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는
12:22의 바알세불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갈등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12장의 안식일 쟁론과 그 후의 투쟁들 사이에 그는 자신의 구약 인용 가운데 가장 긴 인용구(
18-21절)를 끼워 넣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메시야적 예언으로 보아온
이사야 42:1-4를 인용한다. 마태는 이사야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첫째, 그는 예수의 신원을, 예언된 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메시야적 종으로 증명해 준다(
18절). 그 종에 대한 그러한 사랑의 표현은 마태의 독자들의 마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그의 표현을 생각나게 해준다. 그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표현을 두 번 되풀이한다. 한번은 예수의 침례 때(
3:17)에, 다른 한번은 그가 변형(變形)되셨을 때이다(
17:5). 예수의 유일 무이한 신원과 정체는 마태복음의 표면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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