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견해
 초기교회 권세자들에 의해 나타난 카리스마타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몇 세기 동안 교회의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육체의 치료는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733.3)
 1. 로마가톨릭교회
 로마가톨릭교회 내에서의 기적적인 치료는 수 세기에 걸쳐 보고되었고 수용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동정녀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에게 바쳐진 신당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수천 건의 주장이 있어 왔다. 예수님과 사도들로부터 유물들이 전해져 내려왔다는 소문이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다. 비록 보고된 치료의 사례들 대부분이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기도한 결과로 일어났다고 하지만 매우 독실한 개인들의 치유도 보고되었다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기적을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 해주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733.4)
 2. 프로테스탄트 교회
 초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개혁된 가르침이 진리로 충만하다는 증거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조롱을 받았다. 아마도 이것이 카리스마타가 사도시대를 끝으로 종결되었다는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발전하게 된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733.5)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지는 않았다. 성령께서는 영적 은사를 통해 나타나는 대신 그분은 성도의 삶을 변화시키셨다. 그분의 능력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극복하고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그리스도인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졌다. 신자의 삶에 나타난 성령은 도덕적 능력으로 열매를 맺었다. T. 스미쓰(T. Smith, 25)가 지적했듯이, “루터와 칼뱅(16세기)은 남녀의 도덕적 본성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단지 인간의 감정으로 대체하는 것을 경계했다.” 한편 스위스와독일의 재침례파 교인들은 외형적 순종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기를 원했고 메노나이트들은 예수님께 순종함으로 초래되는 고난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 모든 초기 개혁운동은 카리스마타를 최소화하였다. (733.6)
 앨더스게이트(Aldersgate)에 따르면, 존 웨슬리(1703-1791)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이라는 개념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었다. 그는 사실상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 감성주의를 받아들였고, “최면상태, 치유, 기적, 그리고 다른 기이한 사건들이 신자들의 삶에 일어날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Smith 25). 웨슬리의 동료 전도자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fe 감정적인 표현에 대한 웨슬리의 개방적 태도에 점점 더 불안해했고, 이러한 현상들이 성령의 사역의 주요한 초점은 아니라고 느꼈다. (733.7)
 그러나 존 웨슬리는 은사주의자(charismatic)는 아니었다. 그와 그 당시의 청교도들은 퀘이커 교도들이 너무 감성적이며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르는 것의 나타남을 자제하기 위해 성경을 충분히 의지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19세기에는 많은 전도자들과 교회들이 웨슬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여기에는 찰스 피니(Charles Finney), R. A. 토리(R. A. Torrey), 그리고 ‘고상한 삶’을 사는 전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결 운동이 미국 감리교회와 형제회 가운데서 번성했고, 회중교회, 침례교회, 독일어를 말하는 복음주의자들, 연합형제교회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들에게는 감성적 황홀경이 아닌 순종과 사랑이 성령의 임재에 대한 참된 증거였다. (734.1)
 20세기 후반에 카리스마 운동이 일어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는 다시 성령의 역사를 두고 나뉘게 되었다. 카리스마 운동 진영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기적 그리고 감정에 초점을 두었고,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거룩한 삶을 위한 변화의 능력에 강조점을 두었다. (734.2)
 C. 성결 운동
 존 웨슬리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즉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께서 죽으심으로써(롬 5:8-10)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분의 은혜로 용서와 칭의의 길이 마련되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믿었다. 그는 또한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은혜의 역사로서의 그리스도인 완전을 강조했으며, 성결에 이르도록 점차적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죄인이 완전에 이를 수 있다는 개념은 다양한 성결교회들이 세워진 기초이다. 이러한 집단들은 자신들을 오순절파로 여기지 않으며, 성령의 사역이 카리스마타보다는 성화와 거룩한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734.3)
 1. 감리 감독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세기에 미국에서는 감리 감독교회가 몇몇 작은 성결교단을 탄생시켰다 이 분리주의 교회들의 그 기원은 유사했다

   (1) 감리 감독교회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한 강력한 리더가 퇴출되었다.

   (2) 그는 독립적인 성결 그룹을 형성했다.

   (3) 작은 성결 그룹들과 합병되면서 조직된 새로운 성결교단을 형성하였다. (734.4)
 이 과정에서 합병된 두 개의 가장 거대한 성결교회는 나사렛교회와 필그림 성결교회이다. 나사렛교회의 동부지역 분파는 나사렛 오순절교회라고 불리다가 후에 오순절이라는 말을 삭제했는데, 이 교회를20세기 초에 탄생하여 발전한 방언을 말하는 오순절파 교회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필그림 성결교회의 창시자인 마틴 웰스 내프(Martin Wells Knapp)는 거룩한 치유의 영적 은사를 강조했다. (734.5)
 2. 오순절교회(Pentecostalism)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에 속한 오순절교회들은 영적 은사들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었다. 웨슬리파 사람들이 주장했던, 회심 다음에는 두 번째 축복(성화)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개념이 찰스 폭스 파햄(Charles Fox Parham, 1873-1929)에 의해 확대되었는데, 그는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가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오순절 운동이 태동한 곳은 캔사스 주 토페카(Topeka)(1901)라고 지적한다. 파햄은 그곳에서 부흥집회를 열고 있었는데, 이때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사람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가졌던 현대의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Melton 43). 그러나 휴스턴에서 파햄으로부터 배웠던 윌리엄 J. 세이모어(William J. Seymour)의 설교를 통해 로스앤젤레스(1906년)의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부흥을 현대 오순절 운동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더 지지를받는다. (734.6)
 “나는 너희에게 물로써 회개의 침례를 베풀거니와 나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크시니∙∙∙그는 성령과 불로써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시리라”(마 3:11)고 한 침례자 요한의 기별에 기초하여, 오순절 운동자들은 그들의 물 침례를 성령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이끄시는 침례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두 번째 침례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성령 안으로 이끄시는 침례로 보았다. 성령의 침례를 받은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열거한 아홉 가지 은사들 중 적어도 한 가지는 나타낼 것으로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가장 자주 강조된 영적 은사는 방언의 은사와 치유의 은사이다. (735.1)
 방언의 은사는 글롯솔랄리아크세노글로시아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글롯솔랄리아는 단지 몇 개의 모음과 자음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통용되는 어떤 언어로 분류되기는 어렵고, 오히려 “말로 표현하는 종교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Melton 41). 한편 크세노글로시아는 자신이 배우지 않은 진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다. (735.2)
 G. 왜커(G. Wacker, 933,934) 역시 이 은사를 두 가지 범주로 나누고 있다. “방언의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는 은사가 아니다. 그것은 통역자가 있을때 교회의 덕을 세운다. 그것은 또한 사적인 기도에서 마음의 열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두 번째 범주는 “방언의 표적”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유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표적이다. 전통적인 오순절 운동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침례의 모든 사례마다 “방언의 표적”이 동반되었다고 믿는다. (7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