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관한 바울의 견해. 그리스도와 베드로처럼 바울도 역시 교회를 참 이스라엘로 받았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바울은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행 13:32, 33)고 말했다. (191.1)
 이 설교에서 바울은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 성취는 천년 왕국의 기간에 유대 왕국의 수립을 초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믿는 자에게(행 13:38, 39)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죄의 용서를”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인종적 유대인들의 정치적 회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영적인 구속을 통해서 신약의 교회 속에서 성취되어진다. (191.2)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구절을 사용한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입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 16). 어떤 세대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구절이 믿는 유대인들만을 절대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이스어 카이(και)를 “부가적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그리고(and)”로 번역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바울이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율법주의를 버렸기 때문이다.38 (191.3)
 유대인과 이방인의 통일성.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문제점은 그것이 직접적인 문맥과 갈라디아서가 강조하고 있는 광범위한 신학 둘 다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직접적인 문맥이 “이 규례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또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규례를 따르는 두 집단’에 대한 그 이상의 묘사이다. (191.4)
 광의적인 문맥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통일성을 강조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8, 29). (191.5)
 직접적이며 광의적 문맥의 빛 속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믿는 이방인으로부터 분리된 믿는 유대인의 구별된 집단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분리에 대한 논쟁은 바울이 세우려고 노력하는 통일성을 해치고 있음을 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스라엘” 이라는 구절은 이 규례를 따른 모든 자 즉,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더욱 넓게 규정하기 위한 주석적 방법 속에서 바울이 사용한 것이다. (191.6)
 바울이 이방인을 이스라엘 속에 통합함.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로서 이방인을 이스라엘 속에 통합할 것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이었던”(엡 2:12) 이방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그네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라고 명백히 설명한다. (191.7)
 이 이방인을 “이스라엘 나라”“약속의 언약”속으로 통합하는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둘을 대신하여 한 사람을 만드사 화평케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원수된 것을 소멸”(엡 2:15, 16)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났다. 39 (192.1)
 현재나 미래의 천년 왕국에서 믿는 유대인에 대한 분리된 목적에 관한 생각은 여기서 바울에 의해 전적으로 배제된다. 사실상 그러한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신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명한 통일성을 깨뜨릴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후사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는지(엡 3:5, 6)에 대한 이 비밀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게 하신 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설명 했다.40 세 번이나 바울은 어떻게 이방인들이 언약의 약속을 함께 나누었는지를 여기에서 강 조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결합하신 것을 분리하려는 어떤 신학 체계도 하나님의 목적에 역행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192.2)
 바울의 감람나무에 관한 예증. 로마서 9장으로부터 11장에서 바울은 돌감람나무(이방인)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 효과적인 예증을 사용함으로 이스라엘 속에 이방인을 통합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방인의 구원이 새 감람나무에서 싹이 돋아나므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감람나무 속에 이방인을 접붙인 결과로 이루어졌음을 주목하라. 이스라엘 나무는 불신 때문에 뽑힘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전지, 즉 이방인의 가지를 접붙임으로 재구성되었다.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뿌리와 줄기로부터 살아난다(롬 11:17, 18). 이러한 예증적인 설명에 의해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속에 존재하는 통일성과 계획성을 묘사한다. (192.3)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상호 작용. 세대주의 자들은 교회와는 분리된 미래의 국가적 이스라엘의 회개와 축복을 증명하기 위해 로마서 11장 25, 26절에 호소한다. 그 구절은 “형제들아 너희가 이 비밀을 알기를 원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 26) 세대주의 자들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모아질 직후에 있을 국가적 이스라엘의 대규모적 회개를 가르치는 것으로 설명한다. (192.4)
 이 해석은 네 가지의 중요한 관찰을 무시한다. 첫째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구절을 유대인의 마지막 세대에 전혀 적용시킬수가 없는 것은 그 세대가 단지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유대인들의 지극히 적은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본문은 실제적인 계승을 논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방법에 대해 논한다. 그것은 “그리고 그 때에(이방인을 모아들인 후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하여(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에 의해 시기나게 하는 방법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192.5)
 셋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은 같은 감람나무에 다시 접붙임을 받으므로 구원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구원이 이방인들의 구원과는 별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192.6)
 마지막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것이 역사를 통해 일어난다면, 유대인의 충만한 수를 모으는 것이 그것과 달라야 한다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사실상 31절에서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들도 지금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특별히 말한다.41 이 관찰은 바울이 여기서 연속적인 세대의 순서를 제시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구원과 교회의 구원 사이에 있는 역동적인 상호 관계에 대한 약속을 제시하고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193.1)
 결론.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의 말씀을 통해 고찰해 온 증거의 표본들은 비록 신약 성경이 종종 이방인과 분리시켜 유대인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결코 하나님께서 그 마음속에 교회를 위한 미래의 계획과는 분리된 이스라엘을 위한 구별된 미래를 가지고 계신다고 가르치거나, 또 함축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신약 성경은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통일성을 강조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열 두 문에,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열 두 기초석 위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계 21:12, 14). 이러므로 교회와 이스라엘은 똑같이 현재의 구원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영광과 회복을 함께 누린다. 신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팔레스틴에 있는 정치적 천년 왕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복된 새 땅에서 각 시대의 구원받은 자가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축복에 의해서 보여진다. (193.2)
 제 3 부 세 가지 잘못된 재림 징조
 위에서 연구한 세대주의의 예언 해석의 두 기본 원칙들은 이 장의 제1부에 기술한 마지막 사건들의 상상적인 각본을 구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각본의 모든 주요 사건들에 대한 분석은 이 책의 제한된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단지 세 가지의 잘못되고, 오도된 재림의 징조, 즉 유대인들의 팔레스틴 회복, 휴거, 그리고 예루살렘의 재건에 두고자 한다. (193.3)
 1. 유대인의 팔레스틴 회복
 근래에 팔레스틴에 유대국가의 회복에 두는 기본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핵심적인 예언적 징조의 성취로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간주되는 사건—재림의 징조라고 강력히 주장되어지는 이것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93.4)
 예언의 한 성취인가? 금세기 동안 유대인들이 서서히 팔레스틴에 돌아간 것과 1948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 된 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별한 한 구약의 예언의 경이적인 성취라고 하는 것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더욱이 강력히 주장되어진 바 이 성취는 휴거와 환란과 이스라엘 성전의 재건, 유대인의 회개와 그리스도의 강림, 예루살렘의 다윗의 보좌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될 유대인의 천년 왕국의 수립과 같은 마지막 사건들의 전주곡으로서 간주된다.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