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마태복음 제 II 부 왕의 선포 (4:17-16:20) 6. 왕에 대한 반응들 (11:1-13:58)
 그러는 동안, 사형 당할 운명인 요한은 그의 질문에 대한 만족스런 답변을 얻었다. 예수는 진실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11:1-19에서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을 마치시기 전에, 자기 자신의 드높은 신분과 정체에 관하여 더욱 노골적인 주장을 하실 것이다. 그 주장은 11:14에 나온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침례자 요한은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논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말라기 4:5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구절을 예수의 논증의 순서 속에서 살펴볼 때, 그는 그의 전주자(前走者, 마 3:11) 엘리야인 요한이 이르러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은 그[엘리야 요한]에 뒤따를 등장할 주(主)라는 의미이다! 그처럼 11:14에서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을 주장하고 계신다. 그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통찰력이 있는 유대인 청중들은 이 엘리야 담화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1:23)이시라는 예수의 주장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54.6)
 자신의 신원(身元)을 스스로 주장하시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요한에 관하여 다소 훌륭하면서도 당혹스런 뭔가를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 (155.1)
 앨프레드 플러머(Alfred Plummer)는 이 역설적인 진술의 핵심을 간파한 것처럼 보인다. “요한의 직무와 사명은 그보다 이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높았다”고 플러머는 주장한다. “그는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했을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선구자요 사자(使者)였고, 그가 오셨다고 지적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선언했던 그 왕국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그 왕국에 들어간 가장 비천한 시민들도 거기 들어가진 못한 자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자들보다 더 높다. 영적 특권들과 지식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보다 높다. 그는 신랑의 친구였다. 그들은 그의 배우자들이다”(Plummer, 162). 요한의 의심과, 그 왕국의 원칙들의 본질에 관한 그의 이해의 결여는 그가 여전히 그 왕국 밖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요한에게 있어서 그 왕국은 여전히 오로지 “가까울”(3:2) 뿐이다. (155.2)
 그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들의 지도급 인사들이 요한과 예수 둘 모두를 배척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그 왕국의 혁명적인 원칙들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요한의 회개의 기별도 좋아하지 않았다(11:16-19). (156.1)
 회개하지 않는 도시들인 고라신과 뱃새다에 대한 구절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배척의 문맥 내에서이다. 예수의 제자들 중 셋이 벳새다 출신이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한 눈먼 소경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막 8:22-26). 그리고 그 도시 근교에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이 행해졌다(눅 9:10-17). 확실히 벳새다와 고라신(가버나움에 가까운 곳) 그리고 그와 유사한 도시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계발시킬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156.2)
 예수께서는 그 다음에 그들의 기회들과 선택들을 이스라엘 북방에 있는 이방인의 이방 도시들인 시돈과 두로과 대조시키신다. 이 도시들은 구약에 그들의 사악함을 인하여 비난을 받았다(예컨대, 사 23; 겔 26; 암 1:9, 10을 보라). 그러나 만일 그 도시들이 고라신과 뱃새다처럼 동일한 기회들을 가졌더라면 그들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랬을 가능성이 높은 소돔의 반응을 가버나움의 반응과 비교하심으로써 그 대조를 한층 더 심화시키신다. (소돔은 그 사악함—너무 끔직해서 영어에 sodomy [男色]라는 단어 형성에 기여했다—을 인해 속담화된 도시였다).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本) 동네”(9:1)로 불리었다. 이 도시는 그의 기록된 봉사 가운데 가장 많은 봉사가 행해짐으로 큰 은총을 받은 도시였다. 그러나 소돔과의 비교는 대단히 불리하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의 많은 역사(役事)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메시야를 배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반응이 없는 이스라엘과 은총을 받은 그 나라의 도시들과 백성들은 심판 날에 이 이방의 도시들 보다 더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24, 22절). 그처럼 다시금 마태는 그들의 메시야를 거절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당하게 될 결과들이란 그의 주제를 깊이 확신시키고 있다. (156.3)
 그러나 모두가 잃어버림을 당하지는 않는다. 어떤 유대인들은 긍정적으로 예수께 반응한다. 그것이 11:25-30의 기별이다. 그러나 그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식자층과 특권층이 아니라 “어린아이들”-비천한 백성들(25절)이다.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교육에 의존되지 않는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무도 자주 이 세상의 특권층들은 그들의 지혜와 지위가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만든다고 결론짓는다. 그들의 자만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태도는 구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치명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157.1)
 그러나 예수께서는 특권층이든 아니든, 그들의 필요를 느끼는, 무거운 짐지고 피곤한 자들에게 외치신다. 이런 모든 자들에게 그는 “쉼”(28, 29절)을 제공하신다. (157.2)
 안식(rest)이란 단어는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헬라어에서 같은 뿌리어는 헬라어 구약인 「70인역」 출애굽기 33:14에서 하나님이 모세의 지도권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하셨던 그 쉼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내내, 마태는 예수를 모세에 비유해 왔고, 우리가 앞서 주목했듯이, 첫 복음서의 전개는 출애굽의 경험과 평행을 이루며 나아가고 있다. 마태가 볼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신 18:15, 18). (157.3)
 그러나 둘째 모세는 첫째 모세가 실패했던 곳에서 성공할 것이다. 둘째는 모세를 통하여 약속되었지만, 결코 성취되지 않았던 그 안식을 주실 것이다(11:28, 29; 히 4:1-11 참고). (157.4)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예수께서는 더 쉬운 멍에를 약속하신다(11:29, 30). 랍비들은 “율법의 멍에”를 큰 축복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해석 아래서 그 율법의 멍에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짐이 되었었다. 나중에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율법주의적인 요구들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만든 것에 대하여 그들을 비난하신다(23:4).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에서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를 왜곡시켰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에서 그의 추종자들을 하나님의 원래 계획으로 돌이키려고 애쓰신다. 즉 사람들이 그 자구(字句)가 아니라 그 정신에 초점을 맞출 때 축복이 되도록 돌이키려고 하신다. 그처럼 R. T. 프랜스(R. T. France)는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다: “예수의 멍에는 쉽다.... 그것이 요구를 더 가법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5:20에 따르면 그 요구들은 실제적으로 더 무겁다], 그것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과 제자 관계(내게서 배우라)로 들어가는 것을 대표하기 때문이다”(France, The Gospel, 201). (157.5)
 메시야 예수께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율법은 여전히 쉼을 가리켜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이 그들의 생활에서 그 의도된 목적을 성취하려면, 율법을 올바르게 보아야 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그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바르게 정립한 마태는 이제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율법을 놓고 벌이는 쟁투를 다룰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 싸움의 접촉점은 안식일이다. (158.1)
 바리새인들의 배척이 격화됨
 11장에서 우리는 점점 커져가는 반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마태의 이야기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요한이 그의 기대가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에 관하여 심각한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무리들이 진지함의 부족으로 인하여 예수를 배척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은총을 받은 유대인의 도시들이 그를 배척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12장에서 우리는 모든 것들 중 가장 심각한 배척-즉 바리새인들의 배척을 발견한다. (158.2)
 예수께서는 그의 봉사의 초기에 널리 받아들여진바 되셨지만, 오래지 않아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의 가르치는 것과 그의 행위들이 그들의 기본적 입장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만일 백성들이 예수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이고 따른다면, 그들 자신의 지도력이 위협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같이 하여, 예수과, 바리새인들과 다른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이 점점 증폭되기에 이르렀다. 천국의 원리들은 유대인의 교회의 왕국의 원칙들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58.3)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첫 번째 대결은 안식일과 관계가 있었다. 그들의 모든 종교적 행습들 가운데서,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안식일 준수를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었다. 예를 들어, 적군들이 마카베오 형제들의 시대(BC 2세기)에 그들을 공격했을 때 유대인 병사들은 그들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하기보다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이 살육 당하도록 허락했다(마카베오상 2:31-38). 유대인들은 결국에는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1,521개의 구전 규칙들을 개발해 내었다(Moore, 2:28). (159.1)
 그들은 안식일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사적인 열성을 내었다. 그들은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을 범할 수 있는,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었다. 이런 배경에서, 왜 마태가, 예수께서 그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는 말씀을 하신 후에(11:29, 30) 즉시 안식일 문제를 놓고 예수와 바리새인 사이의 투쟁을 배치하는지를 보기가 쉽다. 그는 예수께서 안식일을 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축복이 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인간이 만든 수많은 규칙들을 배척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를 원한다. (159.2)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그들의 목적지로 걸어가다가 벼이삭을 잘라서 먹었을 때 한 다툼거리가 생겨났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절도죄가 아니라 안식일 범법으로 비난했다. 왜냐하면 신명기서는 여행자들이 밭을 걸어가는 동안 허기를 간신히 면할 정도로 벼이삭이나 다른 작물들을 먹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신 23:25). (159.3)
 문제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벼이삭을 잘라서 먹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안식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규칙을 여러 가지 범했다. 바리새인들이 이해한 대로는, 벼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였고, 손으로 비벼서 껍질을 까는 것은 탈곡이었고(눅 6:1), 그 껍질들을 불어 버리는 것은 키질인 반면에, 그 전체적인 과정은 명백히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섯째 날에 했어야만 할 일이었다. 탈무드에 따르면, 한 개의 말린 무화과 크기보다 더 많은 낱알을 추수해 가는 것은 죄악이었다(Shab. 70b). (159.4)
 그들의 규정에 입각해서 볼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가서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2:2). 그는 그들에게 구약의 두 실례를 들어 답변하신다. 첫 번째는 다윗이 성별된 진설병을 불법적으로 먹은 것을 다루며(삼상 21:1-6), 인간의 필요가 예전적(禮典的) 정밀성보다 앞선다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의 두 번째 예증은 민수기 28:9에 기초되었다. 그 구절은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주중의 여섯 날들보다 안식일에 더 많은 수효의 일상적 희생을 드리도록 명령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죄가 없다. 그처럼 예수께서는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그날의 규정들보다 우위를 차지한다고 말씀하신다. (1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