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교회의 하늘로의 이 비밀스러운 휴거는 7년 동안 지속될 이른바 대환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인데 이 기간동안 본장의 제1부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다. 이 7년 기간의 끝에 일반적으로 귀환(returm) 혹은 계시(revelation)라 부르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번째 국면이 발생할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의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예루 살렘에 그의 보좌를 세우며 일천 년간의 영토 통치를 시작하시기 위해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강림하실 것이다. (202.5)
 휴거의 중요성
 마지막 카운트 다운의 시작. 많은 진실하면서도 가끔은 그릇 인도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은밀한 “일순간”의 휴거는 극히 중요하고도 임박한 재림 징조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재림과 함께 정점에 달할 지상 역사의 마지막 7년의 카운트 다운의 신호로 생각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것은 그것의 사전 조건, 즉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과 고대 예루살렘의 재 소유가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임박하다. (202.6)
 그렇다면 어떻게 속히 열국으로부터 수백만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대대적인 잠적(휴거)이 일어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이 지금 갑작스럽게 어느 때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믿음은 “운전자가 사라지면 운전대를 잡으라”고 경고하는 것과 같은 밤바 스티커에 묘사되어 있다. (202.7)
 이미 연착되었음. 할 린제이의 최초의 계산에 따르면 이 교회의 은밀한 휴거 혹은 그가 부르기를 좋아하는 대로 “대증발”(the great snatch)52은 이미 연착되었다. 1970년에 그는 “1948년(현대 이스라엘 국가 형성의 때)으로부터 40년 이내에 이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53고 예언했다. 린제이는 성서의 한 세대의 기간으로부터 40년을 이끌어 내고 무화과 나무의 비유(마 24:32, 33)에 기초하여 1948년의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이 처음에는 휴거와 그 다음에는 7년 환난과 예수의 영광 가운데서의 재림을 보게될 마지막 세대의 시작을 표시한다고 주장하였다. 린제이와 대다수의 세대주의에 따르면 휴거는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보다 7년 전에 일어나므로 그것은 이미 1981년이나 1982년에 일어났어야만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미 시간은 그러한 깜짝 놀랄만 하면서도 무의미한 예언들을 지나쳐 버렸다는 것이다. (203.1)
 이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린제이는 그의 강조점을 1948년의 고정된 사건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유동적인 사건(※역자 주: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것이 그에게 과외의 시간을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최근의 책 “휴거:진실인가 귀결인가”(The Raptare:Truth or Consequence)(1983)라는 책에서 그는 그의 이전에 책에서 “전체의 예언적 예보의 중심”54이라 부르면서 상당히 길게 논했던 1948년의 이스라엘의 재건을 언급하지 아니한다. (203.2)
 린제이는 이제 “우리는 이 기간(환난)의 가장자리(끝)에 있는데 그것은 7년간 지속될 것이다. 라든지 십중팔구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살아서 휴거가 환난 전에 혹은 환난 중에 혹은 그 후에 발생할 것인지에 관한 대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55와 같은 불명료한 사건을 언급한다. 대담한 단언과 은밀한 수정의 결합은 성취되지 않은 예언에 의해 야기된 고통스런 자각의 일반적 징후이다. 유감스럽게도 무비평적인 신자들은 이 징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런 것이 거짓으로 판명된다 할지라도 새롭게 수정된 예언을 계속적으로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이 잘못된 예언을 믿으려는 듯이 보인다. (203.3)
 전환란주의(환난전 휴거 설)의 발생—확장과 쇠퇴
 전환란주의의 기원. 교회가 마지막 큰 환란전에 갑작스럽고 은밀하게 휴거될 것이라는 믿음은 전환란주의(Pretrbulationism)로 알려져 있다. 그 기원은 일반적으로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최근에 데이브 맥퍼슨(Dave MacPherson)은 이 이론의 사상적 기원이 스코틀랜드의 젊은 여인인 마가렛 맥도날드(Margaret MacDonald)에 의해 처음 싹텃음을 암시하는 증거를 제시했다. 1830년대 전반기에 그녀는 맹렬한 시련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으로부터 옮겨지는 것을 한 이상으로 보았다.56 당연히 이 이상은 단지 부분적인 휴거를 언급할 뿐이지 은밀한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7년간의 환란을 가정하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한다. (203.4)
 맥퍼슨은 마가렛의 이상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지도자인 J. N. 다아비(Darby)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가능한 반면 맥퍼슨이 제시한 자료들은 “다아비가 그녀의 견해를 빌려 수정해서 그녀에게 명예를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그것들은 대중화했다 ∙∙∙ . 다아비는 그의 특별한 가르침의 진정한 기원에서 주의를 딴데로 돌리게 한 것이 그의 일이었다.”57 (203.5)
 맥퍼슨의 바로 그 책의 제목 “믿기지 않은 은폐”(The Incredible Cover-up)에 표현된 표절설의 비난은 본인의 견해로는 과장되었다고 본다. (204.1)
 첫째, 마가렛 맥도날드의 견해는 분명치 않다. 둘째, 그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 전환난주의 발생을 촉진할 수 있었던 예언에 대한 폭넓은 관심—많은 예언 연구회에 의해 나타나는 것처럼—이 있었다. 그러나 다아비가 전환난 휴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자요 전파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근거가 있다. 그의 6회의 미국 방문과 그 형제단의 광범위한 문학 활동을 통해 세대주의는 신속히 전파되었다. (204.2)
 전환난주의의 팽창. 전환난주의의 최고의 팽창과 유행의 시기는 20세기 전반부터였다. 아르노 C. 개벨레인(Arno C. Gaebelein), C. I. 스코필드(C. I. Scofield), 무디 성경학교, 제임스 M. 그레이(Jame M Gray), 로스 무디 메모리얼 교회의 해리 A. 아이런사이드(Harry A. Ironside)와 복음주의 신학대학(현 달라스 세미나리)의 레위스 스페리 쉐이퍼(Rewis Sperry Chafer)와 같은 사람들은 전환란적 휴거를 대중화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58 가장 중요한 독자적인 요소는 1909년에 출판되고 1917년에 개정된 스코필드 해설 성경의 폭 넓은 보급이었는데 그것은 회중들에게 이 가르침을 유일하고 정확한 성서적 견해로 가르쳤다. (204.3)
 후환난주의(환난 후 재림설)의 흥기. 1950년대 이후로 더욱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은 전환 난주의를 포기하고 역사적인 후환난주의(posttribulationism)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후환난 주의는 교회는 대 환란을 통과할 것이요, 그 끝에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성도를 깨우시고 살아 있는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해 강림하실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204.4)
 후환난주의에 흥기에 대한 치사는 무엇보다도 풀러 신학 대학원의 신학 교수인 죠지 E. 래드(Geoge E. Ladd)의 영향력에 돌려져야 한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중요한 저서 중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중요한 진술들(1952), 복된 소망(1956), 마지막 사건들(1978) 등이 있다. 이 복음 전도에의 관여와 결부된 그의 학식은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로 하여금 전환난주의적 견해를 재검토하도록 하였다. (204.5)
 래드의 영향력은 후환난주의를 채택하고 그것을 옹호하여 저작한 학자들에 이루어진 다음의 의미 있는 연구에서 보여진다: 인디아나 위노아 레이크의 그레이스 신학 대학원의 학장 알바 J. 맥클라인(Alva J. Maclain)의 왕국의 위대성(The Greatness of the Kingdom; 1959), 트리니티 이벤 젤리컬 대학의 구약학 교수 J. 바르톤 페인(J.Barton Payne)의 임박한 그리스도의 출현(The Imminent Appearing of Christ 1962),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몬트 대학의 종교학 교수 로버트 에이취 군드라이(Robert H. Gundry)의 교회의 환난(1973).59 (204.6)
 이와같은 연구는 전통적으로 전환난주의적 견해를 가진 많은 학자들을 역사적 후환난주의로 돌아가도록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과거에 전환난주의적 휴거의 한 수호자였던 미국 복음주의 자유교회는 트리니티 이벤젤리컬 대학으로부터 교수들이 1981년 연례 목회자 회의에서 전환 난주의에 도전하도록 허용하였다. (204.7)
 “휴거—환난 전인가? 환난 중간인가? 환난 후인가?”라는 표제의 심포지움으로 1948년에 출판된 도전과 응전은 아마도 휴거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가장 학술적인 논증을 제공한 듯하다. (204.8)
 그리하여 복음주의 학자들 중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환난주의로부터 후환난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데이브 맥퍼슨에 의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Inity Today)지의 44명의 편집인 중 둘 내지 세 명만이 아직도 고집스럽게 전환난주의를 고집하고 있다.60 그러나 전환난주의의 짧은 역사뿐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은밀한 휴거를 그릇된 재림 징조로 간주하는 이유가 아니다. 그리스도인 신조의 정확성은 그것이 오래되었거나 인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확고한 성서적 지지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로 하여금 은밀한 휴거를 단순히 인간적인 공상으로 보게 하는 것은 그러한 성서적 뒷받침의 부족 때문이다. (205.1)
 그릇된 가정. 전환난주의 문학을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은밀한 휴거에 대한 믿음은 성서적 가르침 보다는 가정에 더 많이 은밀하게 기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 주된 가정은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이스라엘과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대환난의 경험을 통해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회심시키기 위해 그들을 취급 하시기 전에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