 이것도 종말적(마지막 때) 심판 장면으로 끝난다(7:24-27; 10:40-42). 말할 필요도 없이, 그물의 비유는 또한 재림 때까지는 그 왕국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소 서로 섞여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172.1)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들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의 서기관이나 교사로서의 자격을 구비하고 있다고 논함으로써 왕국의 비유들에 관한 그 강연을 마무리짓는다. 그 기능에 있어서, 그들의 접근 방식은 최근에 제시된 천국의 원리들뿐 아니라 그 최선의 때의 유대교의 옛 진리들을 소중히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그들은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52절) 올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의 마태의 제시를 감안해 볼 때, 그 새 것은 옛 것의 의미에 빛을 던져줄 것이라고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172.2)
 13:53은 마태의 복음에서 한 전환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마태는 산상설교의 끝과 제자도에 관한 설교의 끝에 사용한 공식과 매우 유사한 한 말(7:28; 11:1)을 사용하여 그의 세 번째 교수적 강연을 끝맺는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172.3)
 마태는 그러고 나서 예수의 고향 동네 나사렛 방문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11-13장의 주제와 조화되게, 나사렛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배척”했다(54, 57절). (172.4)
 나사렛 동민들은 “친숙함이 경멸을 기른다”는 속담의 진실성을 입증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이 고향 동네 소년이 그가 주장하는 인물이 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예수 짧은 말씀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55-57절)고 였다. (172.5)
 11-13장에서 부각된 바,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배척의 반응은 마태복음에서 십자가의 못박히심으로 절정에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173.1)
 ■ 말씀을 적용함
 1. 하나님의 안식일에 대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것은 내 생애에서 짐인가 아니면 복된 안식인가? 나의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안식일을 보다 풍요한 경험으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일들은 무엇인가? 마지막 질문의 각 사항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논해 보라. (173.2)
 2. 나는 나와 신학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에게 너무도 분노한 나머지 증오심이나 불건전한 공격적인 행동을 표출하기 시작한 적이 있는가? 그런 감정들이 예수와 나의 동행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를 도우실 수 있을까? (173.3)
 3.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떤 방법으로 나는 그 관계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나의 지역 교회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증진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교단적으로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173.4)
 4. 나는 그 왕국을 위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팔려고 하는가? 나는 어떤 특정 분야에서 예수의 주권으로부터 나의 생애의 몇몇 부분들을 숨기려는 듯이 보이는가? (173.5)
 ■ 말씀을 연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