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7 장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 신학
 굿브로드(Walter Gutbrod)는 율법의 기능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바르게만 이해하면,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외에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외의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으려는 인간 쪽의.. 여하한 시도를 막아준다.”24 (124.1)
 질문이 남는다. 바울이 말한 모든 이스라엘이 “몽학 선생 아래”와 율법의 저주나 정죄 아래 있다(갈 3:23-25)고 한 시대가 모세 시대를 의미하는가? 많은 이들이 바울이 단지 그리스도 전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러한 이해를 부인한다. 그것이 옳다. 그는 아담 안에서의 옛 시대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시대를 대조하면서 죄, 율법, 그리고 메시아의 약속 등과 같은 신학적인 용어로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롬 5:14-18; 골 1:13과 비교). 바울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존재 질서” 25를 생각하고 있다. 바이스(Harold Weiss)가 이것을 잘 설명한다. (124.2)
그러므로 아담의 세계에 더 이상 살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삶과 행위가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 말씀의 권능으로 통제된다 ∙∙∙ .여기서 율법의 성취는 아담의 세계에서 의미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 한다. 아담의 세계에서 율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율법의 계명들 중단 하나도 불순종하지 않음을 확실하게 함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그것은 사랑으로 타락한 자들을 끌어올리고 “믿음의 가정”(갈 6:10; 5:14과 비교) 안으로 그들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26
(124.3)
 레이번(Robert S. Rayburn)은 하나님의 율법의 영원한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바울 사상에 있어 일반적으로 이 율법의 구속하는 기능은 그가 의롭게 되기 이전에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난다. 사실 그것이 칭의로 이끌어 준다.”27 성서적 언약 신학에 대한 그의 방대한 분석에서 레이번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125.1)
예레미야, 바울, 히브리서에 나타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참으로 구분하는 것은 주관적이다. 전자는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맺는 것이고, 후자는 부름을 받고 구원받는 사람들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언약 사이의 구분은 BC와 AD와 관계가 없음같이 영원한 구원의 큰 문제들 중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다.28
(125.2)
 이러한 구속적 견해는 역사적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는 갈라디아인 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주장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새로운 믿음의 경험의 원인이 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율법 준수의 의가 이스라엘을 위해 정해진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믿음의 길은 또한 모세의 은혜 언약의 핵심이었다(롬 10:6-8에 나타난 신 30:14을 보라. 히 4:1-2과 비교). (125.3)
 비록 믿음과 불신에 대한 결정이 구속사의 모든 시기에 각 사람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앙적인 경험을 객관적인 구속사 과정으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바울은 하나님과 맺은 그의 구속적 관계를 부활하신 구주와의 객관적인 만남에 기초하고 있다(갈 1:12).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단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나아가게 된 그의 개인적인 발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의 개인 신앙 경험에 나타난 메시아적 언약의 성취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갈 1:12; 2:20; 3:9, 14, 21-25 참조). (125.4)
 그와 그의 종료 신앙인들에게 이 메시아 사건은 이미 다가온 부활의 삶 즉 영생을 미리 맛보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믿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고 그 안에서 통합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 됨이 그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그 권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이 이미 모든 그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진바 되었다.”29 (126.1)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간의 상황도 변화되었다. 세상에 사는 죄인은 이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에 관한 복음 기별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희생의 죽음이 이스라엘에게 한 언약의 약속을 비준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새 언약의 중보자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 이 진전된 계시를 선포함으로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창조주와 화목되도록 초청을 받는다(고후 5:17-21). 그리하여 그들은 양심의 평화,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을 얻는다.(롬 5:1-5 참조). (126.2)
 바이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죄의 세상을 멸하고 바울을 더 이상 죄인되지 않게 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행위였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행동이다. 그는 사람이 살 새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인간의 모든 구조를 그들의 덧없는 본성에 관한 통고위에 두셨다.”30 (126.3)
 바울의 묵시적 조망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문제를 현대 유대 교와의 관계속에서 초점을 맞추어 예리하게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메시아는 역사의 어느 특별한 순간에 오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오심은 다만 역사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19세기 전에 구속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구속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31 (127.1)
 이 변하지 않는 도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단면적 강조보다 기독교 복음의 좀 더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필요를 드러내 준다. 바울 기독론의 전체 시야는 이면적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온전한 완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중 강림을 받아 들이고 있다. 베커(J. Christiaan Beker)가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역사는 두 개의 초점, 즉 그리스도 사건과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의 날인 파루시아를 지닌 타원이 되었다. 이 두 초점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이 바울 사상을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는 파루시아를 임박한 것으로, 그의 사도적 사명을 그 강림을 위한 준비로 간주한다.”32 (127.2)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롬 8:23)을 위한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롬 8:24)기 때문이다. 비록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후서, 로마서 8장,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지막 사건들에 대해 조직적인 주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미래의 완성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견해로 보고 있다. 고린도전서 15 장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는 때인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이 완성 되는 때에 제시된 “바른 순서는 놀랍다 ”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 15:23, 24). (127.3)
 그리스도의 왕권이 파괴할 마지막 원수는 사망 그 자체이다(26 절). 그러므로 죄와 사망은 마지막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묵시적인 노래인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미 지금 신자들은 “죄의 주권에서 자유하게 되어 새로운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다.”33 (128.1)
 바울은 묵시적 관점을 통해 각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두 강림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아무도 아직 죄 없는 “완전”을 이루었거나 도달하지 못하였다(고전 13:10; 빌 3:12), 각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빌 3:13)자는 초청을 받는다. 그는 특별히 다른 곳에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갈 4:19; 롬 8:29과 비교)라고 하여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표현하였다.34 (128.2)
 바이스는 바울의 주장을 충실하게 나타낸다. “심지어 침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새 세계 창조에 참여한 자들도 율법이 계속해서 그 전통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아담의 세계와 긴장 관계 속에 있다. 그 긴장이 제거되는 것은 오직 파루시아의 때이다.”35 (128.3)
 베커는 바울이 “그리스도인 삶의 ‘아직 아니(not-yet)’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사건과 마지막 심판의 조명 아래 윤리적 책임의 필요를 강조하였다”36고 바른 결론을 내렸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현재의 믿음과 확신에서 구속사의 목표인 하나님 사랑의 우주적 승리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이동한다(8:17-39 참조). 그는 분명하게 확언한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3-24). (128.4)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은 역사의 구속과 창조를 겨냥하고 있다.”37 그러나 바울도 그의 묵시적 관점에서 유대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 언약의 갱신을 확인한다. 이것은 우리가 제10장에서 살펴 볼 로마서 11장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구절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다. (129.1)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 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1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