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7 장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 신학
 현대의 성서학 연구들은 사도들의 기별에서 이 “성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11 특별히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이러한 성서적 조망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 사건은 모든 역사의 중심점”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보편적 진행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절정이다 12라고 진술하였다. 그는 “나는 구속사 오리엔테이션에서 전체 신약을 위한 총괄적 기초를 본다”13고 설명하였다. (118.2)
 화란의 신약학자인 리더보스(Herman Ridderbos)는 “학자들은 점점 더 바울 선포의 구속사적 종말론적 특성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적절한 접근법의 출발점을 발견한다”14고 하였다. 그는 골로새서 1장에 나타난 구속에 대한 바울의 더 큰 견해를 설명한다. (118.3)
전체 구속 사역은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다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선재하신 영광의 배경에서 조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구속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룩한 드라마, 우주적인 전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안에는 죄와 잃어버림을 당한 상태에 있는 인간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천사와 마귀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모든 창조된 세계를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 아래로 다시 가져 오는 것이다.15
(119.1)
 메시아 시대는 곧 성령 시대
 신약은 구속의 계획이 점진적으로 완성 되는 것을 보여준다. 브루스는 “성 금요일과 부활절이 지나면서 원래의 설교자가 설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16 예수와 바울은 두 개의 구별된 “신앙 시대”를 나타낸다고 인식하였다. 역사적 예수에서 승귀한 그리스도로 바뀐 것은 신약의 복음에서 오순절 이후 사도들의 기별로 관점이 독특하게 이동되었음을 의미한다. (119.2)
 사도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현현으로 거룩케 하시는 성령을 체험하였음을 나타내었다(행 2 장; 롬 1:4; 5:1-5; 8:9-11, 23 참조). 바울은 이 시대는 메시아 시대이면서 동시에 성령 시대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바울은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를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고후 3:17-18).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성령 충만한 것”“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엡 5:18, 25; 롬 8:14)과 같은 것이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메시아 시대의 구원과 성화의 권능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119.3)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요엘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 오순절의 베드로 설교와 일치하여(행 2장), 바울도 성령의 충만을 “말세”와 부활하신 주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나타나신 현현의 증거로 간주하였다(롬 5:1-5, 8:1-2, 9-11; 엡 5:19). 데이비스는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에 대한 실체는 성령의 임재, 곧 장차 올 시대의 권능의 도래였다”17고 확인하였다.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 것은 이방인 신자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은 구원을 줄 수 없고, 회개한 죄인을 의롭게 할 수도 없고, 생명과 덕을 줄 수도 없기 때문이다. (120.1)
 바울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와 같은 도덕적 덕목 모두를 “성령의 열매”로 간주하였다.(갈 5:22-23).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변화시키는 선물이요. 그리스도인 도덕성의 원천이다(갈 5:2, 5; 롬 5:5 참조). 그는 성령의 위치는 그리스도인 삶을 다스리는 자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사역을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되었음을 “증거하고” “인치는” 것, 심지어 마지막 구원의 완성에 대한 “담보”“보증”으로 묘사하였다(롬 8:2; 고후 5:5; 엡 4:30). (120.2)
 율법과 약속의 대조적인 기능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율법과 약속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보다는 율법을 중심으로 삼는 반대자들”18에 대한 그의 변증적인 입장을 인식하여야 한다. 사도는 율법은 약속보다 “430년 후에 생긴 것”(갈 3:17) 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 준 율법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널리 인정되는 것처럼, 바울은 “율법”이란 용어를 주장하고자 하는 상이한 목적에 맞추어 그의 서신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19 갈라디아서에 보내는 바울의 주된 논지는 전체적으로 시내 “법”“행함”을 요구하고, 그렇기에 생명과 의를 약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갈 3:10 참조). 그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2)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근본적인 결론을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롬 3:11)라고 진술한다.20 (120.3)
 비록 약속과 율법이 모두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지만, 그는 그 각각을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 안에서 서로 다른 심지어 반대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은 “범법함 을 인하여 더한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갈 3:19)이라고 설명하였다. (121.1)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율법이란 “죄 아래”(롬 3:9) 있는 인간의 죄악적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주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이 목적을 선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악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깨닫는다는 것은 여전히 “죄 아래”(롬 3:19) 있는 것이고 “율법 아래 매인 바”(갈 3:23) 되어 있는 것이었다. (121.2)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에 대한 우리의 깊은 필요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율법과 은혜가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122.1)
 리더보스는 “바울의 율법론과 유대 랍비들의 율법론 사이의 가장 날카로운 대립이 바로 이것이다”21라고 하였다. 바울의 견해로는 율법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죄인들을 죄악의 감옥에 가두기 위하여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속을 위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의를 드러내어 약속을 믿는 믿음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정해진 이 목적을 되풀이하여 설명한다. (122.2)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122.3)
 율법과 약속의 대조적인 기능을 언급함으로 바울은 또한 종살이와 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대조를 나타내고자 하였다(갈 4:1; 5:1, 13). (123.1)
 바울은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을 간단히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고 요약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이 죄에게 전적으로 죄악적인 권능을 준다는 의미이다(롬 7:13 참조). 바울은 이 구절로 하나님의 법을 이제는 무효한 것으로 실격시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마지막 나팔 소리에” 죄와 사망이 “이김에 삼킴 바” 될 때까지(고전 15:52) 죄를 드러내는 그 영원한 목적이 유효함을 인정한 것이다. 그 때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는 묵시적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22 (123.2)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썩을 육신에 있는 자기중심성 즉 율법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롬 7:25)고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 항존하는 실재로 인해 바울은 궁극적인 약속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외치게 되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묵시적 본문인 고전 15:57에 다시 언급된다). (123.3)
 이 외침은 바울이 그의 심령과 삶 속에 내재하는 죄의 권능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개인적으로 경험하였음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있어 인간을 “율법 아래”로 인도하는 법의 기능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123.4)
 블레이즌(Ivan Blazen)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변증을 잘 설명하였다. “그러나 율법을 약속에서 분리하고 믿음을 행함에서 분리하면, 언약은 곡해되고 그 결과는 자유보다는 속박이 될 것이다 ∙∙∙ .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가 형성될 때(갈 3:25; 4:1-5) 끝날 것이다.”23 (123.5)