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은밀한 휴거의 거장 존 F. 월부어드(John F. Walvrood)는 그가 “휴거의 의문은 종말론보다 교회론에, 즉 마지막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보다는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된다”61라고 기록했을 때 이 가정의 중요성을 명백히 시인한다. 또 다른 주요 전환난주의자인 C. C. 라이리(C · C. Ryrie)는 똑같은 확신을 표현한다.“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분리는 환난의 시작 전에(주된 의미에서 이스라엘과 관계된) 교회가 땅으로부터 취하여 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끈다.”62 할 린제이는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구분이 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난다고 믿는 주된 이유63가 되기까지 발전한다. 그는 만약 휴거가 재림과 동시에 일어난다면 신자가 되어 남아 있는 어떤 죽은 자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가 땅으로 이주되지 않을 것이다.64 다시 말해 린제이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적 왕국은 재림 때에 그리스도에 의해 주를 믿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지상 왕국으로 가정하므로 교회의 휴거는 그 전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믿는 자들이 그의 강림 때에 이 땅으로부터 취하여 진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유대인의 천년 왕국으로 세우기 위해 오실 수 있을까? (205.3)
 재림이 두 국면으로 나누임. 이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세대주의 자들은 재림을 두 국면으로 나눈다. 첫째는 교회의 비밀스러운 휴거를 위해 보이지 않게 오시고 둘째는 7년 후에 악인을 소멸하시고 유대인의 천년 왕국을 수립하기 위해 보이게 오신다. 이 구성의 논리는 옳은 듯하나 그것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그릇된 가정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205.4)
 본 장의 제2부에서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를 근본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성서적 뒷받침이 없음을 보았다. 신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팔레스틴에 있을 분리된 정치적 천년 왕국으로서가 아니라 회복된 새 땅에서 각 시대의 구원받은 자들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지복으로서 보여진다. (205.5)
 유감스럽게도 휴거를 지지하는 증거로서 제시되는 성경의 본문 해석을 결정하는 것은 이 잘못된 가정이다. 예를 들면 이것은 어떤 본문이 오직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되는 대환난을 묘사하기 때문에 교회와 관련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정당성 없는 가정에 기초한 이러한 종류의 순환 논리는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결론은 선입관적인 방법에서가 아니라 주의 깊은 주석으로부터 이끌어져야 한다. (205.6)
 비밀 휴거를 거부하는 네 가지 이유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계된 성경 본문의 주의 깊은 연구는 두 국면의 그리스도의 재림관을 거부하는 주요 이유들을 최소한 네 가지로 시사한다. (206.1)
 재림의 용어. 환난전의 은밀한 휴거를 거부하는 첫번째 이유는 재림의 용어가 이러한 견해에 대해 어떤 뒷받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세개의 그리이스어의 용어 즉 파루시아(parousia)—오심,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계시, 그리고 에피파네이아(epiphaneia)—나타나심 등은 그리스도인의 재림 소망의 목적으로써 전환란적 은밀한 휴거를 시사하지 않는다. (206.2)
 세대주의자들은 파루시아란 말이 바울에 의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에서 은밀한 휴거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모든 그의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것—세대주의 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번지 국면을 묘사하시기 위해 사용되었다.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서 파루시아를 적그리스도의 파멸을 초래할 그리스도의 재림—세대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번째 국면에 있을 것으로 생각됨—을 말하기 위해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 유사하게 아포칼립스와 에피파네이아란 말은 전환난주의자들의 휴거(고전 1:7; 딤전 6:14)와 재림 혹은 그리스도의 강림의 두번째 국면(살후 1:7, 8, 2:8)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복된 소망의 용어는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 상호 교환 가능하게 사용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국면을 분리하기 위한 어떤 근거도 제공하지 아니한다. 이 세 용어들이 믿는 자의 소망의 목적으로 보여지는 그리스도의 후환난적 귀환을 묘사하기 위해 분명히 사용된 사실은 더욱 중요하다. 예를 들면 파루시아마태복음 24장 27, 37, 39절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서 논박할 수 없게 후환난적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아포칼립시스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서의 에피파네이아도 똑같다. 그러므로 복된 소망의 용어는 교회를 휴거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은밀한 강림과 7년 환난의 뒤이은 가시적이고 영광스런 강림에 의한 유대인의 천년 왕국을 수립할 가능성을 배제한다. 사용된 용어들은 명확히 신자들에게는 구원과 불신자들에게는 보응을 가져올 단일의 분리할 수 없는 후환난적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206.3)
 교회의 은밀한 휴거가 없음. 교회의 전환란적인 은밀한 휴거를 거절하는 두번째 이유는 신약 성서에서 교회의 은밀하고 비가시적이고 순간적인 휴거의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로부터 17절에서 발견되는 유명한 재림의 묘사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하나님의 나팔로 하늘을 쫓아 강림하시는 주님에 대해 말할 때 대단히 반대적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던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 남은 자들도 저희와 함게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휴거)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다.”65 호령소리나팔과 산 성도와 부활한 성도들을 대대적으로 모으는 것은 은밀하고 비가시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임을 거의 시 사하지 않는다. 반대로 종종 지적되어 온 것처럼 이 구절은 아마 성경에서 가장 떠들석한 구절일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31절고린도전서 15장 52절의 평행절에서 울리게 될 “큰 나팔 소리와” “나팔”에 대한 언급은 재림의 가시성과 공개적인 본질을 확증한다. 이 구절 중 어느 곳에서도 은밀한 휴거의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다. (206.4)
 대환난으로부터 교회를 옮기지 않음. 교회의 전환난적인 은밀한 휴거의 개념을 거절하는 세번째 이유는 그러한 개념이 환난을 묘사하는 구절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감람산의 설교에서 그의 강림을 즉각적으로 선행할 대환난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면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날이 감하여질 것”(마 24:21, 22, 29)을 약속하셨다. 택하신 자들이 오직 유대인 신자들 뿐이요, 교회의 구성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국가적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교회를 예표하는 그의 사도들에게 상세히 말씀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가와 누가가 이방 교회를 위해 그 설교를 기록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막 13; 눅 21). (207.1)
 또한 마태복음 24장 30, 31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휴거에 대한 묘사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17절에서 바울의 묘사 사이의 현저한 유사성은 주목할 만하다. 두 구절 다 주님의 강림과 나팔 소리, 수행하는 천사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한 유사성은 두 구절이 똑같은 사건을 묘사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교회의 휴거는 “환난 후에”(마 24:29) “능력과 큰 영광”으로(29, 30) 명확히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위치하여 있다. 두 구절 사이의 평행성은 교회의 휴거가 대환난을 선행하는 것이 아니요 반대로 뒤따르는 것임을 나타낸다. (207.2)
 환난 중에서의 보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에게 이 세상으로부터 전환난적인 휴거를 결코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환난 중에서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의 아버지께 간구하실 때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온 세상에 임할 환난의 시간에서 너를 지키리라”(계 3:10. K.J.V). 교회가 시련의 시기 동안 세상에서 없다면 거룩한 보호가 필요없다. (207.3)
 바울에게는 전환란적 휴거가 없음. 전환난적 비밀 휴거의 개념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바울의 권고에 의해서도 부정된다. 1장에서 그 사도는 “주 예수께서 저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하 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때에(살후 1:7, 8)” 이 현시대의 환난으로부터 믿는 자들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 신자들은 이 시대의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은밀한 먼 환난적 휴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후 환난적으로 나타나실 때에 구원을 경험할 것이다. (207.4)
 제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 임박하였다는 데살로니가인들 사이에 팽배한 오해를 논박한다. 이 오해를 논박하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두가지 주요 사건 즉 배도와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할 “불법의 사람”(2:3)의 출현을 상기시킨다. (208.1)
 이 구절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은 주의 강림의 필수적인 선행 조건으로서 은밀한 전환난적 휴거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휴거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휴거는 주의 날이 쉽게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입증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할 수도 있었던 가장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바울이 이러한 강력한 논증을 생략한 것은 바울이 교회의 전환난적 휴거를 믿지 않았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208.2)
 이 결론은 또한 믿는 자들이 주의 강림 전에 보게 될 항변할 수 없는 환난적 사건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바울의 언급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만약 바울이 적그리스도가 나타남으로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교회가 이 세상으로부터 끌어올려질 것을 기대했다면 그는 믿는 자들이 주의 강림 전에 그러한 사건을 볼 것임을 거의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데살로니가인들이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 땅에서부터 끌어올려질 것이었다면 환란을 수반하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그들이 무슨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생략과 확증에 의해 교회의 환난적인 휴거관을 부정한다. (208.3)
 계시록에는 전환난적 휴거가 없음. 계시록은 큰 환난과 관계된 일곱 나팔과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두려운 박해를 가할 짐승의 출현과 마지막 일곱 재앙을 내리는 것(계 8~16장)과 같은 사건을 신약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세밀히 다룬다. 비록 요한이 대단히 세밀하게 환난의 사건들 묘사할지라도 그는 결코 교회를 휴거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전환난적인 비밀 강림을 언급하거나 시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요한의 특별한 목적이 마지막 사건들에 대해 교회를 교훈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더욱 놀라운 것이다. 요한은 분명하게 대환난을 통과할 셀 수 없는 믿는 자의 무리를 언급한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 전환난주의자들은 계시록 4장의 교회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므로 이 믿는 자들은 분명코 유대인들만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는 요한이 환난시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성도들을 그 어느 곳에서도 분리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의심을 받는다. 요한은 환난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계 7:9) 나온다고 명백히 진술한다. 이 구절은 계시록에서 유대인만을 배타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가족 구성원을 포괄적으로 명명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계 5:9, 10:11, 13:7, 14:6). (208.4)
 예를 들면 “어린양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로부터”(계 5:9) 속량된 사람을 가지셨으므로 24장로에 의해 찬양을 받으신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속량하셨다. (208.5)
 요한의 환상은 교회의 휴거가 아니었음. 계시록 4장으로부터 9장에서 교회는 하늘에 있다는 주장은 “이리로 올라오라 내가 이 일 후에 될 일을 네게 보이리라”(계 4:1)는 요한에게 주어진 명령이 교회를 하늘로 휴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추측에 기초되어 있다. 이것은 그 본문이 교회의 휴거가 아니라 요한의 환상적인 이상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므로 근거 없는 해석이다. 심지어는 유력한 전환난주의자인 존 F. 월부어드 조차도 이 묘사를 “휴거와 연결시키기 위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66라고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208.6)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어진 권고와 환난기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권고 사이의 연관성은 이 두 무리가 근본적으로 같은 성도임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일곱 교회의 편지에서는 네 번이나 인내가 필요됨이 강조되며(계 2:2, 3, 19; 3:10) 똑같은 자질이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기대 되어진다(계 13:10, 14:12). 마찬가지로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7번이나 묘사되어 있는 승리의 필요(계 2:7, 11, 17, 26; 3:5, 12, 21)가 짐승과 우상의 수를 이긴 환난 당하는 성도들의 특성(계 15:2)이다. 요한이 똑같은 특성을 두 다른 집단의 백성들에게 돌리고자 의도했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듯하다. (2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