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6. 왕에 대한 반응들 (11:1-13:58)
 그것이 12:46-50에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그의 ‘가족 예증’의 핵심인 것처럼 보인다. 가족들은 마태의 복음서에서 이처럼 난타를 맞아 왔다. 4:21, 22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그를 따르라고 그들을 부르실 때에 그들의 아버지를 떠난다. 8:22에서 예수께서는 한 추종자에게, 만일 그가 예수보다 그의 아버지를 위에 놓으면 참으로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0:34-37에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려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가족들에 의해 배척을 받을 것이라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일이 모든 다른 것들 보다 위에 놓여져야만 한다는 데 대해 아무런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신다. 십계명에서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그에 대한 봉사 앞에 어떤 다른 것도 놓도록 허락되지 않는다(출 20:30). (165.2)
 그러나 그는 12:48-50에서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홀로 버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그들은 믿음 안에서 많은 형제자매들과 어머니들을 갖게 될 것이다(50절). 이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1:12, 13)가 된다. 그리고 하늘 가족으로 “입양된다”(갈 4:5; 엡 1:5). W. D. 데이비스와 D. C. 앨리슨이 표현하듯이, “가족들을 버리라는 예수의 요구는 쌍수를 들고 새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 가족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고독한 삶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다”(Davies and Allison, 2:367). 그와 같이, 마태는 16장18장에서 무르익게 될 가르침인 그의 교회론을 향하여 차근차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165.3)
 그러는 동안 긍정적인 방식으로 예수께 반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상급을 받되 이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받게 될 것이다. 그 사상은 13장에서 다시 제기될 것이다. (166.1)
 ■ 말씀에 들어감
 마태복음 13장을 두 번 읽으라. 그러고 나서 다음의 질문들과 쟁점들을 조사하라. (166.2)
 1. 이 장에는 일곱 개의 비유들이 있다(52절을 비유로 본다면 여덟 개이다). 서너 개의 짧은 문장으로 각 비유의 주요 교훈들을 기술하라. (166.3)
 2. 13장에 제시된바, 에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들을 나열해 보라. 11장12장에 제시된 문제들을 감안해 볼 때, 이 목록에 어떤 다른 이유를 덧붙일 수 있을까? 그 외에 생각해 낼 수 있는 어떤 다른 이유들이 있을까? (166.4)
 3. 한두 문단으로 13:53-58의 의미와 중요성을 논해 보라. “놀래니”(amazed, astonished and marvelled)라는 단어는 이미 마태가 두 번 사용한 단어다.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이것들이 사용된 곳들을 찾아보라. 그런 다음 그 말의 거듭된 사용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논하라. 계속 그런 과정을 사용하여, 13:53에서 그 주요한 관용구가 언급된 다른 곳들을 찾아 보라. 또한 그것이 거듭 거듭 사용된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166.5)
 ■ 말씀을 탐구함
 왕국의 비유들
 13장은 예수께서 비유들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신 첫 번째 경우이기 때문에 마태의 복음서의 흐름에서 두드러진다. (비유란 제일 쉽게 정의하자면 “천상의 의미를 지닌 지상의 이야기”(an earthly story with a heavenly meaning)이다[Barclay, 2:62]).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가르침은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특별히, 그의 두 가르침 강연—산상설교(5-7장)와 제자도에 관한 설교(10장)—은 비유를 광범위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의 세 번째 가르침 강연인 13장에서 이 모든 것이 변한다. 이 장은 일곱 개의 비유들을 담고 있다(13:52를 비유로 본다면 여덟 개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25장 끝에 이르기까지 비유들이 빈번히 사용될 것이다. (167.1)
 “왜 13:1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방법론에 이처럼 급격한 변동이 있는 것일까?”라고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주된 답변은 11장12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배척은 그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15:24)에게 봉사하는 일을 계속하실 것이지만, 이제부터, 그는 좀 더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결국 우리가 12장에서 주목했듯이, 예수께 대한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반대는 너무도 격렬해져서 그들은 그를 죽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54절). 그처럼 그가 그의 반대자들을 멀리하거나 그들로 하여금 법정에서 왕국에 관한 그의 말씀을-그것들이 위험천만한 것이라도 되는 양-그에 대한 고소 거리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방법으로 설교하시는 것이 지당하다. 그는 여전히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접근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는 점점 더 어려운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비유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의 일부이다. 비유들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안전한” 방식으로 기별을 전달할 수 있다. (167.2)
 안전한 것 외에도, 비유들은 또한 좋은 교수(敎授) 도구이다. 첫째로, 비유들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유지시켜 준다. 사람들은 이야기들을 좋아하며, 이것은 옛적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꾼의 하나이셨던 예수께서는 비유들을 사용하셔서 의미심장한 심리학적 요인을 이용하셨다. 그의 청중들의 생활에서 익히 알고 있는 사물들을 가지고 시작되는 그의 비유들은 그들의 관심을 붙잡아 두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8.1)
 둘째, 비유들은 진리를 구체적으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추상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서 익히 하는 것들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계셨다. 비유들은 예수의 청중들을 그들 주위에 있는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적인 실재들로 데려갔다. 그가 말씀하고 계셨던 것은 그들[백성]의 세계에 관해서였다. 그들은 그의 이야기들이 현세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현세적 경험을 넘어선 의미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168.2)
 비유들의 세 번째 교수적 가치는 그것들의 지속적인 역동적인 교수 기능이다. 예수의 비유들은 그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일상 생활의 구체적인 사물들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공과들을 기억하였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그것을 멋지게 표현하였다: “그 후에 그들이 그 교훈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된 실물들을 보게 될 때에, 거룩한 교사의 말씀을 회상하게 되었다. 성령께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자들에게는 구주의 교훈의 깊은 뜻이 더욱더 공개되었다. 신비하게 여겨지던 것이 분명하게 되고 이해하기 어렵던 것이 확실하게 이해되었다”(화잇, 실물교훈, 21). (168.3)
 비유의 네 번째 교훈적 가치는 그것들이 각 개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도록 애쓰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 비유의 주제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들 속에 있는 진리를 깊이 충분히 생각하도록 만들 때에, 명상은 예수의 청중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진리를 살을 붙여 완성하도록 이끌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바클레이가 표현하듯이, “비유는 생각하기에는 너무 게으르든지 바라보기에는 편견을 통해서 너무 눈이 멀든지 한 자들로에게서 진리를 숨긴다(Barclay, 2:62). 예수께서 13:11-15에서 몰아가고 계신 것처럼 보인 것은 네 번째 가치에서의 이 이중적 요소들이다. (168.4)
 교수 수단으로서 예수의 비유 사용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잇는 마지막 가치는 마태가 그 방법론 가운데서 또 다른 하나의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본다는 것이다. (169.1)
 마태복음 11장12장에서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 배척은 13장에서 예수의 교수 방법론에 급진적인 전환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그 장의 비유들의 내용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결국, 마태는 그리스도의 사후 수십 년에 그의 유대인 이웃들을 위해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딜레마에 봉착한다. 어떻게 메시야가 자신의 백성들에 의해 배척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배척은 유대인의 종말론적 기대에 역행하는 듯이 보인다. 왜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 반응하고 대부분은 그를 배척한단 말인가? (169.2)
 마태의 답변은 네 가지 형태의 땅의 비유와 그 설명으로 시작된다(1-9, 18-23절). 본질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에게 있지 않다고 마태의 독자들에게 있다고 가르치신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온갖 형태의 사람들(땅)에 전파되도록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지만,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반응하지는 않는다. 악한 자가 그들의 마음에서 진리의 씨앗들을 낚아채 가도록 허락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19절),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 치러야 할 값을 볼 때 그것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21). 수용적인 태도로 듣지만 이 세상의 염려들이 내세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질식시키도록 허락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22절),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 열매를 맺는 사람들도 있다(23절). (16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