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인류를 위한 재림의 소망 제 11 장 재림소망의 그릇된 징조들
 세대주의적 예언의 각본에 포함된 모든 마지막 사건들의 포괄적인 분석은 이 연구의 제한된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마지막 사건들의 각본을 구성하기 위해 세대주의 자들에 의해 사용된 세 가지의 예언 해석 방법을 고려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185.4)
 제 2 부 예언 해석의 잘못된 원칙들
 1.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
 위에 묘사된 마지막 때의 각본은 (1) 철저한 문자주의(consistent literalism)와 (2) 이스라엘과 교회의 분리로 알려진 두 가지 예언 해석의 원칙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므로 발전되어 왔다. 그것들이 전체적인 세대주의 예언 해석의 골자를 결정하므로 이 두 원칙을 간략하게나마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185.5)
 철저한 문자주의의 정의. 근대 세대주의자인 헤르만 호이트(Herman Hoyt)가 설명한 대로 명확히 진술된 철저한 문자주의 원칙은 “성경을 문자적이고도 정상적인 의미에서 취하고 이것을 성경 전체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20 현대의 또 다른 대변자인 차알스 · C 라이리(Charles. C. Ryrie)는 “세대주의는 문자적, 정상적인 명백한 해석 원칙의 일관성 있는 적용의 한 결과이다. 어떤 다른 신학 체계도 이렇게 한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21라고 분명히 진술한다. (185.6)
 세대주의자들은 “그 예언들이 함축하는 본래의 문자적, 문법적 방법에 따라 예언을 해석하는 것이 특징”22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평가하기 전에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85.7)
 “철저한 문자주의”에 함축된 의미들. “철저한 문자주의”의 원칙은 특히 구약의 예언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 성전의 재건 그리고 동물 희생 제사의 부활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마지막 때 환난 그리고 특별히 소위 요한계시록 20장의 유대인의 천년기 동안에 팔레스틴의 유대 국가에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을 요구하고 있다.23 저명한 세대주의 학자인 드와이트 펜티코스트(J. Dwight Pentecost)는 이렇게 말한다. “확립된 해석 원칙에 따르면, 다윗의 언약은 문자적 성취를 요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오르셔서 다윗의 백성들을 영원히 통치하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4 (185.8)
 철저한 문자주의에 대한 평가
 점진적 계시. 철저한 문자주의(역자주: ‘일관된 문자주의’라고도 함)의 원칙이 성경의 예언을 해석하는 합법적인 방법인가? 구약의 예언은 그 성취에 관한 신약의 증거들과 독립된 하나의 폐쇄된 단위(Closed Unit)로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적인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완전한 최종적인 계시가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고 신약 성경에서 입증된 그분의 더 큰 계시의 서곡에 불과하다.25 (186.1)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했던 구약 메시야의 성취로 보기를 거부하는 한 유대인 주석가는 구약 성서를 폐쇄된 경전, 즉 다시 말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마지막 계시로서 해석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구약 성경 예언의 근본적인 성취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 주석가들은 신약이 증거하는 빛 속에서 이것들을 해석한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것은 두 성경 사이에 존재하는 신학적이고 영적인 유기적 통일성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186.2)
 메시야적 성취. 세대주의 자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결코 오시지 않았으며 신약 성경이 기록된 적이 없는 것처럼 구약 성경을 읽는다. 이스라엘 백성과 팔레스틴 땅과 다윗의 통치, 성전과 동물 희생에 대한 약속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문자적이고 자기 충족적 예언으로 받아들이며, 인류의 구속의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점진적 계시의 한 완전한 부분으로써 받아 들이지 않았다. (186.3)
 예를 들면 세대주의 자들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그의 자손이 가나안 온 땅을 영원히 상속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약속(창 17:8; 12:7, 13:15, 15:18 참조)은 무조건적이고 문자적인 약속이며 그 성취는 1948년 유대인들에 의한 팔레스틴의 극적인 회복과 함께 처음으로 시작되었다26고 주장한다. (186.4)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문자주의적 해석은 신약과 구약 양자의 증거를 무시한다. 전자는 그 땅의 약속은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며(창 17:8, 9, 18:18; 레 26:40~42; 신 4:25~31) 역사적으로 몇 번 성취 되었음(수 21:43~45, 24:8~13; 왕상 8:56; 렘 32:21~23)을 설 명한다. 후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향한 땅과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의 천년 왕국 속에서 국가적 이스라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체결하신 언약의 내용이며 목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성취된 것(행 3:25, 26; 롬 4:13)으로 해석한다. 27 (186.5)
 확장적 성취. 일관된 문자주의 원칙은 구약 예언들의 메시야의 기독론적 성취뿐 아니라 그 것들의 확장적 성취 역시 무시한다. 미래 사건에 대한 예언적 묘사를 마치 그것들이 성취되기 전에 기록된 역사처럼 문자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해석하므로 세대주의자들은 더 큰 혹은 예상치 않던 예언의 성취를 위한 어떤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186.6)
 제2장에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가 예를 들어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다윗과 같은 왕으로서, 고난의 종으로서, 하늘의 인자로서 예언되었음을 주목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제자들은 이 메시야적 예언들 중 어떤 것들은 극단적 문자주의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극단적 문자주의에 의해 해석하므로 그분은 그들이 발전시킨 문자주의적 해석에 적합하지 않게 되어 메시야를 거절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186.7)
 이 예는 절대적인 문자주의로 예언들을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부적당한지를 예증 해 준다. 선지자들은 근본적으로 정확한 미래의 사건의 전개를 예언하는 점장이가 아니다. (187.1)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교수인 알 제이 · 월브로스키(R J. Werblowsky)는 1971년의 예루살렘 성서 예언 협의회에서 “우리(유대인) 중 대부분은 선지자들이 예언하기 보다는 미리 말하는 것(telling forth)이라고 말하곤 한다. 사실상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언(prophecy)이 예보(prediction)라는 생각은 예언적 기별의 실제적인 영적 크기와 영적 의미의 축소로 나타나게 될 것이” 28라고 적절히 묘사했다. (187.2)
 예기치 않은 성취. 세대주의적 문자주의는 역사와 예언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서 이루어질 예언의 미래적 성취를 확대시키고 변형시키고 해석할 권한을 가지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예언된 메시야의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을 성취하셨다. 자신의 비천한 성육신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이전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어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보다도 위대하였다(마 12:6, 40, 42; 막 2:24~28; 요 6:33~35, 4:12~15; 히 7:15~18). 이렇게 하여 그는 다양한 메시야의 역활을 성취하셨으며 그들의 문자적 해석에 따르시지 않으셨다. (187.3)
 이와 유사하게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영토에 대한 언약들은 신약 성경에서 유대인들에 의한 팔레스틴의 재소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열국으로부터 온 신자들에 의해 전혀 새롭게된 땅을 상속하므로 성취된다(롬 4:13; 마 5:3, 5; 계 21:1~8). 이것이 바로 가나안 땅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사는 모든 신자들이 되는 것이다(갈 3:17, 28, 29). (187.4)
 신약 성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믿는 후손들이 단지 팔레스틴으로 되돌아 가기를 고대하는 것만으로 나타내지 않고 첫 불입금(down payment) 또는 서약에 불과한 팔레스틴보다 “더 나은 나라”에 이르기를 고대 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히브리서는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 16)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확대된 성취는 “일관된 문자주의”의 세대주의적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도 듣지 못하였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고전 2:9) 장차 올 더 낫고 큰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에 따르는 것이다. (18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