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파 치유자들에 의해 공적인 집회에서 행해진 치유의 은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반대를 일으켰는데, 치유 그 자체보다는 치유에 수반되는 표현방식과 과시에 더 불편함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치료자들”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한 것처럼 큰 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이나, 주장하듯 하는 스타일에 감정이 상했다. 청중을 조종하기 위해 사용되는 심리학에 대해서도 반대가 나타났다. (735.4)
 교회 역사에 대한 오순절파의 견해는 다음의 시나리오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는 은사주의 교회로부터 태동했으며, 그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성령께서 사명 수행을 위해 능력을 부여하시는 그런 교회였다. 성직 계급의 발달로 성직자들이 부패함으로써 은사들은 점차 사라지고 교회는 암흑기를 맞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일은 회복의 과정을 시작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일은 완성되지 못했다. 은사주의 교회의 완전한 회복, 곧 성령에 의해 사역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받는 일은 이제 오순절 운동에서 발견된다. “이른비”는 사도 시대에 오순절에 내렸으며, “늦은비”는 이제 오순절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내리고있다. (735.5)
 D. 현대 은사주의 운동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주류 교회는 오순절 운동의 경험에 대해 저항하고 영적 은사가 현대에도 주어졌다는 사상을 거부하였으나, 1950년대에 와서 은사주의 운동이 부활하게 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R. 케베도(R. Quebedeaux)는 지적하였다.

   (1) 오순절 현상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모두에게 나타났다.

   (2) 순복음 사업가 국제연맹(FGBMFI)의 활약이 있었다.

   (3) 다비드 뒤 플레시(David du Plessis)의 에큐메니컬 사역이 있었다. (735.6)
 1. 순복음 사업가 국제연맹
 순복음 사업가 국제연맹(FGBMFI)은 성직자들의 지배가 점점 커져가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낀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사업가들과 전문인들이 설립한 기구이다. 그들의 간행물인 ‘보이스’(Voice)를 통해 오순절 경험에 대한 보고가 회람되기 시작했다. 주류 교회 출신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그 보고를 듣고 이 연맹에 가입하고 이러한 경험들을 나누게 되었다. “따라서 순복음 사업가 국제연맹은 은사주의의 부활을 위한 기초석이 되었다”(Quebedeaux, 967). (735.7)
 2. 다비드 뒤 플레시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였던 다비드 뒤 플레시는 다양한 에큐메니컬 집회에서 오순절 운동의 참관인이었다.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담한 이들 사이에서 오순절 운동의 대변인으로서 그 운동의 경험과 메시지를 비오순절파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전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 운동에 대해 경의로 표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오순절운동은 세계 그리스도교계에 제3의 세력으로 받아들여졌다. (736.1)
 3. 주류 그리스도교계
 은사주의 운동이 프로테스탄트교 주류 교회들에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다. 그 해에 캘리포니아 주의 밴나이스(Van Nuys)에 위치한 성 마가 감독 교회 교구목사였던 데니스 베네트(Dennis Bennett)는 자신이 개인기도 시간 동안에 방언을 말했던 카리스마 경험을 자신의 교구에 보고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회중이 나뉘었을 때 베넷은 워싱턴 주 시애틀(Seattle) 시내의 한 쇠퇴해 가는 교회로 옮겨졌다. 거기서 그는 카리스마타를 권장했고, 교회는 경이로운 성장을 경험하였다. 이것이 매스미디어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그의 경험이〈타임(Time)지와 〈뉴스위크(Newsweek)지에 소개되었다. 베넷은 수백만의 주류 교회 목회자들과 사제들의 지원을 받았다. 은사주의 운동은 주류 개신교계에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고, 많은 이들이 이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736.2)
 그 운동은 먼저 가톨릭교회에 침투해 들어갔는데, 1967년 듀케인 대학교(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소재)의 두 신학과 교수가 加여 명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신오순절(neo-Pentecostal)의 경험으로 이끌었다. 그 운동은 듀케인으로부터 노트르담 대학(인디애나 주 사우스밴드 소재)으로, 거기서 다시 미시간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736.3)
 그 운동이 주류 교단과 중산층에 들어감에 따라 전형적인 오순절파 스타일의 예배가 교회를 장악하게 되고, 격식을 갖춘 예배는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되었다. 글롯솔랄리아, 치유, 그리고 예언이 주중 예배의 주요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736.4)
 부활한 은사주의는 신복음주의가 그러했듯이, 신학적으로 성경의 권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통, 그리고 전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신복음주의가 그리스도인 연합을 위해 교리적 동의를 주장하는 반면에 은사주의는 성령 침례를 연합의 원동력으로 본다. 은사주의 운동은 카리스마타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교계 안에 체험적 요소를 되찾았다. (736.5)
 E.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처음부터 카리스마타의 존재를 굳게 믿어 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윌리엄 밀러의 추종자들 중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윌리엄 엘리스 포이(William Ellis Foy)와 헤이즌 포스(Hazen Foss)가 있었다. 포이는 1842년에서 1844년 사이에 밀러 운동과 관련된 이상을 받았다. 포스는 1844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이상을 받았는데, 그 이상을 통해 재림 성도의 무리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여행하는 것을 증언하였다. (736.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형성한 밀러 운동의 작은 무리는 포이와 포스의 경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포이는 자신이 본 것과 관련을 맺었지만 포스는 심지어 두 번째 이상에 그것을 나누라는 지시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다 거절이 계속됨에 따라 그에게 한음성이 들려왔는데, “주의 영이 슬퍼하며 너를 떠났다”라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로 인해 공포에 질린 그는 모임을 소집하여 그 이상을 말하려고 했으나 그것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서 떠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주의 영이 나를 떠나갔다.”라고 그는 소리쳤다(SDA Encyclopedia 10:563). (736.7)
 1844년 10월 22일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희망이 깨어진 지 얼마 후에 예언의 은사가 다시 주어졌는데, 이번에는 밀러 운동에 가담했던 소수의 무리, 즉 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발전한 그 무리 가운데 있던 젊은 여성에게 주어졌다. 1844년 12월 어느 날, 엘렌 G. 하몬(Ellen G. Harmon, 후에 Ellen G. White)이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첫 번째 이상을 보았는데, 그로부터 약 2, 000번의 이상을 보았다. 포이와 포스는 엘렌 화잇이 본 첫 번째 이상과 관련된 내용을 듣고 그녀가 본 것을 자기들도 이전에 본것이라고 확인했다. (737.1)
 모든 영적 은사가 복음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마지막 시대의 교회에 있을 것을 믿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엘렌 화잇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끝나고 예수께서 곧 오실 것을 믿는 가운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자신들은 요한계시록 12:17에 명시된 하나님의 남은 무리로 보았다. 이 남은 무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졌는데, 요한은 예수의 증거를 예언의 은사와동일시하였다(계 19:10; 더 깊은 토론을 위해 X. D를 참조하라). (737.2)
 엘렌 화잇에게 주어진 예언의 은사의 지도를 받아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경험했던 영적 은사의 해석과 관련된 극단을 피하였다. 이들이 피한세 가지 극단은

   (1) 예배에서의 감성주의

   (2) 가짜 방언 말함

   (3) 가짜 기적들이었다. (737.3)
 1. 감성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