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일관성 없는 문자주의. “일관된 문자주의”의 원칙은 그것의 일관성이 없는 적용에 의해 역시 모순이 된다. 예를 들면 새 스코필드 해설 성경(New Scofield Reference Bible)은 “요셉 이야기, 리브가, 룻, 라합, 요단강을 건넌 것과 같은 수많은 구약의 사건들과 인물 이야기들이 표상학적으로나 혹은 우화적으로 그리스도나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29고 이해한다. (187.6)
 세대주의자들은 이 모순을 성서의 역사적인 부분과 예언적 부분을 구별하므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우화적으로나 표상학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반해, 씨. 아이. 스코필드(C, I, Scofield)의 말에 따르면, 성서의 예언적 부분은 “절대적인 문자적 태도로 해석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30 이러한 성경의 임의적 구분은 신약 성경에서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학적 암시들이 모든 성경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눅 24:27; 비교 24:44).31 (187.7)
 더 나아가 어떤 세대주의 자들은 성경의 예언적 부분에 절대적인 문자주의적 원칙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지 않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예를 들면 뉴 스코필드 해설 성경(New Scofield Reference Bible)은 동물 희생 제사를 회복 할 것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겔 45:13~25)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희생에 대한 해설은 이러한 제물을 폐지한다는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취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유대인들이 에스겔 시대에 잘 알려져 있던 용어들을 사용하면서, 그 본토와 천년 왕국의 성전에서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배로 간주 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188.1)
 이 말들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약 동물 희생의 회복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 성전의 재건만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러한 일관성이 없는 문자 주의의 형태는 모든 세대주의의 “철저한 문자주의” 원칙의 타당성에 도전하고 있다. (188.2)
 하나의 모순된 설명. 이러한 비일관성에 대한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세대주의 자들은 천년 왕국의 성전에서 동물 제사의 실제적인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존 에프 월부어드(John F. Walvoored)가 설명한 대로 그 희생은 대속적인 것이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의 완성된 희생의 단순한 기념에 불과하다.32 (188.3)
 희생을 단지 기념적이며 성예전적인 것으로 해석함으로 문자주의의 원칙을 철저하게 옹호 하려는 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 희생에 의해 성전의 희생이 폐지되었다고 가르치는 신약 성서(히 10:9, 7:18, 8:13)를 부정할 뿐 아니라 세대주의자들이 고수하기를 원하는 “철저한 문자 주의”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그 희생의 목적은 에스겔에서 속죄를 위한 것(겔 45:15, 17, 20)으로 명맥하게 누누히 진술되어 있다. 이 구절이 구약 성경에서는 희생의 화목, 또는 속죄적 기능을 나타내기 위해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일관주의는 에스겔의 희생은 속죄적 제물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기념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않된다고 요구하고 있다. (188.4)
 요약하자면 세대주의 자들에 의해 옹호되는 철저한 문자주의 원칙은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인 본질을 무시하기 때문에 성경의 예언을 적절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구약 예언의 메시야적이며 확장적인 성취를 무시하며 또한 성경 예언에 대한 일관성 없는 해석을 통하여 그 자체를 모순에 빠뜨린다. (188.5)
 2.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함
 두 다른 백성들. 철저한 문자주의는 세대주의 자들을 결정적인 두번째 원칙, 즉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분리가 실존한다는 것을 지지하도록 인도한다. 세대주의 신학의 주도적인 인물인 루이스 스페리 쉐이퍼(Lewis Sperry Chafer)는 “각 시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분리된 목적을 추구하고 계신다. 하나는 그 안에 세상의 백성과 세상의 목적이 포함된 지상과 관련된 것으로 유대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백성과 하늘의 목적을 가진 하늘과 연결된 것으로 기독교이다”33라고 기록하고 있다. (188.6)
 분리된 목적. 이와같은 지나친 신학적 확신이 성서 예언에 대한 세대주의적 해석을 결정한다. 분명한 구분이 성경이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한 것과 교회에 대하여 예언한 것 사이에 존재한다. 라이리(C. C. Ryrie)는 분명히 진술하기를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의 이유는 “교회는 어떤 의미에 있어도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성취시키지 않고 있으며 ∙∙∙ , 교회 시대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삽입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두 개의 분리된 목적을 가진 두 개의 분리된 백성으로서 보신다. 결과적으로 세대주의자들은 아직 성취 되지 않은 많은 구약 성경의 예언들을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여전히 미래에 성취되어져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189.1)
 “두 백성의” 견해에 대한 평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이 개념은 타당성이 있는 성경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그럴듯한 가정인가? 신약 성경은 교회를 “본래의 이스라엘 백성과는 다른 분리된 백성으로 보고 있는가? 차후에 보게 되겠지만 그 대답은 명백하다. 신약 성경은 교회를 일시적인” 삽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True Israel)의 연속으로 본다. 후자를 입증하기 위해 간단한 암시들이 그리스도와 바울과 베드로의 의미 있는 몇 가지의 진술들에 의해 주어질 것이다. (189.2)
 그리스도께서 참 이스라엘을 모으심. 열 두 제자들을 자신의 사도로 부르시고 안수하시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의 남은 무리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교회라고 부르는 새로운 유기적인 조직체 안으로 모으시려는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셨다(마 16:18, 19). 후자는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신하기 위해 고안된 독립된 유기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과 이방 세계의 잃은 양을 모아들일 한 우리(fold:마 10:6; 비교 15:24; 행 1:8)이다. (189.3)
 이방인들을 모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언급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느니라”(요 10:16, 56:6~8)고 선언하셨다. 메시야적인 목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남은 자를 두 분리된 무리로서가 아니라 한 무리로 모으시기 위해 오셨다. (189.4)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리라”(마 8:11, 12)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을 어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미래 유대인 세대에게가 아니라 동서로부터 올 열국의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주목 할 만한 것이다.35 (189.5)
 현재적인 실체. 구약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의 왕국은 그리스도에 의해 미래에 실현될 이스라엘의 영토적 정치적인 회복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죄와 사단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승리의 봉사를 통해서 시작된 현재의 실체로 보여진다. 예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분리된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교회 즉, 한 백성이 믿는 유대인과 이방으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36고 말씀하셨다. 약속된 메시야의 왕국이 미래에 있을 유대인의 세대가 아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참 이스라엘의 적은 무리에게 주어졌음(마 11:29, 13:38, 8:11, 12)을 주목해야 한다. (189.6)
 F, F. 브루스(F. F. Bruce)는 “왕국을 받게 될 적은 무리를 형성하시기 위해 자신에게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께서(눅 12:32; 참조 단 7:22, 27)는 새 예루살렘의 설립자로 그 자신을 드러내셨다”37고 적절히 묘사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양무리 혹은 양이라고 말했다.(사 40:11; 렘 31:10; 겔 34:12~14). 그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왕국을 주신 “작은 무리”라고 부르심으로 예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참된 남은 무리와 동일시 하셨다. 더욱이 그의 사도들에게 모든 나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하시므로(마 28:19) 본래의 이스라엘의 예언적 사명(사 49:6, 60:3)이 온 천하로부터 온 제자들로 구성된 메시야의 적은 무리인 교회에 의해 성취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이스라엘은 교회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부로서 계속 남아 있다. (190.1)
 새 이스라엘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교회를 고대 이스라 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의 성취로 보았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회복에 관한 요엘의 예언(욜 2:28~32)이 교회에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행 2:16~21). 베드로에게 있어서 교회는 구약 성경에 예언되지 않은 실체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시적인 삽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무리에 대한 종말론적인 실현이었다. 만약 교회의 시작이 베드로에 의해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보여졌다면 우리는 교회의 마지막 사건들이 역시 이스라엘에 관한 구약의 어떤 예언의 성취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믿을만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 (190.2)
 교회는 새 이스라엘임. 베드로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구약의 칭호들을 교회에 적용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하신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벧전 2:9, 10). (190.3)
 교회에 대한 이 묘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특징짓는 세 구약 성경절을 모은 것이다(출 19:6; 사 43:20, 21; 호 1:6, 9, 2:1). 베드로는 일단의 구약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견해들을 모으고 교회 안에서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 때에 베드로는 가장 단순한 말로 택하신 족속은 더 이상 배타적 종족적인 유대인이 아니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다.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을 성취하는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