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두번째의 모음.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현재의 재건에 대한 본문 증거로서 간주되는 또 다른 예언은 이사야 11장 11절에서 발견된다. “그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역자 주: K.J· V에는 두번째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도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섬들에서 나오게 하실 것이라.” (196.5)
 열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두번째로 모으실 것에 대한 이사야의 언급은 오늘날 일부의 유대인들이 재건된 이스라엘 국가로의 귀환과 함께 최초로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는 것에 대한 서곡으로 간주되는데, J. F. 월부어드(J. F.Walvoord)의 말을 빌자면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권세와 영광으로 통치하기 위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그 절정에 이를 것이다. 48 (196.6)
 이 견해는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두번째 모음이 기원전 536년 스룹바벨의 영도와 기원전 457년 에스라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 성취되지 않았다는 가정 위에 기초되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주된 이유가 주어진다. 첫째는 바벨론 유수로부터의 귀환은 일개의 국가인 바벨론으로부터였지 “열국으로부터”는 아니었다. 둘째로 바벨론의 유수로부터의 귀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다니엘에 의해 묘사된 대대적인 귀환을 희미하게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6.7)
 “열국으로부터의” 귀환. 첫번째 이유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시한다. 첫째로 전쟁 포로들을 다른 나라들에게 파는 것은 그 당시의 관습적이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멀리 그리고 넓게 이산 되었다(욜 3:7; 렘 42~44; 겔 27:13; 암 1:6, 9). 포로 상태로부터 점차적인 귀환 속에서 널리 유대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많은 나라들로부터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돌아온 자들이 모두 유다 지파에만 소속되지 않았고 다른 종족에도 소속되었으므로 이것은 바벨론 유수 후에 분명히 성취된 것이다(스 2:59, 6:17; 대상 9:33, 34). (197.1)
 둘째로 그 선지자들은 때때로 “그들의 포로된 땅”으로부터의 귀환(즉 바벨론)에 대한 언급과 “열국으로부터 귀환”을 융합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에 이 표현들이 단지 유수 중에서의 유대인의 상태와 하나님의 약속된 회복을 묘사하는 다양한 방법들이기 때문이다. 한 좋은 예가 예레미야 30장 10, 11절에서 발견되는데 그 곳에는 두 가지의 표현들이 같은 구절에서 상호 교환 가능하게 사용된다.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 내가 너를 열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 내가 너를 흩었던 열방을 진멸하리라”(렘 31:8, 11, 46:27 참조). (197.2)
 세째로 열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두번째” 모음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에 현재 귀환하는 것을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적용하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문맥 가운데서 진술된 유대인의 블레셋 사람과 에돔인들과 모압인들과 암몬인들을 파멸시키고 노략하고 복종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들이 서(西)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앉고 함께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사 11:14). 이 나라들은 오래 전에 사라졌으므로 오늘날의 유대인들이 두번째 모음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어떻게 문자적으로 성취시킬지를 알기가 어렵다. (197.3)
 이 공상적인 예언 해석은 단지 그 문맥을 주의 깊게 읽어보기만 해도 피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분명히 모세 아래서 애굽으로부터의 귀환과 관련하여 앗수르로부터의 남은 자의 “두번째” 귀환을 말한다. (197.4)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리라”(사 11:16). 앗수르는 이사야가 서기전 721년에 북방 왕국이 앗수르로 옮겨진 후에 이 말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아마 먼저(또한 11절에도) 언급된 듯하다. 그리하여 이 예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전 6세기에 포로로부터 돌아왔을 때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197.5)
 바벨론 포로로부터 제한된 귀환. 두번째 이유는 기원전 536년 스룹바벨과 기원전 457년 에 스라의 지도 아래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수가 그 선지자들에 의해 묘사된 대대적인 귀환의 희미한 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그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경제적 번영과 농업적 풍요를 경험하지 못하였다(사 35:1, 61:4). 주변 나라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거듭거듭 유대인들을 위협하였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바로 우리 시대의 사건들에서 진술된 바대로 근래의 한 성취를 찾아야만 하였다. (197.6)
 그 땅으로의 유대인들의 귀환은 지금 진행 중에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땅은 버려진지 수세기만에 네게브 사막에 물을 대기 위해 요단강으로 부터의 지류를 통해 개간되고 있다. 이러한 발전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오늘날에 회복의 예언들이 참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믿도록 하였다. 크리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1967년 10월 27일자) 지의 한 여행 광고는 이 유행하는 신조를 적절히 묘사한다. “예언은 오늘날 성지에서 성취되고 있는가? 와보라!” (198.1)
 회복의 예언들의 삼중 성취
 회복의 예언들이 유수 후의 시기에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반박할 수 없으며 최근의 시간에서 더 충분한 성취를 찾는 것은 적당한 것이다. 그러나 더 훌륭한 성취를 찾음에 있어서 가나안 땅과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예언들이 삼중적인 방법 즉 문자적, 예증적, 원형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198.2)
 문자적 성취.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영토의 약속은 먼저 문자적으로 몇 번 성취되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는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음으로 이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43, 45; 왕상 8:56; 렘 32:21~23 참조). (198.3)
 이와 유사하게 선지자들에 의해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에 회복될 것에 대한 약속은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서 귀환했을 때 최초의 문자적 성취를 보았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가 열국으로부터(렘 29:14) 유대인들의 회복을 선포한 똑같은 구절에서 약속된 회복이 일어날 때를 명확히 설명한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70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렘 29:10). 다니엘은 이 예언이 그 자신의 때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에 성취될 것을 정확히 이해하였다. (198.4)
 예증적 성취.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땅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은 두번째로 예증적으로 성취되었다. 신약 성경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과 축복들은 과거에 유대인이 팔레스틴에 귀환한 것에서 문자적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목적이요 내용인 그리스도의 강림 안에서, 강림을 통하여 예증적으로 성취되었다(행 3:25, 26, 13:16, 32, 33)고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신”(갈 3:16) 약속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참된 아브라함의 씨의 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취는 유대인들에 의한 미래의 팔레스틴의 재 소유에 있지 않고 열국으로부터 온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된 땅의 상속에 있는 것이다(롬 4:13; 마 5:5, 3; 계 21:1~8). (198.5)
 이방인들을 모아들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영토의 약속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은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예증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보여진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을 일으켰는지를 보고한 후에 그 회의를 주관한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였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라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 15:14~18). (199.1)
 야고보는 여기서 이방인의 모아들임을 성취할 다윗 왕국에 대한 아모스의 예언(암 9:11, 12)으로 인용하고 이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 이방인들을 모아들임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약 예언의 신약의 예증적인 성취의 분명한 한 예를 가지게 된다. (199.2)
 아모스의 예언을 설명함에 있어서 야고보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는 주목할만 하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를 기업으로 얻으리라”(암 9:12)는 아모스의 구절이 사도행전 15장 17절에서 “그 남은 사람들이 주를 찾게 되리라”가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야고보는 군사력으로 에돔의 남은 자를 기업으로 얻게 될 다윗 왕조의 미래의 정치적 회복에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추구되는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에서 아모스의 예언의 성취를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약 성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예증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199.3)
 원형적 성취. 허락된 땅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은 또한 가나안이 표상하는 새 땅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소유함으로 궁극적으로 원형적인 성취가 있게 될 것이다. (199.4)
 성경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백정들이 새 땅에서 상속할 것의 한 표상이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과 그 믿는 자손들이 그들이 나온바 된 땅으로 귀환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더 나은 나라 곧 하늘에 이르는 것에서 가나안의 허락된 땅에 대한 궁극적 성취를 설명한다(히 11:15, 16). 결과적으로 가나안 땅을 허락받았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히 11:10).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