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아브라함이 바랐던 미래의 거룩한 성(계 21:10)은 그에게 가나한 땅을 영원히 소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허락의 원형적 성취가 될 것이다. 이 약속은 모든 믿는 유대인들과 믿는 이방인들인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을 위해 새 땅에서 성취될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말할 때에 이 진리를 강조한다. 믿는 자로서 우리는 가나안 땅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허락의 상속 자이다. 이 약속은 우리가 더 나은 나라에 들어가 새 땅을 유업으로 얻을 때에(히 11:6; 롬 4:13)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199.6)
 메시야적 회복. 원형적 성취는 또한 흩어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모으는 것에 관한 예언에 적용된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두번째”로 모으는 이사야의 예언(사 11:11)은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사 11:4) 영광스러운 심판자로서 메시야의 강림의 배경 속에서 주어진다. 이 마지막 심판의 결과는 평강과 공의와 자연계에서의 조화가 이루어진 것인바 왜냐하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땅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기”(사 11:5~9) 때문이다. 지금 묘사한 마지막 메시야의 회복의 때에 “주께서는 열국으로부터 남은 자를 찾기 위해 두번째로 그의 손을 펴실 것이다”(사 11:11). 이것이 이사야가 예언한 단지 이스라엘을 두번째로 가나안에 모으는 것뿐아니라 메시야가 이 세상에 공의와 평강과 번영을 회복시키기 위한 심판자로 오실 때에 메시야 그 자신에게 그들을 두번째로 모으실 것을 의미한다. 이 모으는 것은 이스라엘 뿐아니라 열국으로부터 오는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사 11:11). (200.1)
 신약 성경은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열국으로부터 모든 신자들을 마지막으로 모으는 것을 묘사한다. 그 때에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그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요,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이 마지막 구세주에게로 모음은 중동에서가 아니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가 예언한 두번째 모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원형적 성취이다(마 8:11, 12 참조). (200.2)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더 깊은 의미. 그러면 이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의 시기가 각 시대의 신자들에 의해 온 땅을 상속하는 것이라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 땅에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복을 그렇게도 명백하게 말하였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대답은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익숙한 용어와 경험으로 궁극적인 축복을 묘사한다는 사실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200.3)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고 가나안 땅은 약속된 평화와 번영의 복스러움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깊은 의미 때문에 이 용어는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궁극적인 실현을 위한 소망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200.4)
 우리는 제2장에서 “예언적 전망”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임박한 역사적 사건들의 투영을 통해 최후의 거룩한 재앙과 회복을 볼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을 주목하였다. 똑같은 방법으로 모든 신자들은 마지막으로 모으는 것을(사 11:11, 49:6) 선지자들에 의해 그 땅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아들이는 수단에 의해 때때로 묘사된다. (200.5)
 위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약 성경 예언의 문자적, 예증적, 원형적 성취에 대한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이 예언들을 구약 시대에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의미가 있다는 결론들을 내리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완전한 실현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틴에 정치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에서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모든 신자들을 새 땅에 모으는 것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이 예언의 성취를 현재이건 천년기 이건 간에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정치적 회복으로 제한하는 것은 이 예언들이 유대인이 미래의 언젠가 귀환할 것에서가 아니라 현재에 교회로 신자들을 모아들이는 것과 새 땅에서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으로부터 미래에 세계적으로 백성들을 모아들이는 것에서 성취될 것으로 보는 신약 성서의 증거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200.6)
 “이방인의 때”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성으로의 현재에 귀환하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세대주의 자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는 예언 중 하나가 누가복음 21장 24절이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49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1967년 6월 6일에 유대인들이 새 예루살렘성을 다시 탈환하였을 때 이 예언이 처음으로 성취되었고 그리하여 이방인들에 의한 짓밟힘이 끝이 났다고 믿는다. (201.1)
 이러한 견해에 대한 이유는 세대주의의 유력한 신학자인 C. F. 베이커(C. F. Baker)에 의해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 “이 성이 어떤 때까지 짓밟힌다면 그 때를 이어서 이 성이 짓밟히지 않을 때가 와야할 필요성이 있다. 만약 이 성경절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50 이러한 추리는 논리적인듯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 외에도 “~까지(until)” 라는 부사의 근거없는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201.2)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until the times of the Gentiles are fulfilled)라는 구절에서 “~까지” 라는 부사의 주된 기능은 예루살렘의 짓밟힘의 종결(termination)을 나타내려는 것이지 유대인의 주권이 이전의 상태로 회복(restoration)될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서 “~까지”(achri)라는 부사는 이전의 상태로의 변화를 암시하지 않는다(계 2:10; 고전 15:25 참조). (201.3)
 이 진술에서 예수는 단지 예루살렘이 발아래 짓밟히는 상태는 50년이나 100년 이내에 끝마칠 것이 아니요 그의 재림 때까지(until) 계속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방인의 때의 성취를 따르는 사건은 예루살렘성 위에 유대인의 주권의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다(눅 21:25~28). (201.4)
 회복이 아닌 멸망의 예언.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회복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 대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대인의 특별한 지위가 끝마칠 것을 가르치셨다(마 23:38 ; 눅 19:41~44). 포도원 지기에 관한 비유에서 신실치 못한 포도원 지기는 후에 포도원을 다시 얻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에게 그것을 주심으로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마 21:41~43). (201.5)
 똑같은 진리가 혼인 잔치의 비유에 묘사되어 있는데 그 잔치에 본래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자리는 거리로부터 들어온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취하여졌다(마 22:1~10). (201.6)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을 자들은 동서로부터 올 것이나, ∙∙∙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움으로 쫓겨날 것이다(마 8:11, 12). (201.7)
 동서로부터 오는 백성들에 대한 이 묘사는 유수로부터 유대인의 귀환에 대한 어떤 예언적 표현들을 암시한다(사 43:5; 시 107:3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 예언을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든 믿는 자를 모으는 것에 적용하신다. 신약 성서는 유대인이 회복된 예루살렘에 귀환할 것을 예언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새 예루살렘에 모든 신자들을 모으는 것을 예언한다. (201.8)
 결론. 회복에 관한 주요 예언에 대한 연구로부터 도출된 명백한 결론은 이것들 중 아무것도 금세기에 지구 역사의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전주곡으로써 팔레스틴에 유대인이 회복될 것에 대한 예상이나 심지어는 암시조차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1)
 성경은 이 예언들이 유대인 중의 남은 자가 바벨론으로부터 팔레스틴으로 귀환 했을 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모든 믿는 자를 그에게 이끄셨을 때에 예증적으로 성취되었고, 그리스도께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새 땅에 그의 백성들을 실제적으로 모으시기 위해 강림하실 때 원형적으로 성취됨을 발견하였다. 1948년 “유대인들의 정치적 회복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알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예언적 징조”라는 견해는 합당한 성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잘못된 견해가 본장의 제1부에서 묘사된 마지막 사건의 인기있는 각본의 기초인 것이다. (202.2)
 2. 휴거
 휴거의 정의. 유대인이 팔레스틴에 회복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일반적으로 오늘날 기대하는 두번째의 잘못된 재림 징조가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교회의 은밀한 휴거(secret rapture) 이다. 본장에서 주목한 대로 세대주의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두개의 분리된 국면으로 발생 한다고 믿는다. (202.3)
 첫번째 국면은 교회의 은밀한 휴거로 알려졌으며 아무때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잠자는 성도들은 부활시키고 변화시키며 살아 있는 신자들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지상의 공중에만 임하신다. 그 때에 그 두 집단은 휴거 즉, 은밀하고도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게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끌어올려진다. “교회”라 불려진 이 신자들은 7년간 그리스도와 함께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